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는 남궁 억(1863~1939)선생이 1907년 4월 20일 종로 ymca 강당에서 한 「생존경쟁(生存競爭)」이라는 제목의 연설문의 한토막이다. 선생은 강원도 홍천 출신으로 1884년에 영어학교인 동문학(同文學)을 수료하고 서울 총해관(總海關)의 견습생으로 있다가 1886년에 내부 주사(主事)가 되고, 1887년에 전권대신 조민희(趙民熙)의 수행서기관으로 영국,러시아,독일의 순방 길에 올라 홍콩까지 갔으나 청국정부의 간섭과 방해로 2년간 홍콩에 체재하다가 소환되어 돌아왔다. 1889년에는 칠곡부사(漆谷府使)를 역임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내각이 수립되자 승진하여 1893년에 내부 토목국장으로 임명되어 종로와 정동 일대 및 육조(六曺) 앞 남대문 사이의 도로를 정비하는 동시에 파고다공원을 세웠다.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이후에는 관직을 사임하고, 1896년 7월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여 중앙위원?서기?사법위원?평의원 등에 선출되었으며 최
[우리문화신문= 스리랑카 골 이윤옥 기자] 인도양의 저녁놀이 아름다운 스리랑카 최남단 골(Dutch Fort At Galle)은 여느 바다와 같아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식민의 뼈아픈 역사를 경험한 나라 사람들에게는 그러하다.이곳은 지금 관광객들이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며 아름다운 해변을 산책하지만 17세기 식민지시대의 아픔이 남아 있는 곳이다. 콜롬보에서 173km 떨어진 항구 도시 골은 17세기에네덜란드가 해안가를 따라 거대한 장벽을 쌓아 요새를 만든 곳이다. 요새 안쪽에는 당시네덜란드식 집들이 거대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15세기 포르투칼에 이은네덜란드통치에 이은 영국 식민지 까지 근 500년을 식민의 역사에 시달린 스리랑카의 역사는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그 식민의 흔적은 관광자원화 되어 21세기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불교 유적을 찾아 떠난 9일간의 스리랑카 여행의 마지막 코스인 골해변을 걸으며 오늘도 어김없이 뜨고 지는 태양만이 유일한 불변의 ‘그 무엇’ 임을 느낀다. 1948년 영국으로 독립 뒤 또 다시 30년 내전으로 만신창이가 된 스리랑카가 전쟁 종식을 맞이한 것은 2009년의 일이다. 그 아픔의 상처를 걷어내고 또 다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에 왔다. 오사카와 교토를 거쳐 도쿄 등 각지를 돌아보았다. 맨 처음 시모노세키에서 내렸을 때 일본에 대한 첫 인상은 한마디로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근사한 건물과 멋진 복장의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그러나 인력거를 끄는 사람들을 보면서 일본이 빈부의 차가 심하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이런 모습을 보니 일본은 강하지 않고 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자신감이 들었다. 특히 교토는 멋진 도시였지만 거지가 많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도일 전까지 ‘일본은 얼마나 부강한 나라일까?’라는 생각을 했으나 실제 거지가 많은 것을 보고 ‘이것이 일본인가? 이러한 일본이 조선에 와서 그렇게 허세를 부린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동정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가난한 자들은 압박 속에 살고 있었다.” 이 글은 도쿄 고려박물관 관장인 히구치 유이치(樋口雄一) 씨가 쓴 《김천해 - 재일조선인 사회운동가의 생애(金天海-在日朝鮮人社會運動家の生涯), 2014》에 나오는 이야기로 특히 위 인용 부분은 김천해의 자전적인 기록 부분이다. 김천해(본명 김학의)는 1898년 울산 방어진에서 태어나 2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여성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 어느 날, 저는 빛바랜 책 한권과 만났습니다. ‘여류독립운동가의 수기’로 안내된 책의 표지에는 『두 감나무 고목에 활짝 핀 무궁화』 제목이 굵은 글씨로 적혀 있었지요. 떨리는 손으로 첫 장을 펼치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시선이 고정되었지요. 