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해가 한낮이 되려는데 빛이 갑자기 엷어져 / 처음에는 담장 밖에서 징소리 들리더니 / 잇달아 쿵쿵 북소리 사방으로 퍼지네 / 깜짝 놀라 문밖에 나가 해를 쳐다보니 / 어슴푸레 해 주변에 물체가 있는 듯 / 아이 불러 물동이에다 맑은 물 담게 하고 / 그 물동이 바닥으로 해를 살펴보니 / 해가 반쯤 이지러져 조각달과 같아 / 참담한 하늘 모습에 깊은 시름에 잠겼네” 위 글은 고려말의 문신 정추(鄭樞)가 쓴 《원재고圓齋槀)》에 나오는 시로 일식에 대해 읊은 것입니다. 천문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로는 해가림도 변고라 했고, 과학기구가 없던 때라 물동이에 물을 담아놓고 거기에 비치는 해를 관찰했습니다. 해가 반쯤 이지러져 조각달과 같았다는 것을 보아 부분일식이었던 듯합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일식을 음기가 성하여 일어나는 이변이라 생각하여 양에 속하는 악기인 징과 북을 쳐서 일식을 없애려 했습니다. 일식(日蝕) 곧 해가림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일식이 있으면 구식례를 했습니다. ‘구식례(救食禮)’는 일식이나 월식(月蝕)이 있을 때 이를 괴이한 변고라 하여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 월대(月臺) 곧 섬돌에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79년 전 오늘(7월 19일) 독립운동가 여운형 선생이 암살당했습니다. 몽양 여운형(1886~1947)은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광복 뒤에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한 분입니다. 선생은 1919년 도쿄를 방문해 일본 고위 관료들과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당당히 연설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아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하고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여 초기 혼란을 수습했던 분입니다. 그러던 선생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파 청년의 흉탄에 맞아 세상을 떴습니다. 선생의 죽음은 온 겨레에게 큰 슬픔을 안겼으며,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인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져 약 60만 명의 인파가 운집했을 정도였습니다. “조국의 품에 안겨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것, 내가 그게 바라는 소원이었다.”라고 했다는 선생은 당시 김구와 이승만을 앞서는 대단한 겨레의 지도자였습니다. 당시 미군정 관리였던 리처드 로빈슨은 “미 국무부는 여운형을 당시 광복 이후 조선에서 인기 있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4경(四更, 새벽 한 시에서 세 시 사이) 초에 임금이 면복(冕服)을 입고 걸어서 회맹단(會盟壇) 아래에 이르니, 왕세자가 먼저 나아가 맞고 승지(承旨)ㆍ사관(史官)이 좌우로 나뉘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손을 씻고 신위에 이르러 북향하여 네 번 절을 하고, 단(壇)에 올라 판위에 꿇어앉아 세 번 향(香)을 올린 다음 술을 올리고, 내려와 북향하여 꿇어앉았다. 우승지(右承旨)가 혈반(血盤, 회맹제 때 가축의 피를 받아두던 쟁반)을 받들어 바치니, 임금이 술을 마시고 훈신(勳臣)들이 차례로 피를 마셨다. 축문을 읽은 다음 임금이 네 번 절을 하고, 예가 끝나고 걸어서 돌아왔다.” 위는 《영조실록》 18권, 영조 4년(1728년) 7월 18일 기록으로 회맹제를 했다는 얘기입니다. ‘회맹제(會盟祭)’는 조선 시대에 임금이 공신들과 함께 천지신명에게 왕실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고 공신 사이 단합을 맹세하던 제사 의식입니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신하들을 공신으로 임명 뒤, 왕권의 안정과 지배층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거행되었습니다. 내용은 임금과 공신이 "서로 의리를 지키고 왕실에 충성을 다하겠다"라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평생을 토박이말 연구에 바치다 지난 2018년 세상을 뜬 고 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은 장마가 지나 볕만 쨍쨍 내리쬐는 더위를 ‘무더위’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라고 짚었습니다. “장마가 지나 습기가 없이 한창 더울 때는 ‘한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하거나 더욱 뜨거우면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린다’라고 해야 올바른 우리말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때가 마침 초복ㆍ중복ㆍ말복 사이라면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린다’라고 할 수 있지요. 