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평생 한국문화 글쓰기를 고집스레 하고 있는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의 따끈따끈한 신간 《아름다운 우리문화 산책》이 인물과사상에서 4월 14일자로 출간되었다. 김영조 소장은 이미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책 《하루하루가 잔치로세, 2011》, 《키질하던 어머니는 어디 계실까?, 2012》를 인물과사상사에서 펴낸바 있으며 《하루하루가 잔치로세, 2011》는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된 바 있다. 김영조 소장의 글쓰기는 “아름다운 우리문화를 장황하지 않게 적절한 분량으로 산책하듯이, 이해하기 쉽게 쓰는 글”로 정평이 나있으며 신간 《아름다운 우리문화 산책》에도 볼거리 풍성한 맛깔스런 우리문화의 고갱이들로 그득하다. 이번 신간은 모두 8장으로 나뉘어 있으며 1장에서는 절제미와 정중동이 아름다운 우리 춤을 시작으로 ‘국악과 춤’에 관한 내용으로 이뤄져있다. 2장 그림에서는 ‘서양에는 고흐, 동양에는 최북’ 등 ‘고흐’를 뺨치는 조선시대의 화가 최북을 비롯한 우리가 알아야할 한국의 그림과 화가 등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런가 하면 3장에서는 도자기와 탈을 주제로 하여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등 유구한 도자문화를 지닌 한국의 명품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지금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 제1관에서는 ‘윤동주 100년 생애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윤동주 생애 100년이란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1917부터 올해 2017년을 세어 100년을 말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4월 6일(목) 필자는 “일본에서 부활하는 윤동주 시인 -부제: 일본인들은 어떻게 윤동주 시인을 추모하는가?-”란 제목으로 특강을 했다. 필자는 윤동주가 태어난 북간도 명동촌을 시작으로 하여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그리고 하숙하던 종로 누상동 집터와 인왕산 수성동 계곡을 둘러본바 있다. 또한 일본 도쿄의 릿쿄대학과 교토 도시샤대학 그리고 다카하라 하숙집터를 찾아갔으며 27살의 나이로 순국한 후쿠오카 형무소까지 그의 발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그의 작은 흔적이라도 놓치지 않으려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 가운데는 일찍부터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를 좇아 그의 불꽃같은 삶을 기리는 사람들이 있다. 평범한 주부에서 윤동주 시에 반해 평생을 윤동주 연구에 바치고 있는 야나기하라 야스코 씨를 비롯하여 북간도 용정에서 윤동주의 무덤을 찾아내고 그의 문학성을 널리 알리고 있는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학 교수. 그리고 1990년 일본 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내 유년시절엔 ‘국화’라고 하면 가을이었고, ‘토마토’라고 하면 여름이 제격이라고 여겼습니다만, 요즈음은 비닐하우스가 잔뜩 생겨 꽃이든 야채든 과일이든 연중 어느 때라도 재배되고 있습니다. 또한, 도로를 만들고 건설을 하느라 강이나 논을 메우고 산림을 훼손하고 나니 새들의 소리도 멀어지고 나무의 녹음도 볼 수 없어 그때그때의 정취도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홋카이도 출신 작가 이시모리 노부오(石森延男, 1897~1987) 씨는 <일본인의 계절감>이란 수필에서 이렇게 썼다. 그의 집 울타리는 낙엽송으로 되어있었는데 키가 4미터나 되는 거대한 낙엽송이 20미터나 길게 늘어서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가까스로 눈이 사라지고 봄이 찾아오면 낙엽송 산울타리도 동그랗고 자그마한 순을 틔웁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순에서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무심코 낙엽송의 순을 따서 냄새를 맡으면 강렬한 냄새가 퍼져 콧속을 간질거립니다. 나는 봄을 확인하기 위해 순 몇 개를 따서 손바닥에 비벼보곤 했는데 이렇게 낙엽송의 순 냄새를 맡는 것은 나 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그는 어느 날, 아버지와 들녘을 산책하게 되는데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이상정지사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지은 시인 이상화의 형으로 경상북도 대구 출신이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일하면서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에서 육영사업을 하며 독립운동에 가담, 활동하였다. 