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엄마는 날마다 흥에 겨워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면서 일하려 다니셨단다. 엄마는 사범학교 교직원 식당일을 혼자 하시었지. 집에는 시계도 없었기에 새벽이면 하늘의 칠성별을 시계로 삼아 아침준비를 대강해 놓으신 뒤 바삐바삐 일하려 가시었단다. 우리집은 공원가에 있었는데 사범학교는 지금의 연변2중 동쪽에 자리잡고 있었단다. 연변병원을 지나 동쪽으로 가는 길부턴 인가가 없는 채소밭이었고 도중 길옆에는 비석 하나가 있었는데 거기에선 간혹 강도가 나타나서 행인들에게 늘 불안감을 주었다한다. 그러나 엄마는 편안히 그 식당 휴식실에서 쉴 수 없었단다. 집에는 둘째오빠와 내가 학교에 다니므로 엄마가 와서 돌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단다. 집의 밥은 비록 대부분 내가 했어야 했었지만. 그러나 엄마의 가르침이 없고 나를 깨워놓지 않으면 오빠와 나는 밥도 못해 먹었단다. 일요일이면 엄마는 또 다른 삯일을 하시면서 돈을 벌었단다. 그러나 엄마는 늘 웃음띤 얼굴로 별을 이고 다니시었단다. 이렇게 비가오고 눈이 오면서 세월이 흘러 곡식들이 우썩우썩 자라는 푸르름의 칠월말이었지. 장춘으로부터 편지 한통 날아왔단다. 지금처럼 전화가 있고 휴대폰이 있으면야 얼마나 좋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훤칠한 체격은 아니었어도 늘 깨끗하게 곱게 머리를 얹고 거짓 없는 맑은 모습, 인자하시면서도 강인한 성격을 가지신 우리 엄마에겐 그 어떤 곤란도 전승(싸워서 이김) 못할 것이란 없었단다. 농촌에서 밭일을 하곤 돌아와선 또 가마스를 짜서 애들을 공부시키던 엄마는 끝내 자식들을 위하여 연길시로 혼자 이사하려고 하셨단다. 그때 큰오빠는 장춘에서 둘째오빠는 룡정에서 나는 그냥 농촌의 인민공사식당에서 밥을 먹곤 식구가 많던 둘째 삼촌집에 있게 하였단다. 엄마는 돈을 벌기위해 그리고 둘째오빠와 나의 학습을 위하여 연길에 집을 잡고 일하여 돈을 직접 벌어 우리를 공부시키려는 타산(계산)이었단다. 도문에 있던 큰 언니는 “아는 사람 한사람도 없이 어떻게 시내에 가서 살겠냐?”며 무조건 엄마를 자기집에 모셔 갔단다. 엄마가 할 수없이 농촌을 떠나 큰딸집에 갔지만 나와 둘째오빠의 공부를 위하여 언니의 권고도 마다하고 끝내 연길에 이사했단다. 처음엔 지금의 공신에다 집을 잡았다가 공신 역시 농촌구역(그때는 농촌이었다)이여서 애들이 보는 것도 또 학교도 멀기에 다시 연길시 3중 부근에 집을 마련하였단다. 집이라야 12㎡(약 3.6평) 밖에 안 되는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엄마는 자애로운 분이었다. 그리고 생활의 강자였단다. 일은 힘들고 생활은 곤란했어도 말없이 이겨냈었고 철모르는 우리를 욕하거나 때리는 법 없었단다. 그러나 나도 커가면서 종종 엄마가 흘리는 눈물을 보았었다. 엄마의 눈물은 설음의 눈물, 기쁨의 눈물, 감사하여 흘린 눈물이었다. 내가 6~7살 되던 해의 싸늘한 늦가을의 어느 날이었단다. 맑은 날씨지만 나뭇잎이 우수수 바람에 떨어져가는 늦가을의 싸늘한 날이었다. 오빠네들은 학교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엄마는 나를 보고 “오늘 시간이 있을 때 쉬바자(수숫대울타리)를 세워야겠다. 너라도 날 도와줘야겠구나.고 하셨다. 