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해마다 11월에 들어서면 일본은 ‘시치고상(七五三)’ 잔치를 치루기 위한 신사(神社)와 어린아이들에게 입힐 기모노를 파는 가게, 머리 손질을 해주는 미용실, 가족사진을 찍어주는 사진관 등이 분주해진다. 예전에는 11월 15일이 거의 정해진 날이었으나 핵가족에, 맞벌이 부부가 많은 요즈음은 ‘10월부터 11월 사이에 형편이 좋은 날’에 해도 된다는 공공연한 주장들도 나오고 있다. 시치고상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일본 어린이들을 위한 신사참배 날이라고 보면 된다. 일본에는 한국 아이들처럼 돌잔치가 없다. 그 대신 시치고상을 신사에 가서 치른다. 일본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오미야마이리(お宮參り)’라고 해서 생후 한 달 정도 되는 갓난아기를 강보에 싸서 신사참배를 하는 풍습이 있다. 그 이후에 남자아이는 3살과 5살 때 여자아이는 3살과 7살이 되는 해에 일본 전통 옷을 곱게 입혀 신사참배를 시키는 데 이를 ‘시치고상(七五三)’이라 한다. 이러한 시치고상은 어린아이들의 건강과 무병장수를 비는 일생의 통과의례 행사인 것이다. 이날이 되면 해당 나이의 어린아이에게 일본 전통 옷을 입혀 유명한 신사(神社)에 참배하러 데리고 간다. 이러한 풍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제 (28일) 오전 11시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교토 우지시(京都 宇治市)에 있는 우지강변 신핫코바시(新白虹橋)옆에서는아주 특별한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 (詩人尹東柱 記憶と和解の碑)” 제막식이었다. 이날 기념식에는 윤동주 시인의 조카인 윤인석(성균관대 교수)를 비롯한 백영서(연세대 윤동주기념사업운영위원회)위원장 등 한국 쪽 인사와 일본의 윤동주기념비건립위원회 안자이 이쿠로(安齋育郞) 위원장을 비롯한 윤동주를 사랑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일본 전역에서 참석했다. 이번에 기념비가 세워진 우지강변(宇治川)은 윤동주가 도시댜대학에서의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하기로 맘먹은 뒤 학우들과 송별회 겸 놀러갔던 아마가세다리(天ケ瀬つり橋)보다 상류쪽에 위치한 신핫코바시(新白虹橋) 옆에 세웠다. 윤동주와 학우들은 당시 아리랑을 불렀는데 이번 기념비 제막식 때도 참석한 모든 이들이 아리랑을 불러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날 제막식은 일본기독교단우지교회목사의 기도로 시작하여 건립위원장의 인사와 제막식에 이은 헌화로 이어졌다. 아울러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은 참석자 모두가 함께 낭송했다. 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도쿄 최고의 관세음신앙지로 알려진 아사쿠사 센소지(浅草寺)는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한번쯤 찾아가는 명소다. 센소지는 가장 오래된 절을 뜻하는 최고(最古)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절로도 최고(最高)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특히 절 입구의 나카미세(仲見世, 상점가)는 도쿄의 인사동 거리라고 불릴 만큼 아기자기한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밀집해 있어 외국인 관광객들로 언제나 활기가 넘친다. 가미나리몽(센소지 정문)을 지나자마자 펼쳐지는 상점가는 다양한 일본 전통인형은 물론이고 직접 구워 파는 전통과자 따위의 먹거리, 핸드백을 비롯한 여성들의 소품 액세서리, 옷, 신발, 기모노를 만들 수 있는 옷감 종류까지 팔고 있는 등 품목도 다양하다. 거기에 뒷골목에는 식당들도 즐비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주는 곳이다. 그런데 이 유명한 상점가에 위기가 닥쳤다. 내년 1월부터 가게세를 지금보다 16배나 올린다는 센소지(浅草寺)측의 발표 때문이다. 현재 89개의 점포가 영업을 하고 있는데 평균 한 달 치 가게세는 23,000 엔(한화 약 23만원)이었으나 내년부터는 16배에 해당하는 370,000만 엔(한화 약 370만원)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최구현 의병장 할아버님께드립니다. 저는 4월을 싫어합니다. 매년 계절 따라 다가오는 4월인데, 그렇게 싫을 수가 없습니다. 4월이면 신록이 우거지고 각종 꽃이 피는 계절인데도 그렇습니다. 왜냐고요? 4월이면 각종 꽃과 함께 벚꽃도 만발합니다. 벚꽃은 일본의 국화(國花)가 아닌가요? 우리나라 국화는 무궁화 꽃입니다. 벚꽃은 왜놈들이 우리를 지배할 때부터 곳곳에 많이 심었고, 우리를 지배하는 상징으로 일본 놈들의 식민지 지배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들은 곳곳에 정복과 지배의 의미로 벚꽃을 심었고, 각 급 학교 주변과 관공서 주변, 신사당 앞에도 심어놓고 신사당 앞을 지날 때마다 참배하게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각 가정마다 안방 아랫목 벽 위에 소형 신사를 걸어놓고 방에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정중히 절을 해야 했습니다. 