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인천관동갤러리(관장 도다이쿠코)에 도깨비들이 모였다. 한국, 일본, 중국 도깨비는 어떻게 다를까? 지난 9월 15일부터 12월 10일 까지 열리는 ‘신명난 도깨비전’은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한중일의 도깨비에 관한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도깨비 모습은 한중일 서로 다른데 고대 중국 유물을 보면 왕릉이나 권력자의 무덤을 지키는 짐승 얼굴을 가진 용사나 상상의 동물 모양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용인지 사자인지 헷갈려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불교가 전파되면서 도깨비는 부처를 수호하는 용사의 이미지로 둔갑하였다가 점점 그 역할이 격하되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을 괴롭히는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 일본의 경우에는 “나쁜 짓을 하면 무서운 ‘오니(도깨비)’가 온다.”라고 해서 어린이들을 달랠 때 도깨비가 등장하기도 한다.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 신라시대 도깨비 기와는 용맹한 모습으로 사악한 잡귀를 몰아내고 집을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별전(열쇠패)을 보면 재산을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복을 바라는 글씨도 새겨진 것으로 보아 재앙을 막아주는 벽사(辟邪)와 복을 부르는 초복(招福)의 구실도 하고 있음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김상옥 의사님은 해방 후 어떤 민족의 모습을 꿈꾸셨나요? 저는 1919년도 혁신공보 34호 6월29일자 특집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의 취임연설을 읽으며, 평할아버님이 생 실천 해 나가신 독립운동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본문 : 우리가 우리 주권만 찾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위에 모범적인 공화국을 세워 이천만으로 하여금, 천연의 복락을 누리려 함이요.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희생하여 이 목적을 달성하여야 하겠오.) 새벽이면 낙산에 올라 소나무에 태극기를 다시던 마음과 동대문 교회의 믿음 생활 속 함께하신 말씀은 이사야서 50장 10절 이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종의 말에 순종하느냐? 빛이 없이 어둠 속을 걷는 자는 주님의 이름을 신뢰하고 자기 하느님께 의지하여라." 그렇습니다. 저는 할아버님의 마음을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헤아려 보려고 노력 해 왔습니다. 저는 김상옥 의사님의 형님의 딸 김간난의 첫째 외손주 박진호입니다.할아버님의 마음, 독립운동가의 심정을 시 한편으로 써 봤는데 이 시의 마음이 잘 전달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시한편 읽어드리겠습니다. 어둠을 만날 때 박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비탈진 돌길로 높은 한산 나 홀로 올라가니(獨上寒山石逕斜) 흰 구름 피어나는 곳에 외딴 집 하나 있네(白雲生處有人家) 가던 길 멈추고 잠시 늦가을 단풍을 감상하니(定車坐愛楓林晩) 서릿발 단풍잎이 매화보다 붉구나(霜葉紅於二月花) 13살짜리 어린 소년은 당나라 두목(杜牧, 830~852)의 시를 줄줄 읊었다. 죽음에 앞서 이 시 한수로 목숨을 건진 소년의 이름은 여대남(余大男, 1580년~1659)이다. 여대남은 경상남도 하동 출신으로 보현암(普賢菴)에서 글공부를 하던 중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의 장수 가토 기요마사의 부하에게 잡혀 죽을 뻔 하였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당시 여대남은 죽기 직전, 붓을 달라고 해서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를 달필로 써내려갔다. 이를 본 가토 기요마사는 이 소년의 비범함에 죽이려던 것을 중지하고 일본으로 데려가 자신의 스승인 일진(日眞) 스님에게 출가 시켜 승려의 길을 걷게 한다. 소년시절부터 영특했던 여대남은 일본 최고의 불교학당인 교토의 육조강원(六條講院)에서 공부 한 뒤 규엔지(久遠寺), 호린지(法輪寺) 등을 거쳐 1609년에 29살의 나이로 구마모토의 고찰인 혼묘지(本妙寺)의 3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지난 9월 9일(토) 일본 동경한국학교에서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아주 특별한 강연이 있었다. 