1926년부터 1927년까지는 동만주(東滿洲)에서 중국 풍옥상(馮玉祥)의 서북국민부대(西北國民部隊)에서 준장급 참모(准將級參謀)로 활약하였으며, 장개석의 부대와 통합됨에 따라 국민정부(國民政府) 정규군 소장(少將)으로 항일전선에서 활동하였다. 1932년 무렵에는 남창(南昌) 항공협진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1936년에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하자 중경(重慶)에 있는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중국 육군 참모학교의 교관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1939년 4월에는 민족전선통일을 기하기 위한 청년호성사(靑年呼聲社)를 조직하고 이건우(李健宇)와 함께 잡지 청년호성(靑年呼聲)을 창간하였다. 또한 1940년 9월에 광복군(光復軍) 창설을 적극 지원하였다. 1941년 10월에는 임시의정원 경상도의원에 다시 선출되었으며, 1942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가운데 어제(31일) 오후 2시, 동대문구 신내동에 살고 계시는 생존 독립운동가 유순희 애국지사를 찾아뵈었다. 올해 92살의 유순희 애국지사는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지만 흔쾌히 기자의 방문을 허락해 주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유순희 애국지사를 찾아뵈려고 했던 것은 5년 전부터 지만 그때마다 몸이 안좋으시다고 집에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허락지 않으셔서 줄곧 찾아뵙지 못하다가 어제 간신히 뵙게 된 것이라 기자는 더욱 기뻤다. 어제 유순희 지사님을 함께 찾아 뵌 분은 생존 독립운동가이신 오희옥(92살) 지사님 이었다. 오희옥 지사님과 유순희 지사님은 서로 왕래를 하시던 터였지만 몇 해 전부터는 유순희 지사님의 건강이 날로 안 좋아 번번이 방문 계획이 취소되곤 했던 것이다. 수원에 사시는 오희옥 지사님을 모시고 서울의 끝자락 동대문구 신내동에 살고 계시는 유순희 지사님 댁을 찾아 나선 길은 메마른 대지 위에 촉촉한 봄비가 내리고 있었고 아파트 주변에 심은 산수유 꽃이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황해도 황주 출신인 유순희 지사는 광복군 제3지대에 제1구대 본부 구호대원(救護隊員)으로 광복이 될 때까지 활동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가는 봄이여 / 새는 울고 / 물고기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이는 일본의 하이카이(俳諧, 5.7.5조로 이뤄진 일본의 정형시) 시인 마츠오 바쇼(松尾 芭蕉, 1644~1694)가 방랑의 길에 나설 때 도쿄를 떠나며 부른 노래다. 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바쇼의 시 속에는 봄을 노래하던 새들도 울고, 심지어는 물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던 물고기들조차 가는 봄이 아쉬워 눈물을 흘린다. 이 노래는 가는 봄의 아쉬움과 함께 자신이 몸담고 있던 도쿄를 떠나는 아쉬움을 담고 있는 노래로 알려져 있다. 하이카이의 시성(詩聖), 하이카이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마츠오 바쇼의 유명한 시 몇 편을 다시 감상해보자. “오랜 연못에 / 개구리 뛰어드는 / 물 텀벙 소리 한적하구나 / 바위에 스며드는 / 매미소리 말을 하려니 / 입술이 시리구나 / 가을 찬바람 잿속 화롯불 / 사그라들고 / 눈물 끓는 소리“ 5.7.5(일본어 기준)라는 글자 수를 맞춘 극히 절제된 노래 하이카이지만 간결함 속에서 계절이 주는 정서라든가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그 어떤 이미지가 군더더기 없이 나름대로 잘 전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츠오 바쇼는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한국인은 일제로부터 국권을 빼앗긴 이후에 동북으로 망명하여 조국독립을 기필코 이룩해야 겠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중국인들 못지 않게 일제의 만몽침략에 맞서 결사적으로 항쟁하고 있습니다.(중간줄임)만몽침략주구배(보민회, 선인조합, 동아보민회, 선민부, 신민공소 등)들을 소멸하지 않으면 그 위해성은 엄청날 것입니다. 때문에 한, 중(韓中) 각계 인사들은 주구배들을 박멸함으로써 안동성(安東省)의 치안과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할 것이다." 