일본이 조선 민족 말살 정책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우리글과 말을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 정책 중에 가장 먼저 시작한 게 벚꽃을 조선 땅 곳곳에 심는 일이었고, 그 일은 일제 강점기 36년 간 계속되었습니다. 개천길이나 뚝방길, 각 지역 군항지에 심어서 전국에 벚꽃이 만발하게 했습니다. 해방이 되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고대 일본의 수도는 나라(奈良)였다. 그러다가 서기 794년 환무왕(桓武天皇)은 수도를 지금의 교토(京都)로 옮겼다. 올해로 교토 천도 1223년째다. 물론 지금의 수도는 도쿄(東京)지만 문화재라든가 역사성을 따진다면 다연 교토가 한수 위다. 마츠리(축제)만 보아도 그렇다. 교토의 3대마츠리라고 하면 그 전통성을 예전부터 인정받고 있지만 도쿄의 3대마츠리라는 말은 없는 것을 보면 일본에서 교토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교토의 3대 마츠리라고 하면 5월 15일의 아오이마츠리, 7월 17일의 기온마츠리, 10월 22일의 지다이마츠리를 꼽는다. 이 3대 마츠리는 일본인들도 몰려들지만 전세계 사람들이 일부러 이 마츠리를 보러 교토를 찾기에 호텔 등은 일찌감치 동이 날 정도다. 10월 22일 열리는 시대마츠리는 “헤이안천도로부터 1100년째를 기념하여 명치28(1895)년에 제신으로 헤이안신궁(平安神宮)이 조영되었으며 10월 22일부터 10월 24일에 걸쳐서 마츠리가 성대히 거행된다.” 이는 교토시관광협회(京都市光協)에서 시대마츠리(時代祭)의 유래에 대해 밝힌 글이다. 1895년부터 시작했으니 시대마츠리는 올해로 122년째를 맞이한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백년편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글 형식의 글입니다.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 접수를 받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문의 : 02 -733-5027】 존경하는 윤봉길 의사님께. 안녕하세요~ 존경하는 윤봉길 의사님. 하늘에서 편히 쉬고 계신지요? 윤의사님께서도 그간 하늘에서 봐오셔서 아시다시피 저는 의사님을 매우 존경하는 대한 청년 정양원입니다. 지금 제 나이가 의사님께서 의거를 단행하고 순국하신 때의 나이인 24살 이기도 하고, 다가오는 2019년이 곧 대한민국 100년이 되는 해인만큼 존경하는 윤의사님께 이렇게 100년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저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국민들은 의사님의 숭고한 희생에 덕을 보아 지금과 같은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우리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고 북녘 동포들은 번영을 누리지 못하고 있어 크게 안타까운 상황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의사님을 생각할 때면 항상 제 마음에서 의사님에 대한 감사함과 존경심이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사님의 살신성인이 아니었다면 중국의 백만 대군과 장제스가 감동하는 일이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장제스가 당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이시구로 가즈오(石黒 一雄, 64살)씨는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인이다. 아니 이시구로 씨는 일본인이지만 1983년 영국에 귀화했으니까 국적은 영국인이라고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이 확정 된 뒤 그는 “내 마음속에는 항상 일본이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나 사물을 보는 방법의 대부분에서 내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소감에서 밝혔듯이 자신을 영국인으로 여기기보다는 일본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28살 되던 해인 1982년, 영국에 주재하는 나가사키가 고향인 여성의 회상을 그린 처녀작 <여자들의 먼 여름(A Pale View of Hills)>을 발표하여 왕립문학협회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의 소설에 나가사키가 무대로 등장하는 것은 그가 5살 때 해양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영국에 건너간 것과 무관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처녀작의 