그 시절엔 겨울바람을 막기 위해 집의 3면에 수수짚으로 바자를 세웠단다. 엄마는 땅을 낮게 파고 거기에 수수대들을 둥그렇게 세웠단다. 가을바람에 세워놓은 수수대들이 떨더구나! 엄마는 바삐 띠를 대면서 나를 불렀단다. 엄마는 밖에서 나는 안에서 엄마가 밀어주는 수수끈을 되받아서 다시 수수대 사이로 엄마에게 넘겨줘야하는데 어린 나는 잘 안되더구나. 추워서 몸은 떨렸고 언손은 말을 듣지 않아 그만 세워놓은 바자를 나는 몽땅 넘어 뜨렸단다. 엄마는 어이없어 하시면서도 또 다시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전쟁”이라면 아마 “때리고”, “부수고”, “마스고(짓찧어서 부스러뜨리고)”, “폭격하고”, “총과 대포 비행기 출동”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힘으로도”, “총으로도” 하지 않는 전쟁이 있었는데 바로 벌레들과의 전쟁이었단다. “벌레”라는 말만 들어도 나는 무섭고 징그럽고 더러워 메스껍고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단다. 아마도 1952년이던 것 같다. 벌레와의 전쟁을 해야만 하는 인간들은 아직 그 어떤 살상화학약품도 발명해 내지 못하였단다. 아마도 해방된 지 오래지 않아서 공업이 발달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 같으면야 비행기로 쏵 분무하면 될 것을……. 도처에 파리떼가 욱실거렸고 길가의 나무에, 곡식밭에 온통 이름모를 벌레가 욱실거려 방금 자라나고 있는 곡식밭을 요정낼 잡도리를 하는가 싶더구나. 벌레들은 곡식대에 매달려 곡식의 잎사귀로부터 속대까지 먹고 있어 그대로 방치해둔다면 곡식밭은 그야말로 밀대를 놓을 것이고(뻔뻔하게 싹 없앨 것이고)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눈 뻔히 뜨고 있게 될 판이었단다. 탄알도 쓸데 없구, 힘도 쓸데없었으나 전쟁은 반드시 해야만 했었단다. 하여 전민이 동원되어 밟아 죽이고 쓸어서 태워 죽이는 방법이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해도 웃고 달도 웃는 아름다운 이 세상에서 나는 오늘도 파아란 하늘을 쳐다보며 흥얼흥얼 노래하고 있는데 소학교에 다니는 손녀가 곱디 고운 필통하나를 들고 불쑥 나타났다. 아롱다롱한 필통은 나를 보고 방긋이 웃었다. “곱구나!” 내 눈길이 자꾸 필통으로만 갔다. 이 나이에도 볼수록 갖고 싶은 충돌을 느낌은 왜서일까? “엄마가 사 주었어요.” 손녀의 말이다. “엄마!” 엄마라는 손녀의 말에 왜서인지 나도 마치 어린애인양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고 서서히 내 눈앞에 내가 여나문살도 안될 때의 단발머리 소녀가 나타났다. “엄마, 나 필통사주!” 엄마는 조용히 날 달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일찍 내가 돐도 채 되기 전에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보내시고 우리 네 남매를 키우느라 아글타글(무엇을 이루려고 몹시 애쓰거나 기를 쓰고 달라붙는 모양) 눈물겨운 나날을 보내시었단다. 