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레빗=김호심 기자] 한 때 고고 춤이 유행하던 때에는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 부르는 것도 유행이어서 친구들과 놀러 가거나 등산이라도 갈 때면 통기타나 야전(야외전축, 휴대용)은 빠지지 않는 필수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 흔히 '야전'이라고 줄여 불렀던 '야외전축', 70년대는 이 야전에 속칭 '빽판'이라 불렀던 음반을 걸어놀고 고고춤을 추는 것이 유행이었다.
야전에 '빽판(해적판)'을 걸어놓고 춤추는 것이 유행이었던 시절, 이 야외전축의 턴테이블에서는 한창 젊은이들에게 유행하던 미국 밴드 C.C.R의 Hey Tonight, Molina 등을 연방 돌려 대는 시기였다.
60년대 트위스트가 젊은이들 음악 문화라고 이야기한다면 70년대는 바로 고고가 유행하던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국내 고고의 대중적인 유행에 불을 댕긴 것 중 하나는 바로 야전이 아니었을까?
이 야외전축은 노트북 컴퓨터처럼 가방 모양을 하여 건전지로 작동하는 포터블(휴대용)로 가전제품으로는 트랜지스터 라디오(1955년 8월17일 생산)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꿈같은' 상품이었다.
크기는 보통 LP음반보다 조금 긴 장방형에다가 높이는 10Cm정도였다. Mono인 자체스피커 하나와 회전조절 스위치(33/45)하나, 볼륨 스위치만 있었다. 좀 넉넉한 집안 학생들은 따로 스피커를 구해 연결하여 사용했지만 이도 역시 모노였다. 전원은 실내에선 AC 110V로 쓰고 야외에선 DC 9V를 사용했는데, 야외에 가지고 가려면 DC 9V 터리 값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같이 사용할(?) 친구들끼리 갹출해서 배터리 값을 마련하곤 했다.
▲ 70년대 당시 음반계를 휩쓸었던 미국 밴드 C.C.R의 음반 표지 |
고고춤
검정 교복으로 대표되는 그 시절 학교에서 소풍이라도 가는 날은 야전에 '빽판'을 걸어놓고 신나게 춤을 추었다. 평소 학교에서 샌님으로만 불리던 공부벌레들도 그날만큼은 더 이상 약골샌님이 아니었다.
지직거리는 잡음이 적당히 섞인 레코드판 소리가 들리는 야전 앞에서 교모의 윗부분 한가운데를 일부러 찢은 뒤 다시 쓰는 파격미를 보이며 즐겁게 춤을 추었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인 진급과 더불어 야전시대의 호기심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대학생들 사이에는 '고고 미팅'이란 것이 있었다. '고고 미팅'이란 주로 낮 시간에 적당한 다방을 빌려서 단체로 미팅을 하는 것이었는데, 대개는 학과 대 학과 단위로 하였다. 이 '고고 미팅'에서는 '고고춤'을 추는 빠른 노래가 서너 곡 나오고 나면 부르스 곡이 한 곡씩 나왔다. 그러면 다 같이 어설프게 부르스를 추곤 했었다.
▲ 70년대에는 고고춤이 대유행했는데 당시 음반들도 고고춤과 관련된 것들이 대세였다. |
야전(야외전축) 시대의 주연 배우들
야외전축의 출현과 더불어 새로운 10대들의 댄스 선풍이 소용돌이 쳐 일어났던 시대에도 주역은 있었다. 그 주연 배우는 무엇보다도 미국 밴드 C.C.R이었다. 우리에겐 C.C.R 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그룹의 원래 이름은 Creedence Clearwater Revival이다.
1970년 4인조 Country Rock Band가 오랜 세월 3류 그룹의 티를 벗어나고 일류 그룹으로 떠오르며, 우리나라에서도 당시에 활동하던 가수 중 그들의 노래 한두 곡쯤 불러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이다.
그 예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영남도 'Proud Mary'를 '물레방아 인생'이란 제목으로 엄청 불러댔다. 당시 유행하던 휴대용 전축(야전)을 이용하여 야외에서 즐길 때 가장 많이 애용된 노래가 C.C.R.의 것들이었다.
또한 콕 쏘는 듯한 드럼 소리와 함께 시작 되는 '아찔하다'는 뜻의 제목을 가진 'Dizzy'는 미국 죠지아 출신의 록큰롤 가수 Tommy Roe의 경쾌하고 달콤한 히트곡으로 야전 시대에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10대의 청소년들을 겨냥하여 '바블껌'으로 알려지게 된 음악의 첫 표본을 제시했던 밴드가 '아치스'다 . 이 그룹은 원래 스튜디오 뮤지션들이었으며 곡을 만들 때마다 멤버가 바뀌었는데 싱어인 '론 랜트'만 모든 곡에 참여했다 . 그들의 히트곡 'Sugar Sugar'는 69년에 발표되어 야전시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히트곡이 되었다.
