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지난 5월 31일,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제5-138에 잠들어 계신 강혜원 지사를 찾아뵙고 왔다. 가뭄 속에 잠시 소나기 한줄기가 내린 뒤끝이라 현충원은 어느 때보다도 정갈한 느낌이었다. 이곳에는 하와이로 이민을 떠난 이래 대한부인구제회 등을 조직하여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한 황마리아 (1865~ 1937, 2017년 애족장)지사의 따님인 강혜원(1886~1982, 1995년 애국장)과 사위 김성권 (1875~1960, 2002년 애족장 ) 지사의 무덤이 있다. 강혜원, 김성권 부부 독립지사의 무덤은 지난 2016년 11월 16일, 미국 땅에 묻힌 지 56년만(아내 강혜원은 34년만)에 고국땅으로 돌아와 안장된 것이다. 강혜원 지사는 평양에서 아버지 강익보와 어머니 황마리아 사이에 2남 1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강 지사는 어머니와 남동생 강영승 등과 함께 1905년 5월 도릭 선편으로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떠났다. 낯설고 물설은 이역땅 하와이에 도착한 강 지사의 나이는 19살이었다. 그는가파올라 사탕농장과 에와 사탕농장에서 일하다가 1912년 미국 본토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뒤 이듬해인 1913년 12월 9일 이대위 목사의
[우리문화신문= 이윤옥기자] 여성독립운동가 조용제 (趙鏞濟, 1898. 9.14~1948. 3.10) 애국지사는 ‘대한민국’ 이라는 국호를 처음 지은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의 누이동생이다. 조용제 지사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공헌을 한 집안 출신으로 무려 12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조용제 지사는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아버지 조정규, 어머니 박필양의 6남 1녀 가운데 외동딸로 태어났다.아버지 조정규 선생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조성룡의 외아들로 학덕을 겸비한 함안 조 씨 가문의 선비였다. 함안 조씨 시조 조정(趙鼎)은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통일에 큰 공을 세운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다. 조용제 지사의 오라버니 조소앙은 일본유학을 마치고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오라버니의 영향으로 중국으로 건너간 조용제 지사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오라버니 조소앙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에 힘썼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민족주의 계열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정당으로 결성 이후 1935년 9월, 재건과 통합(1940. 5)의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탄탄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 땡볕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고 결코 화내지 아니하며 늘 조용히 미소 지으며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나물을 먹으며 모든 일에 제 이익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듣고 깨달아 그리고 잊지 않고 들판 숲속 그늘에 지붕을 새로 이은 작은 오두막에 살며 동쪽에 병든 아이 있으면 가서 돌봐주고 서쪽에 고단한 어머니가 계시면 가서 그 볏단을 져주고 남쪽에 다 죽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두려워할 것 없다고 말해주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부질없는 짓이니 그만 두라고 말리고 가뭄이 들면 눈물을 흘리고 추위 닥친 여름에는 어찌할 바 몰라 허둥거리고 모든 사람에게 바보 소리를 들으며 칭찬도 듣지 않지만 걱정거리도 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이는 일본의 국민작가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 1896년 8월 27일 ~ 1933년 9월 21일)가 지은 유명한 ‘비에도 지지 않고(雨ニモマケズ)’ 시다. 고향 이와테에서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겐지는 도쿄로의 진출을 꿈꾸다가 25살 때(1921년) 대도시 도쿄로 무작정 상경을 한다. 먹고 잘 곳도 없는데다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송정헌 애국지사(1919~2010)는 중국인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1990년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을 받은 분이다. 