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무엇을 하든 간에 / 때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겠거늘 / 밤에는 물시계(자격루)가 있지만 / 낮에는 알 길이 없더니 / 구리를 부어 기구를 만드니 / 형체는 가마솥과 같고 / 반경에 둥근 틀을 설치하여 / 남과 북이 마주하게 하였다 / (가운데 줄임) / 동물신의 몸을 그리기는 / 글자 모르는 백성 때문이요 / 각과 분이 또렷한 것은 / 햇볕이 통하기 때문이요 / 길가에 두는 것은 / 구경꾼이 모이는 때문이니 / 이제 비로소 / 백성이 일을 시작할 것을 알게 되리라” 이는 세종 때 오목해시계를 만들고 기록했던 김돈이 오목해시계를 만든 의의를 살피고 그 기쁨을 노래한 글입니다. 그 당시 시간을 측정하고 알리는 것은 임금 고유 권한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세종은 오목해시계를 만들어 누구나 볼 수 있게 사람들이 많이 다니던 혜정교(현재 교보문고와 광화문우체국 사이에 있던 다리) 길가에 세우고 시간을 백성들이 스스로 알 수 있게끔 나눠 주었지요. 그것도 한자 모르는 백성과 어린아이까지 배려한 것으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9년 전에 글자를 모르는 백성을 위해 만든 훈민정음에 버금가는 값어치를 지닌 시계입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집으로 가는 길 - 김정원 길고 고단한 하루 땅거미가 기어올 때 쟁기질 끝내고 뚜벅뚜벅 집으로 돌아가는 길 땀에 젖은 소를 마을 우물로 데리고 가 찬물로 등물을 해주며 엄마는 애틋하게 말합니다 "여보게, 애썼네, 고마우이." 그러면 말 못 하는 소가 엄마 치마에 머리를 살며시 대고 아기바람과 악수하는 무화과 나뭇잎처럼 가볍게 귀를 흔듭니다 우리네 어렸을 적에는 여름날 흔히 “등물”이란 걸 했다. 아버지가 논에서 땀 흘리며 일하고 돌아오시면 어머니는 우물가에서 시원하게 등물을 해주셨었다. 등물은 그렇게 끈끈한 가족애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김정원 시인은 엄마가 소에게 "여보게, 애썼네, 고마우이." 하면서 등물을 해주셨다고 한다. 그러면 소는 가볍게 귀를 흔들며 응답을 했다나? 예전 우리 겨레는 사람이 죽어 장사를 지낼 때 부르던 상엿소리가 있었다. “입춘날 절기 좋은 철에 / 헐벗은 이 옷을 주어 구난공덕(救難功德) 하였는가 / 깊은 물에 다리 놓아 월천공덕(越川功德) 하였는가 / 병든 사람 약을 주어 활인공덕(活人功德) 하였는가” 이웃을 위해 좋은 일을 했는지에 따라 죽어 염라대왕에게 심판받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호랑이는 한반도를 대표하는 영물이자 수호신입니다. 사람들은 백수(百獸)의 왕인 호랑이를 두려워함과 동시에 신성시하고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호랑이 그림에 귀신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 믿고 새해가 되면 대문과 집안 곳곳에 호랑이 그림 곧 문배도(門排圖)를 붙였지요. 또 호랑이와 까치가 함께 등장하는 호작도(虎鵲圖)는 민화의 단골 소재였고, 호랑이는 무(武)를 상징한다고 생각하여 조선시대 무관(武官)의 관복에는 호랑이를 흉배(胸背)로 붙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박물관에는 호랑이 몸체를 닮은 그릇도 보입니다. 먼저 1979년 3월 부여 군수리에서 출토된 그릇은 동물이 앉아있는 모습으로 얼굴 부위에는 둥그렇게 구멍이 뚫려 있지요. 이 그릇은 ‘호자(虎子)’라고 하여 남성용 소변기라고 합니다. 중국 역사서를 보면 옛날에 기린왕이라는 산신이 호랑이의 입을 벌리게 하고, 거기에 오줌을 누었다고 전하며, 새끼호랑이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호자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호자는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높이가 25.7cm, 주둥이의 지름은 6.6cm입니다. 그런가 하면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개성에서 출토되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흥례문을 들어서면 작은 개울 곧 금천(禁川)이 나옵니다. 그러면 작은 다리 영제교(永濟橋)를 건너야 하는데 이 영제교 좌우로 얼핏 보면 호랑이 같기도 하고 해태 같기도 한 동물석상이 양옆으로 두 마리씩 마주 보면서 엎드려 있습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비늘과 갈기가 꿈틀거리는 듯이 완연하게 잘 조각되어 있다"라고 묘사된 이 석수는 무엇일까요? 