사람들이 흔히 쓰는 ‘무더위’라는 말은 한마디로 ‘물+더위’ 곧 ‘물’과 ‘더위’가 함께 어우러졌다는 뜻으로 생긴 낱말입니다. ‘무더위’는 ‘물더위’에서 ‘ㄹ’이 빠져 ‘무더위’가 된 것으로 후텁지근한 느낌을 줍니다. 더워서 땀이 나기도 하지만 습기 때문에 축축하기도 하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장마철처럼 습기가 많아 후텁지근한 더위일 때 ‘무더위’라는 말을 써야 하는 것이지 강렬한 불볕더위를 무더위라 부르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뜻이지요. 여기서 더위를 나타내는 말들을 두 종류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장마철에 습도가 매우 높아, 찌는 듯 견디기 어려운 더위는 무더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왕비는 복도를 따라 도망쳤고, 그 뒤를 한 일본인이 쫓아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왕비를 바닥으로 밀어 넘어뜨리고, 그녀의 가슴으로 뛰어들어, 발로 세 번 짓밟아, 찔러서 죽였다.” 이는 동북아재단 김영수 연구위원이 쓴 《미텔의 시기(을미사변과 아관파천)》에 나오는 명성황후 시해에 관한 당시 외교문서를 확인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국모를 시해당해야 했습니다. 그때 주한일본공사 미우라는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의 주범이며, 대원군의 요청에 따라 일본군이 도와준 것이다. 조선은 임금이 무능하고 왕비가 폭정이 심해 백성들이 수탈을 당하고 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조선을 도와준 것이고, 명성황후의 죽음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이후 식민사관이 지배한 우리 역사는 명성황후에 대한 부정적인 말로 도배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연구들에 따르면 명성황후를 뒤덮은 부정적인 시각은 많은 부분 일본과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일본은 당시 조선을 점령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으로 보았던 명성황후 제거를 “여우사냥”이라 하여 일본 정권의 일로 추진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음양 산정도감(陰陽刪定都監)을 두었다. 영삼사사(領三司事) 권중화(權仲和)와 판삼사사 정도전,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성석린(成石璘)ㆍ삼사 우복야 남은(南誾)ㆍ정당 문학(政堂文學) 정총(鄭摠)ㆍ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하륜(河崙)ㆍ중추원 학사 이직(李稷)ㆍ대사헌 이근(李懃)ㆍ평원군(平原君) 이서(李舒)가 서운 관원과 함께 지리와 도참(圖讖)에 관한 여러 책을 모아서 참고하여 교정하게 하였다.” 이는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1394년) 7월 12일 기록으로 ‘음양 산정도감(陰陽刪定都監)’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음양산정도감(陰陽刪定都監)은 조선 건국 초기에 설치된 나라 임시기구(도감)입니다. 새로운 나라를 세운 태조 이성계가 서울을 옮기는 천도(遷都) 과정에서 풍수지리와 도참설의 기준을 정비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계룡산, 무악(현 신촌 일대), 한양 등 새 서울 후보지를 두고 신하들 사이에 이견과 예언(도참)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기구의 설치는 조선 왕조가 단순한 미신으로서가 아니라, 나라 통치 이념과 결부된 체계적인 학문으로서 풍수지리를 다루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주머니는 자질구레한 물건이나 돈 등을 넣고 입술에 주름을 잡아 졸라매어 허리에 차거나 손에 들고 다니는 장신구입니다. 비단 헝겊으로 만들어 수를 놓거나 금박을 박기도 하는데, 옛날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지녔습니다. 특히 한복에는 대한제국 말기에 서양에서 들어온 조끼를 빼고는 물건을 넣을 만한 호주머니가 없어 실용적인 면에서 더욱 필요하였지요. 그 주머니 가운데 아래는 둥글고 위는 모나는데, 들머리에 잔주름을 잡아 오므리는 주머니를 두루주머니라 합니다. 두루주머니 가운데서도 특히 오방색 곧 노랑, 파랑, 하양, 빨강, 검정의 5가지 빛깔을 써서 아름답게 만든 것이 오방낭자(五方囊子) 곧 오방 두루주머니입니다. 