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유광남 작가] 김충선의 담담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대하며 일패공주는 지난날의 그의 내력을 상기하였다. 김충선, 일본 이름은 사야가(沙也可).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2군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의 장수로 바다를 건너왔다.
- 임진년 4월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지금 제가 귀화 하고자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요,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중략) 단지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
사야가 김충선은 부하 장병 3천을 이끌고 조선에 투항하였다. 실로 천지가 개벽할 만한 상황이었다.
‘누가 그의 항복을 믿을 수 있겠는가?’
임진년 초의 전세는 누가 보더라도 조선의 일방적 패배였다. 일본군의 맹공에 속수무책인 조선왕조는 몽진을 감행 하였고 불과 개전 20 여 일만에 한양이 점령당하는 수모를 당하였다. 임금 선조는 조선을 버리고 명국으로 망명을 시도하려고까지 한 절박한 지경이었다. 그런데, 왜 사야가 김충선은 그런 막대한 힘을 소유하고 있는 일본을 배신하고 조선으로 투항하여 조선을 위한 장수가 되어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치른 것일까?
‘난 아직도 그 부분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정확히 들어본 적이 없다.’
일패공주는 오랫동안 그에 대한 탐문을 하였고, 그 누구보다도 김충선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항왜 장수가 된 김충선의 진의를 꿰뚫고 있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실로 그녀의 가슴속에 오래된 의문이었다.
‘언제고 난 기필코 그의 입을 통하여 스스로 고백을 듣고 말 것이다.’
일패공주는 인내심이 강하고 지모가 출중한 여진의 공주였다. 그녀의 직관력이나 통찰력은 웬만한 학자나 정치가들을 능가할 정도로 예리하였다. 어쩌면 누르하치의 피를 가장 많이 닮은 공주인지도 몰랐다.
“물론 난 당신이 일본의 타이부교(太奉行) 출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 이예요.”
타이부교는 일종의 간자(間者) 양성기관으로 침투(浸透), 공작(工作), 정보(情報), 교란(攪亂), 요인암살(要人暗殺) 등 각종 교육을 실시하던 도요토미의 선봉 전술기관 중의 하나였다. 일본은 명나라와 조선을 정벌하기 전에 이 기관의 간자들을 대륙으로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 하였고, 사야가 역시 간자의 신분으로 일찍이 조선에 침투한 전력이 있었던 것이다.
“타이부교 출신은 생존의 조건에 가장 능수능란한 훈련을 받고 성장하였소. 난 어떤 종류의 병기도 가능하오.”
일패공주의 정면을 바라보면서 김충선은 다시 한 번 장담하였다. 그때, 바로 등 뒤에서 아주 가느다란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대인가? 나의 강궁을 요구한 자가?”
사야가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당당한 체격에 금의를 착용하고 있었으나 눈은 매우 작아서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식별이 되지 않았다. 목소리도 체격에는 어울릴지 않게 가늘었다. 김충선은 즉각 무릎을 꿇었다.
“칸을 뵈옵니다. 소신은 조선에서 온 장수 김충선이라 하옵니다.”
“오늘 좋은 구경을 시켜 준다고? 기대가 크다.”
훗날 후금의 초대황제이며 청나라의 건국 태조가 되는 인물이 김충선에게 강궁을 내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