송정헌 지사는 중국 항주에서 태어나 1937년 강서성 노산구강 폐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 할 때 훗날 남편이 되는 유평파 지사의 형 유진동 선생을 만났다. 중국 절강성 항주(浙江省 杭州)는 아름다운 서호를 끼고 있는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으로 소주(苏州)와 더불어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중국인들은 ‘소주에서 태어나 한주에서 사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라고 말할 정도로 사람살기 좋은 곳이며 소동파와 같은 대시인이 이곳에서 시를 읊었던 곳이다. 송정헌 지사가 평생의 반려로 삼은 한국인 독립운동가 유평파 지사를 만난 것은 그의 형 유진동 선생을 만난 인연으로 이어진다. 유진동 선생은 임시정부 백범 김구 주석의 주치의로 1928년 중국 상해 동제(同濟)의과대학에 다닐 때부터 한인학우회를 결성, 서무위원으로 활동하며 김구 주석을 도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송정헌 지사와의 인연은 송 지사가 근무하던 병원장으로 유진동 선생이 부임하면서 동생인 유평파 지사를 소개하여 송정헌, 유평파 독립운동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신언준 (1904~1938) 선생은 평남 평원(平原) 사람으로 1923년 중국으로 건너가 항주영문전수학교(杭州英文專修學校)·영송국립정치대학(英淞國立政治大學) 법률과 및 동영대학(東英大學) 법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시절부터 상해청년동맹회(上海靑年同盟會)를 발기하고, 상해(上海) 한인학우회(韓人學友會)의 집행위원과 동 수보위원(修補委員)으로 활동하면서 민족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27년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요인인 안창호(安昌浩)가 중국의 각지에서 조선 독립을 호소할 때 이를 보좌하여 교섭 및 서무와 중국어·영어의 통역을 담당하였다. 흥사단(興士團)의 간부로서 독립운동에 관계하는 문서작성을 담당하는 한편, 흥사단 제17차 원동대회(遠東大會) (1931. 1. 7)에서는 연사로 강연하였고, 동년 6월 7일 여운형(呂運亨)이 단장이었던 상해교민단의사회(上海僑民團議事會)에서 인성학교(仁成學校)의 학감으로 당선되어 독립운동가들의 자녀교육을 맡았다. 1929년 1월 1일 이래로 동아일보에 재직중 상해와 남경 특파원으로 뽑혀 프랑스 조계내에 거주하면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조국독립을 위한 활동상황과 그 밖에 독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조상님들의 이름자만이라도 새겨진 족보들을 고국으로 보내드리는 것이 후손된 도리를 다하는 것 같아 기증하게 되었다. 일본에는 많은 동포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 가운데 한국과 관련된 유물들을 소장하다가 후대에 전승되는 과정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지난 4월 21일(금) 재일동포 정아미(鄭雅美, 일본이름 마쓰무라마사미(松村雅美), 여 51살)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족보 등 고문서 7점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하며 남긴 말이다. 정아미 씨가 기증한 책은 《영산신씨파보(靈山辛氏派譜)》(2책, 1904년, 목활자본)와 《영산신씨세계(靈山辛氏世系)》(2책, 필사본), 《영산신씨가승(靈山辛氏家乘)》(1책, 필사본), 《개국정사좌명공신회맹문(開國定社佐命功臣會盟文)》(1책, 1791년, 목판본), 《종부지증(種付之證)》(1점, 1918년) 등 7점이다. 기증 자료는 기증자의 친정어머니 신애자(辛愛子)씨가 보관해오던 것으로 어머니는 경남 하동에서 살다 한국전쟁(1950년) 당시 아버지 신재호(辛在昊)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가지고 간 자료들이다. 두 분은 모두 고인이다. 《영산신씨파보》는 우리나라 어느 기관에서도 소장하고 있지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박세화 선생의 본은 밀양이며 묵재 경상(默齋 景祥)의 8세손으로 고원군 남흥리(高原郡 南興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남보다 크게 뛰어나 9세에 소학(小學)을 읽었는데 스승이 '소학의 일을 이루다 실천할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하므로 다시는 나아가 섬기지 않았다. 그만큼 성현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일찍이 그의 명성이 사방에 떨쳤는데 나이 18세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상황아래서 위정척사(衛正斥邪)할 것을 결의하고 신명(身命)을 다 바쳐 저지하고자 뜻을 세웠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인근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일찍이 어머니 우 씨의 병환이 심중하여졌을 때 손가락을 잘라 관혈(灌血)하여 회생시킨 적이 있었다. 10여 년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치상(致喪)을 정성껏 하여 병을 얻을 지경에 이르렀다. 