유희경은 13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어린 나이에 홀로 흙을 날라다 장사지내고 3년간 여막살이를 했으며 3년상을 마치고 나서는 병으로 앓아누운 어머니를 30년간이나 모신 효자로 소문이 났습니다. 여막살이 중에 마침 수락산 선영을 오가던 서경덕의 문인 남언경에 눈에 띄어 주자가례를 배운 뒤 예학(禮學)에 밝아진 그는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喪)때는 으레 초빙되었지요.
“하룻밤 맘고생에 귀밑머리 희었어요 / 소첩의 맘고생 알고 싶으시다면 / 헐거워진 이 금가락지 좀 보시구려” 이 시는 조선 선조 때의 유명한 여류시인 매창이 그의 정인(情人)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지은 <금가락지>입니다. 얼마나 애타게 그리웠으면 가락지 낄 손가락이 여의었을까요? 그렇게 매창이 그리워한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은 허균의 <성수시화>에 보면 “유희경이란 자는 천한 노비이다. 그러나 사람됨이 맑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으며 시에 능했다.”라고 소개합니다.
미천한 신분이라 관직없이 시를 지으며 지내다가 부안지방에 이르러 명기 매창(1573~1610)을 만나 사랑에 빠졌으나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모집하여 활동하는 한편 호조의 비용을 마련코자 부녀자의 반지를 거둬 충당케 한 공로로 선조로부터 통정대부(通政大夫)직을 받게 됩니다. 이후 인목대비로부터 여러 번 술과 안주를 받게 되며 시문학에도 뛰어나 정업원(淨業院) 하류에 침류대(枕流臺)를 짓고 시를 읊으며 당시에 쟁쟁한 사대부들과 교류하였지요. 노비 출신이지만 효성이 지극하고 주자가례에 통달하였으며 나라의 위태로움에 발 벗고 나선 유희경은 장수하여 80살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92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 보기 드문 천민 출신 선비요 학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