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임금은 백성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정초ㆍ변효문을 시켜 《농사직설》을 펴내고 농법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여전히 조선 백성은 먹을 것이 부족해 고통을 받았습니다. 물론 《농사직설》에도 직파법뿐만이 아니라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移秧法)이 있었지만 물이 모자라고 기술발전이 덜 되어 직파법에 의한 농사가 주였습니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점차 이앙법으로 농사짓는 법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농학자 신속(1600~1661)이 이앙법을 강조한 《농가집성(農家集成)》을 펴낸 뒤부터입니다. 신속이 1655년(효종 6) 공주목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농서(農書)를 쉽게 구할 수 없어 농민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권농문(勸農文)》, 《금양잡록(衿陽雜錄)》, 《사시찬요(四時纂要)》 등을 참고하여 이 책을 썼는데 효종이 이 책을 보고 호피를 내려 칭찬했습니다.
직파법에 견주어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은 노동력이 적게 들고, 보리를 심어 수확한 뒤 모내기를 할 수 있어서 한 해에 두 번 농사를 짓는 이모작이 가능하다는 큰 장점이 있지요. 그래서 《농가집성》은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17세기 농업기술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신속은 1660년(현종 2)에는 흉년이 들었을 때의 대비법을 적은 《구황촬요(救荒撮要)》도 썼는데 양반이면서도 백성의 아픔을 생각하는 관리요 학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