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예조에서 아뢰기를, "중국어를 배우는 것은 큰 나라를 대하는 데 있어 먼저 처리해야 할 요긴한 일지만 책이 드물어 학자가 쉽게 얻어 보지 못하니, 청컨대 우선 《박통사(朴通事)》와 《노걸대(老乞大)》를 각각 1벌씩 황해도와 강원도에 나누어 보내어 판각하게 하고, 교서관(校書館)에 보내어 찍어서 널리 반포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는 《세조실록》 세조 4년(1458년) 1월 19일 기록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외교관의 한 사람인 역관이 있어서 외국과 교역하고 소통했습니다. 그리고 외국어 전문 교육기관인 사역원(司譯院)에서는 4대 외국어인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 일본어를 가르쳤고 외국어 학습교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조 4년 당시 외국어를 가르치는 책이 드물어 이에 대한 대책을 낸 모양입니다. 조선시대 중국어 교재는 《노걸대(老乞大)》와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가 있고, 일본어는 《첩해신어(捷解新語)》, 몽골어는 《첩해몽어(捷解蒙語)》,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 등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노걸대의 ‘노’는 우리말의 ‘씨’, 영어로 하면 ‘미스터’쯤 되는 말이고 ‘걸대’는 몽골인이 중국인을 가리킬 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적을 막는 도구는 염초(焰硝)보다 절실한 것이 없는데 성절사(조선시대 중국의 황제나 황후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던 사절)나 천추사(조선시대 중국에 파견되는 사신)가 모두 무역하여 오지 못하였으니 매우 염려스럽다. 이번에 무역해 오는 사람들이 마음을 다해 주선하여 많이 무역하여 오면 그 정성을 가상하게 여겨 각별히 상을 주어 타인에게 권면이 되게 할 것이다. 이언광(李彦光)은 본 아문의 정직을 제수하고 최의홍(崔毅弘)은 알맞은 직위를 내려서 모두 예외로 우선 중국에 가서 염초를 사오게 하라.“ 이는 《광해군일기[정초본]》 24권, 광해 2년(1610년) 1월 16일 기록입니다. ‘염초’는 고려ㆍ조선시대에 사용하던 화약의 핵심 원료로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심해지자, 나라에서는 이들의 배를 불태울 수 있는 화약의 제조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특히 최무선은 화약 제조의 핵심 기술인 염초 제조법을 원나라 기술자로부터 알아냄으로써 화약을 자체적으로 제조할 수 있게 되었지요. 하지만, 한국 역사상 처음 화약을 개발한 고려 후기의 무기 발명가 최무선은 1380년 왜선 500여 척이 침입해 약탈하자 심덕부, 나세와 함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요즈음 기사나 글을 보면 기자나 교수, 작가 같은 지식인들이 국어를 배웠나? 싶을 정도로 엉터리로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 국민임에도” 하면 될 것을 “대한민국 국민임에도 불구하고”라고 씁니다. 여기서 ‘불구하고’는 일본말에서 가져온 것으로, 없으면 더 명확한 글이 되는데도 쓸데없이 붙이고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에 위치하고 있다.”라고 씁니다. 하지만 여기서 ‘위치’는 뱀을 그리고서 있지도 않은 발을 그려 넣는 ‘사족(蛇足)’이 됩니다. 그저 “~에 있다.”라고 하면 되지요. 한 기관이 보내온 보도자료를 보면 “이외에도, 거주하다, 개최하다, 외부, 전했다, 게시한다, 휴관한다”와 같이 버릇처럼 한자말을 씁니다. 이는 “이 밖에도, 살다, 열다, 바깥, 말했다, 올린다. 쉰다”처럼 바꿔 쓸 수 있는 우리말이 있는데도 외면 합니다. 특히 ‘전한다’는 다른 사람 말을 옮길 때 써야 함에도 직접할 때 써서 잘못된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이 잘못 쓰는 말에 ‘너무’도 있습니다. ‘너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정해진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라고 풀이하여 부정적인 상황을 꾸며주는 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경북 문경에 있는 ‘문경옛길박물관’에 가면 국가민속문화재 <문경 최진일가묘 출토복식>이 있습니다. 이 유물은 지난 2006년 경북 문경시 영순면에 있는 전주최씨 무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최진(崔縝)과 그 부인, 그리고 후손으로 추정되는 3기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은 중치막, 액주름(겨드랑이 아래 주름이 잡혀 있는 곧은 깃의 옷), 족두리형 여모, 저고리, 바지 등 모두 65점이지요. 특히 ‘중치막(中致莫)’과 ‘족두리형 여모(女帽)’는 지금까지 발굴된 출토복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중치막은 사대부가 사람들이 나들이할 때 입던 옆트임이 있는 곧은 깃의 도포(袍)로,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의 것이었으나 이 중치막은 임진왜란 전 것이라는 점에서 이 시기 복식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문경 최진 일가묘 출토복식’은 16세기 중후반기 남녀복식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서, 이미 지정된 국가민속문화재 '문경 평산 신씨묘 출토복식'과 함께 당시 지역의 사회문화상을 엿볼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문경옛길박물관”은 과거길로 유명한 문경새재를 조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 해가 새로 바뀌어 낮이 점점 길어지고 양기가 돌아와 만물이 화기를 머금고 있는 이때 만백성을 위해 자나 깨나 말없이 축원하는 것은 농사가 잘되라는 것이다. (가운데 줄임)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고 백성도 나라의 근본이며 백성이 편안해야만 나라가 편안한 법이다. 이것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의 이치로서 혼연일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 나라의 영원한 운명을 비손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이는 《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1791) 1월 1일 치 기록으로 정조 임금은 “백성이 편해야 나라가 편하다.”라고 강조합니다. 이어서 정조는 “농사철을 빼앗지 말고 생업을 흔들지 말며 수시로 살펴서 도와주는 것은 지방관의 직분이고, 볕이 나야 할 때는 볕이 나고 비가 와야 할 때는 비가 와 낮은 데는 습하지 않고 높은 데는 메마르지 않게 되는 것은 나 한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라며 지방관을 독려하고 자신에게도 다짐합니다. 