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하와이 이윤옥 기자] 와이파후 사탕수수밭에서 - 이 윤 옥 오하우섬 와이파후 사탕수수 공장 굴뚝 우뚝 솟은 곳 아래 옹기종기 모여 둥지 튼 조선인들 그리운 고향 떠나 올 때 고이 간직한 흑백사진 철지난 영화 포스터처럼 걸려있는 좁은 방마다 물씬 묻어나는 고향의 정경 빼앗긴 나라 소식에 울밑에 봉선화 심고 초여름이면 손톱에 붉은 물들이듯 끓는 피 가슴에 넘치던 처녀들 뙤약볕 사탕수수밭 중노동에 시달려 받은 돈 독립자금에 선뜻 내어 나라 살린 그 마음 임들은 비록 갔지만 판잣집 울안 붉은 봉선화 꽃 오늘도 붉게 피어 임들의 뜨거운 피 전하고 있네 하와이 플랜테이션 빌리지(Hawaii's Plantaion Village)는 한국, 중국, 하와이, 일본, 필리핀, 오키나와, 포르투갈, 푸에르토리칸 8개 소수민족의 이민 선조들의 삶을 한 곳에 엿볼 수 있는 민속 박물관이다. 박물관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각국의 노동이민자들의 집 한 채씩을 지어 당시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보게 한 민속자료관 같은 곳이다.19일(현지시각) 오후 2시 플랜테이션 빌리지를 찾았을 때는 거의 찾는 이가 없이 몇몇 관리인들이 주택 주
[우리문화신문= 하와이 이윤옥기자]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시의 인하공원에는 인하대학교가 이민 1세대의 하와이 이주 11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비가 있다. 그런데 그 기념비에는 한자로 커다랗게 “眞” 자를 써놓았다. 그리고 뒷면엔 “인천에 설립된 인하대학교는 '사실이나 이치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는 뜻의 ”眞“을 교훈으로 하와이 교민들의 후원의 마음을 깊이 새기면서 오늘도 진리탐구에 정진하고 있습니다" 라고 설명해놓았다. 하지만 미국에 기념비를 세우면서 굳이 한글이 아닌 한자를 커다랗게 써놓았는지 이해가 안간다. 한자로 된 “眞”자만 보면 중국 공원인지 한국 공원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것이다. 한국은 엄연히 고유의 글자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그것도 세계 최고의 글자라는 한글을 놔두고한국 공원에 구태여 한자를크게 새긴 것은철학이 없는 일이라고 본다. “眞” 대신 "참"이라고 해도 되지 않았을까?누가 보라고 이런 한자를 써 놓은 것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우리문화신문= 하와이 이윤옥 기자] 전수산 지사를 그리며 - 다이아몬드헤드 공원묘지에서 먼 이국땅서 잠든 그대 극락조화 한 다발 안고 찾아간 날 무덤 뒤 다이아몬드헤드산은 빛났고 와이키키 바다 바람은 뺨을 간지럽혔다오 어린 딸 옥희를 안고 하와이땅 밟은 그대 억척스레 독립자금 모아 상해임시정부의 기틀을 잡고 헐벗은 조국의 애국지사 후손을 도운 고운 마음 고이 감추고 이제는 지친 몸 마음 모두 내려놓고 다이아몬드헤드 공원묘지에서 조국의 무궁함을 비는 그대여! 독립의 역사 지워지지 않는 한 그대의 애국혼 영원하리라! - 이윤옥 - 전수산(1898~1969)애국지사가 잠든 호놀루루의 다이아몬드헤드 공원 묘지(DIAMOND HEAD MEMORIAL PARK)를 찾은 시각은 18일아침 10시(현지시각)였지만 이미 태양은 한여름처럼 뜨거운 열기를 뿜고 있었다. 봉분이라든가 묘지석이 없는 미국의 공원묘지는 그야말로 하나의 공원(PARK)처럼 평온한 곳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푸른 잔디밭 같지만 자세히 가보면 바닥에 묻힌 사람의 작은 묘지석이 박혀있다. 전수산 지사의 무덤을 찾아가기 위해 하와이에 도착한 날(13일, 현지시각) 외손자인
[우리문화신문= 이윤옥기자] 한민족을 그리도 사랑하셨던 헐버트 박사님, 저는 지금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 백주년을 기념하는 ‘백년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박사님께서도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위해 워싱턴에서, 오하이오(Ohio)에서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셨습니까. 이 ‘백년편지’ 쓰기 행사는 박사님과 잘 아시는 분들의 후손들이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글 발전을 위해 박사님과 머리를 맞댔던 동농 김가진 선생의 손자(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와 일제의 감시를 피해가며 헤이그만국평화회의 밀사파견을 박사님과 함께 모의했던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이종찬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가 주관하고 있습니다. 저는 박사님께서 일제에 쫓겨난 지 40년만인 1949년 한국에 환국하시었으나 도착 1주일 만에 서거하시어 양화진 한강변에 영면하신 다음 해에 태어났습니다. 저는 학창 시절 박사님께서 을사늑약 이듬해에 쓰신 <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멸망사)>라는 책을 읽고 박사님의 한민족 사랑이 이 땅에서 잊혀져서는 안 된다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박사님은 이 책에서 그 누구보다도 한민족의 가치를 올바로 평가하시고, 한민족의 나라 잃는 서러움을