매섭게 바닥을 노려보고 있는 듯하지만,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한 이 짐승들은 혹시라도 물길을 타고 들어올지 모르는 사악한 것들을 물리쳐 궁궐과 임금을 지키는 임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용머리, 말의 몸, 기린 다리, 사자를 닮은 회백색의 털을 가진 이 동물을 유본예의 《한경지략》에 실린 “경복궁 유관기”에는 “천록(天祿)”이라고 말하고 있지요. 그런데 천록은 물론 해태 그리고 근정전 지붕 위의 잡상 따위는 원래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지만, 중국 황실의 거대하고 위압적인 석상들과 달리 우리나라의 석상들은 해학적이고 친근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영제교 북서쪽에 있는 천록은 개구쟁이처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業文猶未識天機(업문유미식천기)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하였더니 小學書中悟昨非(소학서중오작비) 《소학》을 읽고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도다 從此盡心供子職(종차진심공자직) 이제부터 마음을 다하여 자식의 직분을 하려 하노니 區區何用羨輕肥(구구하용선경비) 구차스럽게 어찌 잘살기를 부러워하리오? 이는 조선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김굉필(金宏弼)의 <독소학(讀小學)> 곧 《소학(小學)》을 읽고 쓴 한시입니다. 그는 공부해도 아직 천기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는데, 《소학(小學)》을 읽고 나서야 어제의 잘못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다하여 자식의 직분을 다하고자 하니 구차스럽게 잘사는 삶을 부러워하지는 않겠다고 노래합니다. 그는 《소학》에 심취해 스스로 ‘소학동자’라 일컬었으며, 주위에선 그를 《소학》의 화신이라고 했습니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은 자신의 책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서 위 시에 대해, “김굉필은 나와 동갑인데 생일이 나보다 뒤이다. 현풍에 살았는데, 그의 독특한 행실은 비할 데가 없어서 평상시에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있었으며, 집 밖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용은 여러 문화에서 발견되는데 우리에겐 친숙하거나 존경스러운 초월자로서 나타납니다. 하지만 어떤 민족에게선 혐오와 공포의 상징인 악마로서 나타나기도 하지요. 그런가 하면 거북은 상상의 동물인 용과 달리 세상에 실재하는 동물입니다. 그 거북은 장수를 상징하여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 꼽히지요. 그런데 그 용과 거북을 합쳐놓은 상상의 동물은 무엇일까요?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보물 제636호 “서수모양 주전자”가 있습니다. 바로 몸통은 거북, 머리와 꼬리는 용의 모양을 한 주전자입니다. 높이 14cm, 길이 13.5㎝, 밑지름 5.5㎝인 이 주전자는 경주시 미추왕릉지구에서 출토된 것이지요. 흡사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四神圖)에 나오는 현무(玄武)를 연상시키고 있어 무덤을 지키기 위한 특별한 뜻을 담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무(玄武)는 북방(北方)의 신으로 동쪽의 청룡(靑龍), 서쪽의 백호(白虎), 남쪽의 주작(朱雀)과 함께 사신(四神)의 하나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모양새를 보면 뒷머리에 지느러미가 6개 있는데, 쑥 내민 혀, 툭 튀어나온 눈은 해학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등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강화도 마니산 줄기가 서쪽으로 쭉 뻗어 내리다 세 발 달린 가마솥을 뒤집어 놓은 모습을 닮아 봉우리를 이루룬 정족산(鼎足山)이 있습니다. 그 정족산에는 단군(檀君)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는 산성 삼랑성(三郞城)이 있고 삼랑성 내(內)에 정남향을 향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천년고찰, 바로 전등사(傳燈寺)가 있습니다. 지금의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번지에 자리잡은 전등사는 381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등사에는 다른 절과는 다른 독특한 조각상이 있습니다. 바로 대웅보전 지붕을 떠받치는 ‘나부상(裸婦像)’ 곧 벌거벗은 여인의 모습을 표현한 조각이 있지요. 부처님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자가 있을까요?