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오모리(青森)의 여름 행사로 유명한 네부타 마츠리 안내문이 인천관동갤러리에 도착했다. ‘아오모리 코리아 넷과 즐기는 네부타 축제’라는 제목의 한글판 안내문에는 “이번 행사는 한국을 사랑하는 아오모리 코리아 넷이 주축이 되어 한국인들의 아오모리 방문을 도와드립니다. 아오모리 코리아 넷은 한국어 공부, 영화 감상, 한국요리 배우기 등 현지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민간단체” 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아오모리의 네부타 마츠리 기간에 특별히 한국인들을 안내해 준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해마다 8월 2일부터 7일까지 6일 동안 아오모리 시내에서 열리는 네부타 마츠리는 센다이(仙台)의 칠석마츠리, 아키타(秋田)의 칸토(竿灯) 마츠리와 함께 일본 동북 지방의 3대 마츠리로 꼽힌다. 특히 아오모리의 네부타 마츠리는 6일 동안 관광객 수가 무려 300만 명이 몰려들 정도로 인기가 있어 비행기표도 동이 나고 숙박도 잡기 어려운 탓에 3월부터 숙박을 확보해야할 정도이다. 아오모리의 네부타 마츠리 특징은 한밤중에 형형색색의 대형 등롱(燈籠)인형이 거리를 행진한다는 점이다. 이 인형들의 모습이 관람객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드는데 긴 칼을 입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그제(9일) 인천의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시실(3월7일-4월16일)에서 열리고 있는 ‘문학관의 새롭고 오래된 식구 <新수장자료전>’을 문학인들과 둘러보았다. 2017년 들어 첫 기획전시로 열고 있는 이번 전시회는 이인직 《혈의누, 1908》, 이광수 《사랑, 1938》, 이해조 《자유종, 1910》 등의 근대문학 작품과 <학지광, 6호> 같은 잡지의 실물 그리고 신문소설 스크랩 등 희귀한 근대문학 원본 자료 30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근대개항기 창고로 쓰던 건물을 수리(2013년 9월 개관)하여 쓰고 있는 전시실이라 그런지 천정이 넓고 탁 트인 공간에 전시된 전시물들은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이 아니라도 당시의 문학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아쉬운 점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특히 이번 전시물들의 작품 연대가 일제강점기라 그런지 현재의 표기를 따르지 않아 이해하기 어려운 책 제목을 그대로 표기하고 있는 점이 아쉬웠는데 장지연 번역의 <애급근세사, 1905>, 현 채 번역의 <법란서신사, 1908> 등이 그러하다. 애급이란 현대말로 ‘이집트’요, 법란이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오기노 긴코(萩野吟子, 1851-1913)는 일본의 의사 국가자격 시험에 합격한 최초의 여의사다.오기노 긴코가 여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는 임질(淋疾) 때문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임질은 “임균이 일으키는 성병. 주로 성교로 옮아 요도 점막에 침입하며, 오줌을 눌 때 요도가 몹시 가렵거나 따끔거리고 고름이 심하게 난다. 여자는 동시에 방광염을 일으키며 내부 생식 기관에 염증을 일으키고 불임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풀이하고 있다. 오기노 긴코는 16살에 부잣집인 명주(名主, 묘슈) 집안의 장남과 결혼하지만 결혼 뒤 얼마 안 되어서 심한 임질에 걸려 이혼에 이른다. 지금 같으면 임질로 이혼을 할까 싶지만 당시는 부잣집 며느리로서 아마도 임신과 출산에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예상되어 이혼을 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기노 긴코는 이혼 뒤 도쿄로 나와 순천당의원에 입원하여 부인과 치료를 받게 되는데 당시 의사는 모두 남자뿐이었다. 임질 치료를 위해 하반신을 남자의사에게 보이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라 오기노 긴코는 여자의사가 되어 자신과 같은 처지의 여성들을 치료해주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여의사의 길은 생각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마스이산(增位山) 즈이간지(隨願寺, 수원사)는 하리마 천태6산(播磨 天台六山)의 한 절로 사전(寺傳)에 따르면 고구려 혜편(惠便, 에벤)스님이 개기(開基, 불교용어로 개산‘開山’과 같은 뜻으로 쓰이며 창건을 뜻함)) 절로 알려져 있다. 