그 때가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펼쳐든 첫 페이지의 인사말씀에는 선생님이 24살에 신사참배 문제로 교사생활을 그만두었던 내용과 25살 때부터 형무소를 전전하며 감내해야 했던 옥고 생활의 이야기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선생님을 만날 목적으로 마산을 찾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산경남지역 여성독립운동가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부산 일신여학교에서 수학하며 신교육을 받았던 여성들의 다수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흔적을 쫓아가다보니 일신여학교 출신으로 마산의 신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던 김두석 선생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은 신사참배를 강하게 거부했던 교사로 지역 학생들에게 의로움이 무엇인가를 각인시켰던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일본경찰이 주시하는 자리
[우리문화신문=스리랑카 콜롬보 이윤옥 기자] “스드웰라 지역은 스리랑카 내전 때 북쪽 지역에서 피난 왔던 주민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한국으로 말하자면 해방촌쯤으로 달동네 빈민가이지요. 생활도 열악할 뿐 아니라 교육의 기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어 제가 유치원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중고 물품들을 지원 받아 아이들에게 나눠주어 그럭저럭 꾸려가고 있지만 아직 유치원 건물 공사도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와치싸라 스님은 스리랑카의 유치원을 찾은 기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와치싸라(Welanhinne Wachissara Nayaka Thero)스님이 건네준 명함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외국인 상담법사, 재한 스리랑카 국가지도법사, 조계사부설 이주민센터 마하보디사 주지라는 직함이 한글로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와치싸라 스님은 경기도 양주시에 스리랑카 이주민들을 위한 마하보디절을 운영하면서 13년 전부터 이곳 스리랑카 빈민촌의 어린이들을 위한 유치원을 만들어 어린이 교육을 돕고 있다. 유치원이 있는 스드웰라 지역은 콜롬보에서 남쪽으로 4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스리랑카가 영국으로부터 1948년 독립된 이래 북부의 타밀족과의 30년 내전 때 북쪽에서 피난 온
[우리문화신문=스리랑카 담바라 이윤옥 기자] 담바라(Cave Temples of Dambulla)에는 거대한 동굴사원이 있다. 기원전 1세기 남인도 타밀족의 공격을 받을 당시의 왕은 이 거대한 동굴로 몸을 피했다. 그러다가 왕권을 다시 찾은 왕은 부처님의 가피를 잊지 않고 이곳 담바라 동굴에 장엄한 사원을 지은 것이다. 담바라는 수도 콜롬보에서 148km 떨어진 곳이지만 기자 일행은 부처님이 두 번째 방문한 스리랑카 최북단 자푸나로부터 중간 중간의 유적지를 순례하면서 담바라로 이동하는 바람에 콜롬보를 떠난 나흘만에야 어제(4일) 담바라에 도착했다. 담바라 역시 30도를 오르내리는 찜통더위였지만 나무 그늘에 서면 제법 바람이 불어 시원했다. 담바라에는 모두 5개의 크고 작은 동굴사원이 있는 데 가장 큰 동굴은 제2동굴로 길이 50미터, 높이 7미터, 깊이 25미터로 동굴사원에 들어서면 끝이 아득할 정도로 넓다. 이 거대한 동굴사원에는 벽마다 부처님의 일생을 그린 벽화가 빼곡하고 동굴 속에는 무려 56개의 불상들이 누워있거나(와불), 앉아있거나(좌상), 서있는 모습(입상)으로 가득하여 참배객들의 눈을 휘둥그레 만든다. 규모로 보면 중국 감숙성의 둔황 석굴이나
[우리문화신문=스리랑카 자푸나 이윤옥 기자] 섭씨30도를 오르내리는 속에 부처님 두 번째 방문지인 나거디바(NAGADEEPA)로 가기 위해 자푸나(JAFFNA)에서 1박을 하고 아침 8시 나거디바로 향했다. 나거디바는 스리랑카 최북단으로 남쪽 콜롬보로부터 승용차로 6시간은 달려야 다다르는 곳이다. 아직 고속도로가 없어 2차선 국도로 달리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려서 그런지 나거디바는 관광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곳이지만 부처님이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8년 만에 다시 스리랑카를 찾은 두 번째 성지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9달 만에 인도 부다가야에서 스리랑카 마히양거나(Mahiyangana)로 온 것이 첫 번째 방문이고 이후 8년이 지나 다시 이곳 나거디바로 오셨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왕좌(王座)를 놓고 마호다라(형)와 추호다라(동생)가 싸우고 있었는데 이를 해결해주기 위해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이었다. 결국 이들 형제는 부처님의 설법에 감명을 받아 왕좌(王座)를 버리고 부처님께 귀의하게 된다. 왕좌 때문에 다툼이 일어난 것을 반성하는 뜻에서 왕의 의자를 부처님께 보시하는 모습이 나거디바 사원 법당에는 그림으로 남아 있다. 자푸나에서 이곳 나거디바를