후에 김직연(金直淵)이 의당(毅堂)이라고 당호를 지어 부르자 오히려 부끄러워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소식을 듣고 태백산으로 들어가 자정(自靖)하였다. 그의 극빈함을 보고 한 부자가 재산을 반분하여 주고자 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1885년 가인(家人)이 산삼을 얻었는데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화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몇 해 전 필자는 일제국주의가 저지른 남경대학살(1937~1938년, 중일전쟁 중에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 현장을 답사한 적이 있다. 인류의 비극인 남경대학살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인 아이리스 장(Iris Chang, 張純如)의 《남경의 강간, The Rape of Nanking》에 자세히 나와 있어 사족을 달 필요는 없지만 이 한 권의 책이 잔혹하기 짝이 없는 일본군의 남경대학살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은 크나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남경대학살 현장에서 유난히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사진 한 장이 있다. 그것은 목이 잘린 중국인의 머리를 나무 가지 위에 올려놓고 입에는 담배꽁초를 물려 놓은 모습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사진이 《일본잔혹사진사(日本殘酷寫眞史), 2006, 도쿄 사쿠힌샤》에 실려 있어 섬뜩했다. 《일본잔혹사진사(日本殘酷寫眞史)》란 다름 아닌 시모카와 코우시(下川 耿史, 1942~) 씨가 쓴 책으로 이 책 29쪽에 실린 목 잘린 남자의 사진은 필자가 남경대학살에서 본 사진과 흡사하다. 일본군이 저지른 남경대학살의 참상은 이미 일본 내에서 학습(?)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송상도(宋相燾)의 《기려수필(騎驢隨筆)》에는 망국의 순간! 자결한 우국지사들이 18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벼슬한 선비로서 치욕과 통분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지요. 나라가 망하는 순간! 벼슬 한 번 하지 않고 글공부에만 매달린 전라도 산골의 매천 선생도 치욕과 통분 끝에 자결합니다. 절명시(絶命詩)와 함께 자제들을 모아 놓고 매천 황현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셨지요. 조선 왕조가 선비의 나라인데 선비를 길러낸 지 5백년 나라가 망하는 순간 선비 한 명도 죽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이육사 당신의 친척 이만도, 이중직 등 안동의 선비들도 나라가 망하는 때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분들은 당신의 할아버지 이중직과 함께 개화기 계몽운동을 펼쳤던 안동의 선각자들이셨지요. 당신은 6살 때 할아버지 이중직에게 소학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열두 살 즈음엔 새벽 1시가 되도록 중용, 대학을 읽으며 유교의 전통규범을 배웠습니다. 당신은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자 안동 선비 마을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지요. 엄격한 선비정신이 인격 속에 내면화된 모습은 당신이 쓴 수필 《계절의 오행》 속에 이런 구절로 나옵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창업 10년 된 회사가 어떻게 해서 아프리카 굴지의 기업이 되었는가? 그 비밀의 열쇠가 한권의 책 속에 들어있다. 책 제목이 좀 길지만 《아프리카의 초인기 일본기업 비포워드의 성공 철학》이라는 책이 그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비포워드를 창업한 아먀가와 히로노리(山川博功, 46살) 씨다. 그는 20대 때 중고자동차 매매업을 시작했는데 해외 비즈니스 시장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여 실패를 거듭했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가 주로 공략한 것은 현지의 유력한 조력자를 얻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비포워드와 손잡을 파트너 기업을 찾아서 고용을 창출하고 신뢰를 구축해 나간 것이 주효했다. 또한 아프리카의 SNS 환경이 일본 이상으로 유행하고 있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입소문에 의한 평판이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야마가와 씨는 브랜드를 광고하기 위해 마우라이의 인기 축구팀을 사들여 팀 이름을 아예 비포워드라고 회사이름을 붙여 버렸다. 현재 비포워드는 매출이 500억 엔까지 성장했다. 28개국 지점에 52명의 외국인 스탭이 있는 등 국제적인 기업이 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소개한 《아프리카의 초인기 일본기업 비포워드의 성공 철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