덴표연간(天平年間, 729-749)에 교키(行基)스님이 중흥했으며 원래는 법상종이었으나 덴쵸10년(天長, 833년) 닌묘천황(仁明天皇)의 칙명으로 천태종으로 개종하였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92)에는 가람이 정비되어 36개의 암자가 있을 정도로 큰 절이었다.(뒷줄임)” 이는 즈이간지(隨願寺) 경내에 절의 유래를 적어 놓은 안내판에 있는 내용 가운데 일부다. 고구려 혜편스님의 발자취를 찾아 효고현에 있는 즈이간지(隨願寺)에 도착한 것은 지난 2월 15일 오후 4시 무렵이었다. 오사카역에서 오전부터 서둘러 신칸센을 타고 히메지역에 도착한 뒤 숙소에 짐을 풀고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타고 즈이간지(隨願寺) 입구에 내리니 산중이라 그런지 짧은 겨울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즈이간지(隨願寺)는 히메지역에서 꽤 멉니다. 버스도 드문데다가 버스를 타도 산길로 30분은 걸어가셔야합니다.” 라고 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이는 65살의 나이에 폭탄 의거로 순국의 길을 걸은 강우규(1855-1920) 의사가 사형 집행을 앞두고 남긴 말이다. 나라를 빼앗은 흉악한 일제에 온몸으로 저항한 것이야말로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한 것이지만 강우규 의사는 겸손하게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청년들의 교육’을 걱정했다. 그러한 강우규 의사의 숭고한 나라사랑 실천 행동 뒤에는 탁명숙(1900-1972)이라는 여성독립운동가가 있었지만 이를 아는 이는 드물다. 그런가하면 핏덩이 갓난아기를 남겨두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박치은(1886-1954)애국지사도 있다. 박치은 애국지사는 남편 곽치문(1882-1922)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 감옥에 들어갔는데 핏덩이 갓난아기를 둔 몸이었다. 철창 밖에서 젖이 먹고 싶어 우는 아기를 일제는 끝내 면회시켜주지 않아 눈앞에서 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3월 3일은 여자아이가 있는 집안의 잔칫날인 “히나마츠리(ひな祭り)” 날이다. 히나마츠리를 “모모노셋쿠(桃の節句)” 곧 “복숭아꽃 잔치”라고도 부른다. 이는 복숭아꽃이 필 무렵의 행사를 뜻하는 것으로 예전에 음력으로 3월 3일 날을 잔치로 잡을 때 유래한 말이다. 히나마츠리는 여자아이가 있는 집안에서 히나인형을 장식하여 그 아이가 건강하게 행복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뜻에서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92)부터 해오던 풍습이다. 이러한 헤이안시대로부터 유래하는 잔치로는 히나마츠리를 포함하여 5개의 잔치(五節句)가 있는데 1월 7일의 나나쿠사가유(七草がゆ)라고 해서 7가지 채소로 죽을 쑤어 먹는 행사, 3월 3일의 히나마츠리, 5월 5일의 단오(남자아이들의 성장을 기원하는 행사), 7월 7일의 칠석, 그리고 9월 9일의 중양절(重陽)이 그것이다. 히나인형은 3월 3일 이전에 장식해 두었다가 3월 3일을 넘기지 않고 치우는 게 보통이다. 따라서 히나인형 판매의 절정은 2월 한 달이다. 이때 일본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일본 전국에 걸쳐 크고 작은 히나인형 판매 경쟁을 보게 된다. 히나인형은 가지고 노는 인형이 아니라 집안에 장식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꽃샘바람이 아직 옷깃을 여미게 하는 가운데 어제(27일) 늦은 3시, 서울교육박물관(정독도서관 내)에서는 ‘신여성 김란사 -시대를 앞서간 여성의 위대한 이야기-’라는 제목의 아주 특별한 전시회 개막식이 있었다. 김란사(金蘭史, 1872~1919, 그간 남편 성을 따라 하란사(河蘭史)로 부름)란 이름이 다소 생소하게 들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란사는 당시로는 드문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한국 최초의 문학사 학위를 받았을 뿐 아니라 이화학당 교사 시절 유관순에게 ‘조선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다오.’라며 민족혼을 심어준 인물이다. 특히 미국 유학에서 갈고 닦은 영어 실력과 이화학당에서 보여준 민족교육 활동 등이 인정되어 고종황제로부터 1919년 6월 파리강화회의(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위하여 승전국들이 파리에서 개최한 강화 회의로 전쟁에 대한 책임과 영토 조정,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 등을 협의함)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 승인’을 받아오도록 명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1919년 1월21일 일제의 독살로 알려진 고종의 갑작스런 승하가 있었고 이어4월김란사 역시 북경에서 독살로 의심되는 죽음을 당하게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그림들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각인되었습니다. 