무대가 나가사키인 것과 작가의 고향이 나가사키라는 일치감은 어쩌면 어린 시절 떠나온 고향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보이지 않게 내재해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동양인의 모습으로 낯선 환경에서 성장한 이시구로에게 있어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기억의 불확실성은 이후 그의 소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571돌 한글날을 맞아 곳곳에서 여러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그 가운데 국립국어원(원장 송철의)도 한몫하는 모양이다. 국립국어원은 오늘 10월 9일 한글날에 ‘2017 나만의 국어사전 뜻풀이 공모’ 시상식과 수상작 전시회를 연다고보도자료를 내놓았다. 올해로 3회째를 맞는 이번 행사는 “국어사전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기획된 것으로, 올해는 한글학회의 ≪큰사전≫ 완간 60주년과 국립국어원의 국민 참여형 국어사전 ≪우리말샘≫ 개통 1주년을 기념하여 ‘오늘날 국어사전의 의미’를 주제로 진행하였다.”고 홍보하고 있다. 국립국어원의 ‘한글날 행사’에 대해서흠잡고 싶은 생각은 없다. 문제는 이런 홍보성 행사 이전에 국립국어원이 만든 <표준국어대사전>의 낱말 풀이에 대한 깊은 반성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며칠 전 아는 사람이 전북 정읍에서 열리고 있는 ‘정읍 구절초 축제 2017’에 다녀왔다며 끝없이 펼쳐진 구절초 꽃밭 사진을 보내왔다. 보기만 해도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렇다면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구절초를 어떻게 풀이하고 있을까? “구절초(九節草):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채상덕(蔡相悳,1862~1925) 선생은 황해도 출신으로 1895년 을미의병에 참여하였으며 1910년 일제 침략으로 조선이 강점되자 남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2년 2월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비롯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광한단(光韓團)·보합단(輔合團) 등 각 군단의 대표들이 관전현(寬甸縣)에 모여 남만통일회의(南滿統一會議)를 개최하고 회의를 거듭하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채상덕 선생은 최고 책임자인 총장에 취임하였다. 당시 선생과 함께 통군부에서 활동한 인물들로는 비서장 고활신, 민사부장 이웅해, 군사부장 이천민, 교육부장 김동삼, 실업부장 변창근, 사령관 김창환, 경무감 전덕원 등을 들 수 있다. 대한통군부가 성립된 지 얼마 안 되어 여기에 참여하지 못했던 독립운동단체들과 통합운동이 다시 전개되어, 1922년 8월에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가 개최된 결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자 선생은 부총장으로 활동하였다. 총장은 김동삼 선생이었다. 1923년 2월 대한통의부와 의군부(義軍府)로 분열되자 선생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경남 산청 출신의 홍호연(洪浩然)은 임진왜란 때 12살의 나이로 왜군에 납치되어 나고야 일대에 살면서 명필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진주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군, 관, 민 7만 명을 학살한 뒤 경남 내륙지역까지 진출했다. 그때 경남 산청에 살던 호연의 가족인 남양 홍 씨 일가는 마을 뒷산 동굴로 피신했다. 그러는 와중에 어린 소년은 가족들과 헤어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부대에 붙잡혀 일본 규수(九州) 사가(佐賀)에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그 뒤 12살의 어린 소년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홍호연은 나카노진우에몬(中野左衛門)에게 맡겨져 사무라이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하지만 조선에서부터 글공부를 하면서 익힌 붓글씨 솜씨는 사무라이들의 눈을 휘둥그레 만들었다. 어린 호연은 워낙 천재적인 소질도 있었던 데다가 목숨을 지켜내기 위한 피나는 노력으로 서예에 몰두한 끝에 ‘혹부리 체’라는 독자적인 서체를 이루면서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찬사를 받는다. 교토시의 초호지(頂法寺) 현판은 물론 사가시(佐賀市)의 신사(神社)등에 작품이 남아 있을 정도로 유명한 서예가로 활약한 홍호연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