하기에 나는 5학년 될 때까지 그렇게 갖고 싶던 필통 하나도 없이 늘 연필을 책장 사이에 끼워 책보에 싸서 허리에 띠고 뛰어다녔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면 옆의 애가 필통을 꺼내 척 열고 연필을 꺼내는 모습 그렇게도 황홀하게 보였고 심지어 밖에서 달음질할 때 책보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우리집 책상 서랍을 열면 작은 함 하나가 있는데 그 함 안에는 크고 작은 갖가지 열쇠가 이쁜 고락지*에 매달려 있는 것이 십여 개도 남아 된다. 집 열쇠, 조카네집 열쇠, 친구집 열쇠, 딸집 열쇠, 창고의 이 상자 저 상자 열쇠, 트렁크 열쇠, 서랍 열쇠, 손녀일기장 열쇠, 또 트렁크 비밀번호…… 침실열쇠, 자전거 열쇠, 차열쇠, 또 거기에 마음의 열쇠까지…… 일기장하나를 펼치려 해도 집열쇠, 책상열쇠, 일기장열쇠를 써야하니 그야말로 열쇠 안에 열쇠, 또 그 열쇠 안의 열쇠를 열어야 한다. 사람들의 심리란 참 이상도 하다. 그 자그마한 자물쇠 하나에 온집 재산을 싹 맡기고 또 자기만의 각종 비밀도 숨기기도 한다. 하기야 열쇠와 자물쇠의 임무가 중요한가 보다. 그러나 먼 옛날 엄마네 시대엔 온 하루 밭에 나가 일하면서 집은 비웠건만 열쇠 잠그는 법이 없었단다. 돈이 없어서 열쇠를 살돈이 없어서였던지, 아니면 도적놈 가져갈 물건이 없어서였던지…… 엄마는 일밭으로 가실 때면 꼭 “열쇠”를 잠그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열쇠”란 문틀에 못 하나를 박고 손잡이에 끈을 매여 못과 손잡이를 끈으로 동여 놓는 것이었단다. 혹은 빗장으로 혹은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엄마시절, 우리집에 문 열고 들어서면 부엌으로부터 온돌위의 공상(팔걸이와 등받이가 없는 걸상)에까지 줄느런히 장독, 간장독, 물독, 쌀독……들이 있었는데 창고가 따로 없던 자그마한 집이었건만 한꺼번에 엄마의 깨끗함과 알뜰함이 한눈에 안겨 왔었다. “와~ 이 짐독(큰 단지)은 곱기두 하오? 반질반질하네……” 지금처럼 오지독이면야 얼마나 좋으련만, 그때엔 전부 토기독들이었단다. 마을의 엄마들은 만져도 보고 독을 열어도 보시더란다. “와~ 입쌀(하얀쌀)? 이렇게 많이?”모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엄마를 쳐다보시더란다. 바로 이 제일 고운 짐독은 아무도 모르는 엄마의 “절약독”이었단다. 이 독에는 늘 보기 좋게 입쌀이 넉넉히 들어 있었단다. 엄마는 우리에게 “모주석(모택동 주석)께선 랑비는 최대의 수치라고 하셨단다. 올해 풍년이지, 계속 풍년일지 알 수 없지 않니? 흉년이 들면 바가지 들고 어디 가서 빌어먹겠니? 랑비는 말아야한다.”고 하셨단다. 하기에 엄마는 밥 할 때마다 한줌씩 꺼내어 절약독에 놓고 이삭 주은 쌀도 가끔씩은 절약독에 넣곤 마음대로 꺼내지 않으셨다고 하는구나! 이것은 점차 엄마의 습관으로 되였단다. 하기에 이 고운 독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한가위도 오래지 않은 따뜻한 가을의 어느 날이었단다. 나는 아버지산소에 올릴 메밥을 담을 그릇으로 덥개가 있는 자그마한 불수강식기(스테인리스 스틸 식기)를 하나 사들고 집에 왔었다. 그 식기를 한참 보시던 엄마는 불쑥 “너 놋그릇 기억나니?” 하여 내가 “예, 놋이면 동으로 만든 구리그릇인데 옛날 엄마가 그 그릇에 밥이랑 떠주었잖아요?” “너 어릴 때 일인데 그래도 기억있구나!”하셨다. ‘ 그때엔 전부 구리(놋)로 만든 밥식기, 놋대접, 놋소래, 놋다라 같은 것들을 쓰셨다 한다. 우리집은 큰집가문으로 이런 그릇들이 많아 살강엔 보기 좋게 올망졸망 앉아있었다는구나! 