지난해 연말 우리는 갑작스러운 계엄령과 무안공항 여객기 참사로 인해 정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고, 내일을 확실히 알 수 없는 그 고통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진행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영남 백성의 일을 봉명사신(奉命使臣, 임금의 명을 받드는 신하)인 승선(承宣)에게 자세히 물은 뒤 연석(筵席, 신하가 임금의 자문에 응답하던 자리)을 물러 나와 촛불을 켜고는 관상감이 올린 상소를 보고서야 비로소 희미하게 천둥소리가 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끊임없이 천지신명에 답하는 정성을 간직하고 있었던들 놀라운 천재지변이 신하를 접견하는 때에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 혹시라도 듣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가운데 줄임) 이렇듯 듣고서도 듣지 못하다니 공경하는 마음을 제대로 지니지 못한 나 자신을 살펴볼 때 모든 조처와 행동에 있어 이르는 곳마다 법도에 맞지 않음을 더욱 알겠다.“ 이는 《정조실록》 49권, 정조 22년(1798년) 10월 5일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천둥소리가 나자 정조 임금은 나라에 변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더욱이 그를 직접 듣지 못하고 상소를 보고 알았다는 것을 자책하며 임금이 친히 근신하는 뜻으로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도록 명했습니다. 또 성종은 가뭄이 들어 오랫동안 감선했는데, 거기에 더해 낮에 물을 만 밥을 올리도록 하자 신하들이 ”보통 사람들도 지라와 위장이 찬 것을 싫어하기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그림 이무성 작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서울(지금의 경주) 밝은 밤에 밤늦게 노니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도다. 둘은 나의 것이었고,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이 노래는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지었다는 8구체 향가 “처용가"입니다. 또 《삼국유사》의 <처용랑ㆍ망해사> 조에 보면 동해 용왕(龍王)의 아들로 사람 형상을 한 처용(處容)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 천연두를 옮기는 역신(疫神)으로부터 인간 아내를 구해냈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그 설화를 바탕으로 한 처용무는 동서남북 그리고 가운데의 오방(五方)을 상징하는 흰색ㆍ파랑ㆍ검정ㆍ빨강ㆍ노랑의 옷을 입은 5명의 남자가 춤을 춥니다. 처용무의 특징은 자기 아내를 범하려는 역신을 분노가 아닌 풍류와 해학으로 쫓아낸다는 데 있습니다. 춤의 내용은 음양오행설의 기본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악운을 쫓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춤사위는 화려하고 현란하며, 당당하고 활기찬 움직임 속에서 씩씩하고 호탕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처용무는 통일신라에서 고려후기까지는 한 사람이 춤을 추었으나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다섯 사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가무형유산 가운데는 <백동연죽장(白銅煙竹匠)>도 있습니다. ‘연죽(煙竹)’이란 일반적으로 담뱃대를 말합니다. 백동으로 만든 담뱃대를 백동연죽이라 하며, 백동담뱃대를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백동연죽장이라고 하지요. 담뱃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뒤 일본을 통해 담배가 전래하면서라고 전해지며, 그래서인지 대일무역의 중심지였던 동래가 전통적인 명산지입니다. 담뱃대의 구조는 입에 물고 연기를 빨아들이는 물부리와 담배를 담아 태우는 대꼬바리 그리고 그것을 잇는 가는 대나무 설대 세 부분으로 구성되지요. 대꼬바리는 열을 받는 데다가 구조상 부서지기 쉬워서 구리, 놋쇠, 백동과 같은 금속으로 만들고 간혹 사기제품도 볼 수 있으나 극히 드뭅니다. 물부리는 쇠붙이에 한하지 않고 옥(玉), 상아, 쇠뿔같이 비교적 여러 가지 재료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편입니다. 무늬에 따라 이름이 다른데, 무늬가 없는 백동연죽은 민죽, 무늬가 예쁜 것은 별죽ㆍ꽃대라 부릅니다. 별죽은 재료에 따라 은물죽, 오동죽이라고 하지요. 백동연죽을 만들 때는 가장 먼저 백동을 만드는데 동 58%, 니켈 37%, 아연 5%의 비율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요즈음 ‘명태균 게이트’로 유명한 명태균 씨는 사람들이 자기보고 ‘미륵’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삼국사기》 권 50, 궁예 편에 나오는 기록에는 남북국시대(통일신라) 후기에 후고구려(뒤에 태봉)를 세운 궁예는 늘 자신을 현세의 미륵(彌勒)이라고 했다고 하지요. 그런 그는 자기 부인 강 씨가 왕이 옳지 못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하여 충언을 올렸지만, 관심법(觀心法, 스스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법)을 들먹이며 간통한다고 뒤집어씌워 죽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원래 미륵불(彌勒佛)이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미래에 사바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를 이릅니다. 고려말, 조선초에 향나무를 바닷가 개펄에 묻어두는 ‘매향의식(埋香儀式)’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때 자주 출몰하던 왜구의 침탈에 고통을 받던 백성들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미륵이 오시기를 간절히 비는 뜻을 담았습니다. 어느 시대건, 지배자와 억압받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 억압받는 사람들은 누군가 구해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억압받는 민중의 바람이 신앙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바로 미륵신앙(彌勒信仰)입니다. 미륵신앙은 서양 기독교의 구세주 신앙과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