한국어로 쓴 시이기에 의미를 알기는 어렵지만 그림 하나하나가 말해주는 무언의 목소리를 들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한국화의 강렬한 색채로 그려낸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이미지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귀국해서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해 공부해볼 생각입니다.” 오오사토 히로아키 (大里浩秋, 일본 가나가와대학 명예교수) 교수의 ‘불굴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 33인 시화전’을 둘러본 소감은 간략했으나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전시회’를 본 소감치고는 정확하게 본 듯하다. 오오사토 교수는 전날인 22일 인천대학교에서 열린 ‘중국관행연구포럼’에서 <일본 외국인 거류지 연구회의 활동>을 알리기 위해 방한했으며 짬을 내어 인천관동갤러리에서 열고 있는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어제(24일, 금요일)부터 인천관동갤러리(관장 도다 이쿠코)에서는 제98주년 3·1절 기념 “불굴의 여성독립운동가 33인 시화전” 이 한 달간 예정으로 전시에 들어갔다. 시화전이나 그림전에서 흔히 하는 ‘개막식’ 같은 행사 없이 조촐하게 ‘불굴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를 그린 그림 33점이 갤러리에 걸렸다. 개막식이라고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권병덕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분으로 충청북도 청주 사람이며, 천도교인이다.18세에 동학교도가 되고,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 때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6만명의 교도를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하여 진압 당한 후 전국 각처를 방랑하였다. 1908년(융희 2)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이에 입교하여 전제관장(典制觀長)·이문관장대리(理文觀長代理)·금융관장(金融觀長)·보문관장(普文觀長)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 25일경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해 상경한 그는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을 만나, 3·1독립만세운동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이 달 27일 최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 등의 동지와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을 올리고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泰華館)에서 민족대표 33인으로 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이 분이 바로 고구려 에벤(惠便, 혜변)스님이십니다.” 보물관 담당자의 안내를 받아 들어서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편안한 자세로 지긋이 눈을 감고 있는 아담한 모습의 목상(木像)이 눈앞에 들어왔다. 햇살이 제법 따스한 2월 16일(목) 오전 가쿠린지 보물관에서 마주한 고구려 에벤스님은 입을 약간 벌려 반가움을 표하는 듯 했다. 효고현(兵庫縣) 천년고찰 가쿠린지(鶴林寺, 학림사) 보물관은원래는 촬영금지지만 고구려 승려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는 명함을 내밀자 ‘먼 곳에서 오셨는데 특별히 허락하겠습니다’라는 말을 건네며 호리가와겐조(堀川憲三) 담당자는 기자에게 보물관을 안내했다. 보물관에는 에벤스님 외에도 백제계 교키(行基, 행기, 668-749)스님의 좌상도 나란히 모셔져 있었는데 일본인이라면 에벤스님은 몰라도 교키스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교키스님은 나라시대(奈良時代) 전국에 저수지와 우물을 파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핀 고승대덕이다. 일본의 불교는 《일본서기》 기록대로 백제 성왕 때 일본에 전해진 것(일본서기에는 552년이지만 원흥사 자료에는 538년으로 나와 있어 현재는 538년 설을 따름)이지만맨 처음 전해진 곳은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