강연을 한 사람은 유시경(성공회 신부, 교무원장) 신부로 그는 <일본에서 다시 만난 윤동주>라는 제목으로 ‘시인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억함 –시대처럼 다가올 아침을 기다리며- ’라는 내용으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살로 생을 마감해야했던 민족시인 윤동주의 삶을 되새겼다. “반일(反日), 승일(勝日), 극일(克日)을 생각하며 대학시절을 보내던 중, 일본 교회와 청년들을 만나면서 일본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의 원수 나라'에서 '친구의 나라'로 변화해 왔습니다. 70~90년대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몸부림을 도와준 역사와 일본인들도 만났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첫 일본 유학지였던 릿쿄대학 교목으로 일하면서, 윤 시인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임에 놀랐습니다. 하지만 한쪽에서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모임을 이끌어 가고 있는 수많은 일본인들과 만나며 그들의 존재와 열정에 또한 놀랐습니다.” 유시경 신부의 강연은 릿쿄대학에서의 경험담으로 시작되었다. 유시경 신부라고 하면 일본에서 윤동주를 추모하는 가장 큰 모임인 ‘시인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막부시대(여기서는 에도시대‘1603~1868’를 말함)에는 막부의 엄격한 규제로 아무나 목화솜으로 옷을 해 입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겨울이 길고 추운 지방인 아오모리 사람들은 마를 심어 그것으로 옷을 해 입어야 했지요. 얼마나 추웠겠습니까? 겨울에 숭숭 바람이 들어오는 마옷을 입을 수 없게 되자 어머니들은 마옷감 위에 코긴사시(자수의 일종으로 보온을 위한 덧누비)를 해서 보온성을 유지하려고 애썼습니다. 막부에서 목화솜은 사용못하게 했지만 목화실은 허용하여 집집마다 코긴사시 붐이 일었지요. 그렇게 가족 사랑의 마음이 듬뿍 담긴 코긴사시는 쓰가루지방의 독특한 무늬로 남아 오늘날 ‘쓰가루코긴사시’의 전통이 지켜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본 아오모리현 히로사키시(青森県 弘前市)에 사는 코긴사시의 명인 사토요우코 (佐藤陽子) 씨가 그의 자수전시관을 찾았을 때 들려준 이야기다. 전시관의 정식 이름은 <사토요우코코긴전시관(佐藤陽子こぎん展示館)>으로 이곳을 찾아간 날은 지난 8월 8일 오후 4시 무렵이었다. 히로사키시의 조용한 마을에 자리한 자수전시관은 2층짜리로 된 아담한 가정집 같은 곳이었는데 1층에는 견학자들을 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경기도 고양시(시장 최성)에는 일산호수공원이 있다. "일산호수공원은 면적이 99ha(약 30만평)에 이르는 동양최대의 인공 호수공원이다. 30만㎡(약 9만평)의 담수호에 깨끗한 물 관리를 위해 잠실수중보상류의 상수원을 약품 침전시켜 맑은 물을 담수(방류)하고 있다. 일산신도시의 개발과 함께 근린공원으로 1995년 개장한 공원은 5㎞의 산책로와 자전거 전용도로가 감싸는 시민들의 체육공원이고 주말이면 각종 공연과 행사가 이어지는 문화의 공간에 하나이다.” -위키 사전- 한국의 최대 인공호수도 아니고 동양최대라니 압도적이다. 이커다란 호수공원을 곁에 끼고 살고 있으니 여간한 복이 아니다. 기자는 복작대는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이곳에 살면서 자연 친화적인 호수경관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호숫가를 산책하길 올해 22년째를 맞이한다. 특히 흙길인 메타세콰이어 길을자박자박 걷는 재미는 걸어본 사람만이 안다. 그런데 점점 호수공원에 실망을 느끼고 있다. 어느새 가을인데도 시민들이 산책하는 길에는 국화 한송이 안보인다. 국화는커녕 산책길 곳곳에 만들어 놓은 꽃밭은 개점 휴업 상태같다. 대관절 관리를 하는 것인지 내버려두고 있는 것인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나는 의식적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거나 무정부주의자로 사상을 전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우리나라의 독립에 관하여 실현하려 노력하는 나의 생각과 방법이 현대사상의 견지에서 보면 무정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상통하기 때문에 남들이 그렇게 보는 것이다. …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알맞은 제도와 조직과 구조를 생각해야 했고 그 결과 얻어진 것이 이것이니, 나의 이 사상은 일관된 것이며, 나의 독립운동의 방향이라고 나는 믿는다. … 나는 사심 없이 공정한 민족적 양심을 지닌 사람이라면 당연히 나와 같은 주장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무정부주의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무정부주의 운동이어야 할 것이다. … 우리 독립운동의 현실로 보아 (아나키즘이) 가장 실제적인 이론이며 적절한 방법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사실상 모든 운동가들이 자기 사상이야 어떠하든지 이미 무정부주의 자유연합의 이론을 다 같이 이대로 실행하고 있다. 