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만큼이나 여러 차례 불이 났었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부상은 17세기 말에 만들어졌다고 짐작합니다. 이 나부상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있지요.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던 도편수가 절 아래 사하촌 한 주막의 주모와 눈이 맞아 사랑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도편수는 돈이 생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시월은 초겨울 되니 입동 소설 절기로다 / 나뭇잎 떨어지고 고니소리 높이 난다 / 듣거라 아이들아 농사일 다했구나 (중간줄임) 방고래 청소하고 바람벽 매흙 바르기 / 창호도 발라 놓고 쥐구멍도 막으리라 / 수숫대로 울타리 치고 외양간에 거적 치고 / 깍짓동 묶어세우고 땔나무 쌓아 두소.” 농가월령가 10월령에 나오는 노래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무째로 첫눈이 내린다고 하는 “소설(小雪)”이다. 소설 무렵 아직 따뜻한 햇볕이 내리쪼이므로 “소춘(小春)”이라고도 부르지만 “초순의 홑바지가 하순의 솜바지로 바뀐다.”,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날씨가 제법 추워진다. 또 소설에 날씨가 추워야 보리농사가 잘 된다고 믿었다. 대개 소설 무렵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고 날씨도 추워지는데 이때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하며, 뱃사람들은 소설 무렵에는 배를 잘 띄우지 않는다. 이는 고려시대에 '손돌'이라는 사공이 배를 몰던 중 갑자기 풍랑이 일어 배가 흔들리자, 사공이 고의로 배를 흔든 것이라 하여 배에 타고 있던 임금이 사공의 목을 베었다는 강화(江華) 지역의 전설에서 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패랭이꽃 - 정습명 世愛牡丹紅 栽培滿院中 사람들 모란꽃을 좋아해 집 안 가득 심지만 誰知荒草野 亦有好花叢 시골 구석구석에는 아름다운 패랭이꽃 무더기 핀다네 色透村塘月 香傳隴樹風 꽃은 연못에 잠긴 달에 비치고, 향기는 바람결에 실려 오누나 地偏公子少 嬌態屬田翁 외진 시골 꽃 찾는 귀인들 적어, 그 자태는 늙은 농부 몫일세 위는 고려 의종 때 문신 정습명(鄭襲明, 미상 ~ 1151년)의 한시 “석죽화(石竹花, 패랭이꽃)”다. 이 시에서는 먼저 모란이 등장한다. 모란은 한자 이름으로 목단(牧丹)이라고도 하는데 예부터 한ㆍ중ㆍ일 세 나라에서는 부귀와 공명을 뜻하는 꽃이라 하여 “꽃 중의 꽃” 곧 “화중왕(花中王)”으로 불렀다. 신부의 예복인 원삼이나 활옷에 모란을 수놓았고, 선비들의 소박한 소망을 담은 책거리 그림에도 부귀와 공명을 염원하는 모란꽃이 그려졌다. 복스럽고 덕 있는 미인을 활짝 핀 모란꽃과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란은 그렇게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지만, 시골 들판 구석구석 무더기로 피는 패랭이꽃을 귀인들은 좋아하지 않으며, 대신 농부들이 이 꽃을 사랑한다. 패랭이꽃은 석죽화(石竹花)ㆍ대란(大蘭)ㆍ산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예전 한 뒤안길에는 “이면도로 안전한 교통환경 조성을 위한 제한속도 하향”이란 기다란 펼침막(현수막)이 붙어있었는데 이면도로, 조성, 하향 같은 한자말로 온통 도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한자말들 가운데 “이면도로”는 국립국어원이 펴낸 《국어대사전》 올림말에 없으며, 대신 <행정 용어 순화 편람(1993년 2월 12일)>에 “‘이면도로’ 대신 순화한 용어 ‘뒷길’만 쓰라”고 되어 있지요. 《국어대사전》에는 “이면도로”가 없는 대신 “이면(裏面)”만 올림말로 설명되어 있는데 그 뜻을 보면 “1. 뒷면, 2. 겉으로 나타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라고 풀이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이면도로”는 “겉으로 나타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이란 어색한 말이 됩니다. 따라서 “이면도로”보다는 뒷쪽에 있는 길이란 뜻으로 우리말인 뒤안길 또는 속길로 하면 뜻이 명확해지고 어린아이도 알기 쉬운 말이 될 것입니다. 요즈음은 '올레길'을 비롯하여 우회로를 뜻하는 '에움길' 같은 아름답고 정겨운 토박이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또한, ‘우로 굽은 길’, ‘좌로 굽은 길’ 같은 말을 도로 표지판에 새기고 있는가 하면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