고고 춤의 인기는 곧 많은 고고 음악들의 등장으로 연결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곡으로는 스펜서 데이비스 그룹 (Spencer Davids Group)의 'Keep On Running', Rare Earth의 ' Hey Big Brother', Steam의 'Na Na Hey Hey Kiss Him Goodbye', Tom Jones의 'She's A Lady', Bay City Rollers의 'Saturday Night'등 그밖에도 수없이 많은 노래들이 등장하고 사라졌다.
당시 영화계에도 반짝이는 스타들이 있었다. 박노식, 장동휘, 숀 코널리, 찰슨 브론슨, 이소룡 같은 배우들이 영화 포스터를 장식했다.
대중가요계에서는 여성가수 김추자가 그 시대를 독주하고 있었다. 터질 듯한 엉덩이와 허벅지를 감싸다가 발목 밑에서 갑자기 풀어지는 나팔바지. 비음을 섞은 음색에 시옷 발음을 쌍시옷으로, '자' 발음을 '좌'로 하는 김추자의 노래는 당시 젊은이들에게는 크게 어필했었다.
아울러 남진, 나훈아가 이미자, 최희준의 뒤를 이어 세대교체를 이룩했으며 은희가 '꽃반지 끼고'를 불러 통기타 음악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기가 더 뜨거워 졌다 . 조미미의 노래도 많이 불려졌고, 맹인 가수 이용복은 그가 어둠 속에서 만나본 빛들을 눈뜬 사람들을 위해 노래로 보여 주고 있었다.
영화계는 윤정희가 돋보였고 DJ 이종환과 최동욱이 각각 MBC의 '별이 빛나는 밤'과 TBC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로 각각 젊은이들의 흥분을 요리했고 감상적인 감정을 지휘했다 .
70년대의 유행
70년대의 유행으로 미니의 열풍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미디와 맥시가 함께했다. 1971년 봄부터는 핫팬츠가 유행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1974년경부터는 팡탈롱(pantalon : 나팔바지, 골반바지로 오용되고 있음 ; bell bottom pants)이 등장하여 유행했는데 바지통 하나로 스커트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것이 특징이었다.
당시 멋쟁이들은 미니스커트나 핫팬츠에 맥시 코트를 입는 것이 유행이었으며 선글라스와 머리 수건 , 무릎까지 올라오는 꼭 끼는 부츠나 통굽 구두도 빠트릴 수 없는 인기품목이었다.
한편 청바지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애용되면서 청춘남녀의 마치 유니폼처럼 자리 잡았다. 고고춤과 함께 맘보바지도 인기를 끌었으며, 월남전 파병 이후에는 퀼팅한 롱스커트인 일명 '월남치마'가 유행했다 . 또한 남성들 사이에 장발이 늘어나 미니스커트와 함께 단속의 대상이 되었다.
70년대 골목 풍경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었기에 밤 11시가 넘으면 모두들 발걸음이 빨라졌다. 길에서는 시내버스 막차를 타려는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뤘다. 어쩌다가 통금시간을 어기면 경찰이나 방범대원에게 붙잡혀 경찰서 유치장에서 밤을 새워야 했다. 술집에서 자정을 넘기면 통행금지가 풀릴 때까지 술을 마시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통금 속에서도 술집은 성업이었다.
당시 학생들과 청년들은 '올나이트했다.'는 말을 하곤 했다 . 밤새 고고춤을 추며 술을 마시는 젊은이들을 '고고족'이라고 불렀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도 1년에 단 두 번 통행금지가 풀리는 날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와 섣달 그믐날 곧 12월31일이었다. 사람들은 이때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는데, 이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단순한 성탄절이 아니라 '해방의 날'이었다 .
특히 서울 명동과 충무로, 종로 일대는 말 그대로 '해방구'였는데 거리는 하룻밤 해방감을 만끽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많은 청춘 남녀들이 밤새도록 거리를 배회하거나 고고장에서 몸을 흔들어댔다. 따라서 '고고파티'와 '그룹미팅'도 성행했다. 이날 젊은이들의 실수 아니 하룻밤 풋사랑으로 태어난 아기들을 '크리스마스 베이비'라고 불렀다. 이런 풍속 속에서 당시 크리스마스를 '크레이지마스'라고도 했다 .
▲ 70년대 장발단속은 젊은이들의 숨통을 조였지만, 이 속에서 청바지와 고고춤은 하나의 탈출구였다. 사진은 경향신문 1976년 5월 14일 치 장발단속 기사
70년대 젊은이들에게 분명히 기성세대와는 다른 것들로 넘쳐났는데 '청바지'든, 장발이든, 심지어 '고고춤'에 놀아나는 것들은 당시 젊은이들의 특권이었다. 길에서 경찰은 장발 단속을 했고, 스커트 길이를 쟀지만 퇴폐적으로 보이는 그들 풍속은 당시 숨 막히는 군사문화를 비켜나가는 그들만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 김호심 : 대성음반 문예부에서 근무했으며 가요114 PD로 활동하며 추억과 함께하는 가요와 팝송을 많이 소개하였다. 현재는 인간문화재 이생강 선생의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으며 국악음반을 기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