오방 두루주머니 앞면 가운데는 글자를 금박으로 놓거나 수를 놓았으며, 액을 면하고 한 해를 무사히 지내라는 뜻으로 정월 해일(亥日, 돼지날)에 아이들에게 주머니를 선물했지요. 여기서 오방색이란 음과 양의 기운이 생겨나 하늘과 땅이 되고 다시 음양의 두 기운이 목(木)ㆍ화(火)ㆍ토(土)ㆍ금(金)ㆍ수(水)의 오행을 생성하였다는 ‘음양오행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오방색은 나쁜 기운을 막고 무병장수를 비손해 돌이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열한째로 하지와 대서 사이에 든 소서(小暑)입니다. 하지 무렵까지 모내기를 끝낸 벼는 소서 때쯤이면 김매기가 한창이지요. “소서가 넘으면 새 각시도 모를 심는다.”, “7월의 늦은모는 행인도 달려들고, 지나는 원님도 말에서 내려 돕는다.”라는 속담이 전합니다. 소서가 되어도 모내기를 끝내지 못했다면 새색시건 원님이건 달려들어 도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요즈음은 농약을 치면서 농사를 지어 예전처럼 김매기, 피사리하는 모습은 보기 어렵지만, 여전히 예전 방식대로 농약 없이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허리가 휘고 땀범벅으로 온몸이 파김치가 되기도 합니다. 이때 솔개그늘은 농부들에게 참 고마운 존재이지요. 솔개그늘이란 날아가는 솔개가 드리운 그늘만큼 작은 그늘을 말합니다. 뙤약볕에서 논바닥을 헤매며 김을 매는 농부들에겐 비록 작은 솔개그늘이지만 여간 고마운 게 아닙니다. 거기에 실바람 한 오라기만 지나가도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힐 수 있지요.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소서, 남을 위한 솔개그늘이 되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이때는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철이므로 푸성귀(채소)나 과일들이 풍성해집니다. 특히 초여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예조에서 계하기를, "고려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에 이르되, ‘무릇 장마가 그치지 않으면, 서울의 여러 문(門)에 사흘 동안 날마다 영제(禜祭)를 올리되, 한 번 영제를 지내도 장마가 그치지 않으면, 이에 큰 산, 큰 강과 바다에 3일 동안 기도(祈禱)하며, 그래도 그치지 않으면, 사직(社稷)과 종묘(宗廟)에 기도하며, 지방 행정구역에서는 성문(城門)에 영제를 지내고, 경내(境內)의 산천에 기도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장마가 오랫동안 계속하여 곡식을 손상했으니, 도성의 성문과 지방 가운데 장맛비가 너무 많은 곳에 영제를 지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는 《세종실록》 12권, 세종 3년(1418년) 6월 14일 기록으로 장맛비가 오래 내리자, 영제(禜祭) 곧 기청제(祈晴祭)를 지내도록 했다는 내용입니다. 이제 우리나라 곳곳에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장마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해마다 찾아오는 거대한 자연재해였으며, 《조선왕조실록》 등의 문헌에는 비가 오랫동안 내리는 현상을 '장마'의 옛말인 ‘오란비’ 또는 한자어로 ‘임우(霖雨)’라고 기록했습니다. 당시에는 3일 이상 연속으로 비가 내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속은 좁아도 맛은 일품인 ‘밴댕이’ 우리는 흔히 속이 좁고 옹졸한 사람을 보고 “밴댕이 소갈머리(소갈딱지) 같다”라거나 “속이 밴댕이 콧구멍 같다”라며 혀를 차곤 합니다. 사소한 말에도 쉽게 토라지고, 너그럽지 못하며, 자기주장만 고집하는 사람을 이 작은 생선에 견주는 것입니다. 밴댕이는 다 자라도 몸길이가 10~15cm 정도밖에 안 되는 청어과의 작은 물고기로 다른 생선과 달리 내장이 매우 작아 없는 듯 보이기 때문에 ‘속이 좁다’라는 비아냥을 듣습니다. 게다가 성질이 급해 그물이나 낚시에 걸리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물 위로 올라오자마자 몸을 비틀고 파르르 떨다가 금방 죽어버리는 특성 때문에 옹졸함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성격에 대한 오명과 달리, 맛과 영양은 으뜸입니다. 특히 7월 중순의 산란기를 앞둔 5월부터 7월 초까지는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기름기가 돌아 고소함이 극에 달하는데, 그 맛이 고급 어종인 농어나 도미와 견줘도 손색이 없습니다. 또 영양상으로도 매우 훌륭한데 칼슘과 철분이 풍부하여 골다공증 예방에 효과적이며, 불포화지방산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성인병 예방과 피부 미용에도 탁월한 효능을 보입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