이런 놋그릇들은 벼짚으로 닦아야 윤기가 돌기에 그릇을 보고도 그 집의 엄마들의 깨끗하고 알뜰함을 갸늠했다는구나! * 놋소래 : 놋으로 만든 소래기, ‘소래기’는 굽 없는 접시 모양의 넓은 질그릇 우리 조선민족도 여느 민족처럼 아주 깨끗하고 례절바른 민족이 아니니? 윤기 도는 놋식기에 하얀이밥(새하얀 쌀밥)을 담고 덮개로 꼭 덮고 올망졸망한 놋공기에 김치며 젖갈들을 담고 놋대접에 국을 떠서 놋숫가락 놋젖가락을 놓아 동그란 밥상에 받쳐 흰앞치마 두른 며늘아기가 손수 시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조선족하면 고추장은 빠질 수 없는 음식 가운데 하나가 아니니? 하기에 파, 마늘, 고추는 우리의 식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저항력을 키워주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어릴 때 체질이 약했던 나는 냄새가 나는 마을, 파, 당근, 썅채* 등은 무조건 싫어했고 고추장은 맵다고 그 언저리에도 안가는 나쁜 습관이 있었단다. 엄마가 아무리 말해도 이 습관만은 고칠 수 없었단다. 엄마는 알뜰하기로 마을에서 소문 높았고 음식솜씨도 누구한테 짝지지* 않은 분이었단다. 늘 음식을 만들 때면 하얀 앞치마를 꼭 두르고 머릿수건을 쳤는데 고추장을 만들 때에도 잘 말린 고추를 씨를 털어내곤 잘 찧었단다. 그리고 눅게 한 하얀 찰밥과 물엿을 넣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게 빨갛고 달콤한 고추장이었지 이것을 작은 항아리에 꼭 넣고 조금씩 꺼내어 먹군하였단다. 엄마표 고추장은 색깔도 맛도 좋아서 동네 엄마들이 늘 칭찬을 하셨고 종지를 가지고와선 좀씩 빌어가면서 “이 고추장 하나면 다른 반찬 필요 없겠는데. 이집 저 새끼는 안 먹는다면서요? 저 새끼 몫을 우리 다 먹자구……”하면서 나를 놀려도 주었단다. 엄마는 봄이면 달래, 세투리*, 민들레, 반짜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학교”하면 누구든지 백양나무 우거진 넓다란 운동장, 꽃들이 만발한 아름다운 화단, 글소리 랑랑히 들려오는 아담한 교실, 뽈소리, 노래소리,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들려오는 유리창문의 큰집을 눈앞에 그려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우리 엄마들은 학교를 얼마나 부러워했을까? 그러던 1954~1955년 가을이라고 기억되는구나! 하루는 엄마가 나보고 “정부에선 문맹퇴치를 하라는구나. 우리를 눈뜨게 해준단다.” 하시면서 환한 웃음을 피우시더구나. 나는 어리둥절하여 “엄마, 문맹퇴치가 먼데?” “우리를 글을 배우라는구나. 눈을 뜨라구…” “머요? 그럼 엄마두 나와 같이 학교에 붙어요?” “글쎄, 나두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기회에 배워야겠는데… 후유…” 며칠 후였단다. 엄마는 웃으면서 “됐다. 나도 글을 배우게 되였단다. 이젠 우리집이 ‘엄마의 학교’로 되는 거야.” 나는 무슨 말인지 몰라 말똥말똥 엄마만 쳐다보는데 엄마는 “내가 집일도 해야겠기에 우리집을 내놓아 엄마네 학교로 하자구 하였단다.” 하시더구나. 이튿날 엄마는 산에 가서 보얀 흙을 파다가 집벽을 깨끗이 매질하고 집 깔개도 말끔히 닦더구나. 또 그 이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