[우리문화신문=하와이 이윤옥 기자] 폴리네시안 센터(민속촌)에 막 도착했을 때는 흥겨운 하와이언 춤이 시작되고 있었다. 빨강, 노랑, 파랑 따위의 원색의 춤옷을 갈아입은 원주민 예술단들이 벌이는 ‘카누선상쇼’라는 이름의 공연을 보기 위해 전 세계 구경꾼들은 좁은 강폭을 사이에 두고 이쪽저쪽에서 환호성을 연발한다. 그야말로 관광객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었다. 하루 1회 공연이 2시 30분에 이뤄지는데 운좋게 공연이 진행되는 시간에 입장했다. 하와이 폴리네시안 민속촌은 와이키키에서 북쪽으로 약 1시간 넘는 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하와이구경의 첫 번째로 추천 받는 곳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용인 민속촌 같은 곳이라고나 할까? 이곳이 용인 민속촌이랑 다른 것은 통가, 사모아, 타이티, 피지, 아우테아로아, 이오세파 등에서 온 원주민들의 독특한 문화, 관습, 전통문화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이 입구에는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는 물론 영어 등 각국 언어로 소개한 전단지가 놓여있었는데 특히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압도적인 듯 곳곳마다 한 무리씩의 일본인 관광객들이 눈에 띈다. 흥미로운 것은 입장료의 차이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조선왕조실록》은 의당 조선인의 손으로 만들어져야하지만 국운이 기울어져갈 무렵이어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조선총독부가 이에 관여하는 바람에 상당부분이 일본의 입김에 왜곡돼 있다. 본문48권 48책과 목록 4권 4책을 합쳐 모두 52권 52책으로 구성되어 있는 《고종실록》은 1863년12월부터 1907년 7월까지 고종 재위 43년 7개월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1907년 《고종실록》 부록 편찬위원을 보면 위원장은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이며 종3위(位) 훈1등인 법학 박사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가 맡고 있으며 부위원장(副委員長)을 한국인인 이항구가 맡고 있다. 부록 편찬위원 33명 가운데 일본인은 모두 10명이다. 그 이름을 보면 다음과 같다. 경성제국대학교수 오다 쇼고(小田省吾), 감수위원 나리타 세키나이(成田碩內), 사료 수집위원 기쿠치 겐조〔菊池謙讓〕, 서무위원 스에마쓰 구마히코(末松熊彦), 서무위원 시가 노부미쓰(志賀信光), 회계 위원 사토 아키미치(佐藤明道), 감수 보조위원 에하라 요시쓰치(江原善椎), 편찬 보조위원 하마노 쇼타로(濱野鐘太郞), 편찬 보조위원 미즈바시 후쿠히코(水橋復比古)〕, 사료수집 보조위원
[우리문화신문=하와이 이윤옥 기자] 와이키키 해변의 고운 백사장에는 4월 16일(현지시각)인데도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더위 탓인지 비키니 차림의 해수욕객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기자는 와이키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하와이 최초의 이민선이 갤릭(Gaelic)호가 닿았던 선착장에 들렸다가 와이키키 쪽으로 걸어 보았다. 와이키키해변 주변 공원에서 고기를 구워먹다가 싫증이 나면 바닷물로 풍덩 뛰어들어 더위를 식히는 하와이 사람들을 바라다보면서 114년전 이민선을 타고 낯선 땅에 내려 고생길로 접어들 사탕수수 밭으로 향했을 선조들을 떠올렸다.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갤릭호에는 101명의 한인이 타고 있었는데 일본의 제지로 이민이 중단된 1905년까지 총 7,22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을 위해 건너왔다. 첫 이민선이 뜬지 2년 뒤인 1905년 4월, 여성독립운동가 황마리아 (1865~ 1937)지사도 고국 평양을 떠나 아들과 딸을 데리고 도릭선편으로 하와이 노동이민의 첫발을 내딛었다. 당시 큰딸은 19살(강혜원)이었으며 17살이었던 아들 강영승의 노동이민에 가족이 동반하는 식으로 이민 길에 나선 것이었다. 