이는 독립투사 이진무(李振武,1900. ~1934. 5. 18) 선생이 '국민부에서 중국관원 및 동포들에게 고하는 글에서(1930년 10월)' 에서 한 말이다. 이진무 선생은 1919년 광복군총영에 가입한뒤 무장항일투쟁을 벌였으며 1925년에는 정의부원으로 일경처단 및 군자금 모금활동(일명 흑선풍) 등을 하다가 잡혀 34살의 젊은 나이에 1934년 평양형무소에서 순국의 길을 걸었다. 평북 정주(定州) 에서 태어난 선생은 3·1독립운동 직후에 만주로 망명하여 광복군총영에 가담하였다. 1920년 8월 15일 중대사명을 띠고 국내에 들어와 신의주역과 신의주에 있는 호텔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부산이라던가 대구를 영어로 표기할 때 과거에는 PUSAN, TAEGU 였지만 지금은 BUSAN과DAEGU로 쓰고 있다. 이러한 것을 ‘로마자표기법’이라고 하는데 로마자표기법은 불변의 표기법이 아닌지라 PUSAN이 BUSAN처럼 바뀌는 것처럼 한국어에서 로마자표기법에 관한 논의는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에 대해 3월 21일 마이니치(毎日新聞)에서는 일본어 로마자 표기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는데 정부가 2020년부터 실시할 예정인 ‘학습지도요령개정’에서 초등학생의 로마자교육을 강화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하자 일선에서 “로마자표기 혼란, 교사들 단일화 요구”라는 제목을 달았다. 2020년부터 강화되는 로마자표기가 무엇이기에 교사들이 혼란을 호소하는 것일까? 일본의 로마자 표기는 훈령식(訓令式)과 헤본식(ヘボン式) 두 종류가 있다. 헤본식이란 미국인 제임스 커티스 헵번(James Curtis Hepburn, 1815~1911)이 일본에 선교사로 와서 일본문자의 로마자화를 고안한 사람으로 이를 가리켜 헤본식이라고 부른다. 훈령식(訓令式)은 명치(明治) 때 일본인 학자들이 만든 로마자 표기다.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제가 아프리카 짐바브웨로 떠난 것이 33살 때로 제 나이 올해 65살이니 벌서 31년째 입니다. 그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였어요. 밥말리(Bob Marley, 1945~1981)라는 자메이카 가수의 1979년 일본 공연을 보고 아프리카로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지요. 처음에는 밥말리의 고향인 자메이카에 가려고생각했으나 결국은 짐바브웨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를 사랑하여 올해 31년째 그곳에서 봉사의 삶을 살고 있는 다카하시 도모코 (高橋朋子, 재너글아트센터 대표) 씨는 기자와의 대담 첫머리에 아프리카로 떠나게 된 계기를 이렇게 말했다. 다카하시 씨는 짐바브웨 어린이 공연단을 이끌고 6월의 일본 공연 준비차 도쿄로 가기 전 잠시 한국에 들러 지난 13일(월) 인천관동갤러리에서 기자와 만났다. “33살의 과년한 딸이 아프리카로 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반대를 안했나요?” 기자의 질문에 다카하시 씨는 웃으며,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의 반대는 특별히 없었다고 했다. 그 대신 자메이카 가수 밥말리의 일본 공연 뒤 ‘아프리카로 떠나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27살 때부터 무려 6년간을 구두쇠처럼 절약했다고 했다. 한 푼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저는 윤 시인님의 시를 사랑하는 일본인 입니다. 어렸을 때 윤 시인님의 주옥 같은 시를 만나고 난 뒤부터 윤 시인님의 시를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윤 시인님의 한국어 시를 일본어로 번역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열심히 한국어 공부를 한 것이 어언 40여 년에 이릅니다. 그로부터 윤 시인님의 시 번역을 제 평생의 과제로 삼아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윤 윤동주 시인님! 저에게 번역은 자기 자신의 시를 창작하는 것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윤 시인님의 시를 일본어로 수준 높은 완성된 변역 시로 만드는 작업은 원시(原詩)에 대한 겸허한 자세이며, 또 그래야만 윤 시인님을 낳은 나라의 문화와 민족에 대한 존경을 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100년의 세월이란 꽤나 먼 느낌이지만 그래도 저는 윤 시인의 작품을 늘 곁에 두고 살아서인지 시공(時空)을 뛰어 넘어 윤 시인님이 항상 곁에 있는 듯 가깝게 느끼고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윤동주 시인님 기뻐해 주십시오. 제가 그토록 원했던 윤 시인님 시를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