기미년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수많은 단체와 조직이 생겼지만 그에 소속된 운동가가 자신의 자유의사의 결정에 의지하지 않고 강제 명령에 무조건 맹종하여 행동한 사람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고양시 일산 호수공원 메타세콰이어 산책길에는 봄부터 걸려 있는 볼썽사나운 펼침막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펼침막 내용인 즉슨 “야생화가 심겨져 있습니다. 밟지 마세요” 라는 것인데,이곳을 산책할 때마다 거슬린다. 그냥 놔둘까하다가 참새가 방앗간을 못지나가듯이 한마디 해야겠다 싶어 글을 쓴다.“야생화가 심겨져있다?” 맞는 말 같지만, 일본어 전공자의 눈으로 볼 때는 영락없는 일본어 피동형 (일본어는 우케미 '受身'라고함)표현이다. “야생화를 심었습니다. 밟지 마세요”라고 하면 훨씬 편한 말일 텐데 아쉽다. 문법이야기를 하면 약간 피곤해지니까 결론부터 말하겠다. 고양시가 야생화를 심었으니 밟지말고 잘 보호해달라는 뜻이라면 ‘심었다’가 맞다. 주체자가 없이 고양시 호수공원에 갔더니 야생화가 심겨져있더라(심어져있더라)는 표현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이 펼침막은 고양시 공원관리과에서 내 건 것이므로'심겨져있다'는 맞지 않다. 이 보다 더욱 좋은 말은 야생화라는 한자말 보다는 ‘들꽃’이라는 우리말이 좋다. ‘들꽃을 심었습니다. 밟지 마세요’라고 하는 편이 정겹고, 어색하지 않은 말이다. 펼침막 하나를 걸더라도 이것을 보는 시민들의 입장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중학교 1,2학년은 다니지 못하고 3학년으로 들어가 1년 다니고 졸업을 했지요. 아버지가 6.25때 보성경찰서에 끌려가 51살의 나이로 학살당하실 무렵 저는 겨우 9살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때 막내 동생을 임신 중이셨으니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지요. 저는 또래 애들이 초등학교를 다니고 중학교에 다닐 때에 신문팔이, 비누장사, 식모살이 등을 하느라 제대로 교육을 받을 형편이 안되었습니다. 그래도교육가이셨던 아버지를 떠 올리며 이를 악물고 주경야독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장흥중학교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3학년에 편입해 달라고 당당히 말했지요. 간단한 테스트를 거쳤지만 충분히 3학년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판단 했는지 교장선생님은 저를 3학년에 편입해주셨습니다. 그때는 그런 융통성이 있었습니다. " 이는 항일민족교육자인 학산 윤윤기(1900.7.9~1950.7.22)선생의 둘째 따님인 윤종순 여사(76살)의 말이다. 윤 여사는 말을 이어갔다. “그때는 지금과 달라서 교장선생님의 권한이 컸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비록 비명에 가셨지만 저는 중학교 졸업장을 따야겠다는 생각에서무작정 초면의 교장선생님을 찾아 간 것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에 전기가 들어가지 않는 곳, 그런 곳이 있을까? 그런 곳이 있다. 아니 전기는 들어가는 데 전깃불을 거부하고 호롱불을 켜고 영업하는 곳이 있다. 호롱불이라고 한 것은 그런 분위기를 말하고자 함일 뿐 실은 램프불이다. 하지만 침침하기는 호롱불이나 램프불이나 매한가지다. 관서지방은 기온이 39도나 올라간다는 일기예보에도 아오니온천은 숙박 방에 솜이불이 놓여있다. 아오모리현(青森県) 아오니온천(青荷温泉)에 도착한 것은 지난 8월 11일 금요일 저녁 6시 무렵이었다. 구불구불 4킬로 이상의 편도 산길을 승용차로 달려 온천에 도착하니 슬슬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아오니온천은 전기로 대변되는 모든 문명의 이기가 작동되지 않는 곳이다. 텔레비전도 없고 물론 슬기전화(스마트폰)도 터지지 않는 곳이다. 대신 침침한 램프불이 방마다 걸려있고 현관이나 복도 역시 마찬가지다. 전날 크고 드넓은 아름다운 도와다호수(十和田湖)를 둘러보고 이 깊숙한 두메산골 온천에 도착했다. 산속이라 해가 매우 짧다. 6시부터 저녁 식사가 시작되는 대형 식당은 다다미방으로 되어 있고 유카타(浴衣, 목욕한 뒤에 입는 일본옷)를 갈아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식탁에 앉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