무려 한 달여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동포학생들에게 한국 문화와 통일에 대한 관심을 끌게 하기 위해 ‘통일 골든벨 퀴즈대회’를 시작했습니다. 이 행사는 2년에 한번 열리며 2007년에 시작하여 올해가 6회째입니다. 누가 문제를 더 잘맞추느냐보다는 대회 참가자들이 이 기회를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데 주목적이 있지요” 이는 어제(15일, 현지시간) 오후 2시부터 하와이 호놀루루에 있는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대강당에서 열린 ‘제6회 통일 골든벨 퀴즈대회’를 주관한 민주평화통일국민회의(이하, 민주평통) 하와이협의회 간사인 박재원 씨의 설명이다. 초등생부터 고등학생 까지 약 50여명의 동포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 등 100여명이 모인 ‘통일 골든벨 퀴즈대회’에 참석한 기자는 먼 이국땅에서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는 모습이 신선했다. 개회사는 민주평통 하와이협의회 김동균 회장이 했는데 “제6회 통일 골든벨 대회를 통해 올바른 대한민국의 역사와 자유 민주주의 통일에 대한 공감대 형성, 애국심 고취의 시간을 갖길 바란다” 고 했다. 예년에는 한번 열릴 때 5명씩 25팀이 참석하여 125명 정도가 참여하기도 했지만 올해는 특히 다음날이(4월 16일, 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이장녕(1881~1932) 선생은 충남 천안 출신으로 대한제국의 육군 부위(副尉)로 복무하던 중 군대가 해산되자 일가족을 거느리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이세영(李世永)·양성환(梁聖煥)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경학사(耕學社)의 정신을 준수하여 낮에는 개간과 농업에 종사하는 한편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19년에는 서 일(徐一)·현천묵(玄天默)·김좌진(金佐鎭)·계 화(桂和)·조성환(曺成煥)·박성태(朴性泰)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참모장 및 참모관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북로군정서에서 세운 단기속성 사관학교의 교관으로서 이범석(李範奭)·김홍국(金洪國)·최상운(崔尙雲) 등과 함께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0년 말에는 청산리독립전쟁 이후 밀산(密山)에서 3,500여명의 대병력을 거느린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 조직되자 참모장으로서 총재 서 일, 부총재 홍범도(洪範圖), 조성환 등과 함께 대일 무력항쟁을 계속하였다. 1922년 6월에 재만군사기관이 통합하여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참모로서 윤세용(尹世茸)·손병헌(孫炳憲)·오석영(吳錫永)·독고 욱(獨孤旭) 등과 함께 참모부장인 이천민(李天民)을 보
[우리문화신문= 하와이 이윤옥 기자] “전수산 할머니는 매우 활동적인 분이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로 기억하는데 저에게는 이모님이 되는 두 딸에게 한국의 민속춤과 장구 치는 법들을 가르쳐서 한인의 날 등의 행사에서 춤을 추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던 할머니는 이모와 어머니 등 여성들이 자립적으로 성장하도록 가르쳤으며 당신이 솔선수범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할머니의 독립운동은 명예나 이름을 남기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빛도 없이 음지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뛰신 할머니의 삶을 존경하며 그 후손이라는 것이 자랑습니다.” 어제 13일 (한국시각 14일) 오후 2시, 전수산 지사의 외손자인 티모시 최 (75살) 선생을 만난 것은 하와이대학 한국학연구소에서였다. 하와이로 가기 전 대담 요청을 했더니 8개월 전 허리 수술을 해서 극히 잠시 동안만 가능하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의의로 건강한 모습을 보니 기뻤다. 하와이 호눌루루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약속장소인 한국학연구소로 달려갔는데 티모시 최 선생은 지팡이를 짚은 채로 벌써 도착하여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전수산 지사님은 뭐라고 할까요? 굉장히 꼼꼼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이걸 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