[우리문화신문= 스리랑카 아브하야기리 이윤옥 기자] 사리탑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는 스리랑카는 어디를 가나 피라미드 같은 거대한 사리탑을 만날 수 있다. 고도(古都) 아부하야기리(Abhayagiri)를 찾은 것은 어제 2일(목)이었다. 그제 부처님이 첫발을 내디딘 마히양거나(Mahiyangana)를 출발하여 이곳 아부하야기리에서는 템플스테이를 했다. 계속해서 지방도시를 다니다보니 호텔 시설이 썩 좋지 않은데 견주어 규모가 큰 절들은 호텔보다 나은 시설을 갖추고 있다. 지방도시의 호텔이란 우리나라 80년대 모텔 수준 정도이다. 초기 사원이 집중되어 있는 고도라서 인지 곳곳에 사리탑이 즐비하다. 기원전 3세기 무렵의 사리탑의 규모는 보통 현대건축물의 20층 정도로 탑 아래서 올려다보면 탑 상륜부가 보일듯 말듯할 정도로 그 규모에 압도당하고 만다. 강력한 왕권의 보호아래 있었던 불교는 누가 더 높은 탑을 쌓는지를 경쟁이라도 하듯 탑과 절의 규모를 확장해갔다. 기원전 3세기 일이니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되기 약 700년 전 일이다. 스리랑카에 사리탑이 많은 까닭은 부처님 열반 뒤에 인도에서 흰두교가 성행한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부처님 열반 뒤에 인도 각지
[우리문화신문=스리랑카 폴론나루와 이윤옥 기자] “스리랑카에 부처님이 첫 발걸음을 하신 것은 인도의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고 난 뒤 아홉 달 만의 일입니다. 2500여 년 전 당시 인도와 스리랑카는 지금처럼 바닷길을 건너야하는 육지와 섬이 아니라 하나의 대륙이었지요. 현재도 인도와 스리랑카의 가장 가까운 거리는 22킬로밖에 안됩니다. 당시 부처님은 남인도 타밀족(Tamil族)과의 전쟁을 해결하기 위해 이곳에 오셨지요. 이후 두 번째 방문은 8년 뒤의 일입니다.” 어제(2월 1일) 아침에 찾은 마히양거나(Mahiyangana) 사원의 주지 남므라타나 스님은 기자에게 이 사원의 유래를 그렇게 말했다. 그제(1월 31일) 밤 캔디의 불치사(佛齒寺)를 들려오느라 밤늦게 마히양거나 사원에 도착한 기자 일행은 밤 8시가 다되어 주지스님을 잠깐 뵙고 다시 이튿날인 어제 정식으로 찾아뵌 것이었다. 남므라타나 스님 말대로라면 이 절은 2531년(올해 불기)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절이다. 부처님이 인도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뒤 1년이 채 안된 9달 뒤에 스리랑카의 이곳 마히양거나를 찾은 기념으로 생긴 이 절의 역사는 곧 부처님의 역사 그 자체이건만 스리랑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배우는데 나이의 많고 적음이란 없다.” 일본 고대사학계의 거목인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1927-2016) 교수는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세네카의 말을 빌려 생의 마지막 책 《고대사연구 70년의 배경(古代史硏究の70年の背景)》 머리말에 그렇게 썼다. 70년간 고대사 연구에 힘을 쏟은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는 평생 82권의 고대사 관련 책을 집필했다. 1956년 《신화의 세계(神話の世界)》를 시작으로 《고대사연구 70년의 배경(古代史硏究の70年の背景)》 까지다. 그를 주목해야하는 것은 그의 연구가 전시대 학자들과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백제와 일본 왕실의 혈연관계 등 한일 고대사 연구에 평생을 바쳤던 우에다 교수의 시각은 그러나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없는 사실을 연구한 게 아니라 기존의 연구자들이 “일본의 모든 고대사는 중국에서 유래”라는 기존의 틀을 깬 것이기에 의미 있고 어쩌면 용감한 연구였다고 할 수 있다. 지난 1월 초순 필자는 와세다대학 서점에서 이 한권의 책 《고대사연구 70년의 배경(古代史硏究の70年の背景)》을 만났다. 우에다 교수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쓴 책이다. 필자는 우에다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