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스리랑카 캔디 이윤옥 기자] “스리랑카인들은 부처님의 소중한 치아사리를 인도로부터 목숨을 걸고 이곳 불치사로 가져왔습니다. 스리랑카인에게 치아사리는 곧 부처님을 뜻하는 것으로 스리랑카는 16세기부터 포르투칼, 네덜란드, 영국으로부터 각각 식민통치를 받는 동안 승려 한명 남지 않는 대법난을 겪게 됩니다만 이 치아사리만큼은 목숨처럼 지켜왔습니다. 말하자면 이곳에 모신 치아사리는 스리랑카 불교 그 자체요,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부처님의 법등(法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와치싸라 스님은 유창한 한국말로 스리랑카 불교 역사를 기자에게 설명해주었다. 스님은 콜롬보에서 165킬로미터 떨어진 캔디지역에 자리한 불치사(佛齒寺, Sri Dalada Maligawa)로 이동하는 3시간 여 동안 스리랑카 불교 역사에 대해 소상한 설명을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 불치사에 도착해서도 스리랑카의 불교 강의(?)는 이어졌다. 와치싸라 스님으로부터 수많은 설명을 들었지만 기자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식민시대의 불교 말살” 이야기였다. 동병상린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이르는 것이리라. 떠올리기도 싫은 일제의 침략역사를 겪은 우리에게 스리랑카의 외세 침략의 역사를 구태
[우리문화신문=스리랑카 콜롬보 이윤옥 기자] 한국의 날씨와는 정 반대인 섭씨 28도의 무더운 폭염이 내리쬐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 잠시 동안이지만 굵은 빗줄기 덕에 더위가 누그러진 느낌이다. 19세기에 지어진 콜롬보 시내의 강가라마야 사원은 거대한 불교 박물관 같아보였다. 콜롬보의 베일라 호숫가에 자리 잡고 있는 강가라마야(Gangaraya Temple) 사원의 "강가라마야"란 "물을 다스리는 임금"이란 뜻으로 1885년 스리랑카 불교 재건운동을 이끈 '히카두웨 스리 나카야' 스님이 세웠는데 당시 꺼져가던 불교를 되살리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한국의 조계사 같은 곳이라고 보면 됩니다.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것이 그러하고 또한 신도 아니라도 수많은 관광객들도 찾는 곳이기때문이지요” 와치싸라 스님의 말마따나 강가라마 사원은 콜롬보 시내에 있는 규모가 큰절로 기자가 찾은 어제(30일)에도 찾는 이들이 많았다. 규모가 크다고 해서 공간이 넓은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조계사가 그러하듯이 비좁은 공간이지만 서울 시내에 접근성이 좋은 곳에 자리하여 한국 불교의 상징적인 곳으로 통하는 조계사처럼 보였다. 단지 조계사와 다른 점은 주변에 인사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저는 올해 65살입니다만 솔직히 일본의 조선침략 역사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지인의 권유에 끌려 이번 강연에 참석했습니다만 오길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침략에 굴하지 않고 온몸으로 저항하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쓴 한국의 여성독립운동가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 사이타마현, 코바야시 레이코- “어느 정도 침략의 역사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만 일본의 역사교과서에서는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라나는 학생들이지요. 그나마 고려박물관에서 조선침략에 관한 상설전시와 강연을 자주 열어 역사 공부겸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번 강연을 통해 항일여성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을 상세히 알게되어 기쁩니다. 주변에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 가나카와현, 이토 노리코(61살)- 입추의 여지없이 강연장을 가득메운 청중들은 하나같이 “침략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존재를 알게 된 뜻 깊은 강연”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기자는 지난 1월 14일(토)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일본 도쿄 고려박물관에서 “침략에 저항한 불굴의 조선여성들”에 대한 특강을 했다. 이번이 2차 강연인 항일여성독립운동가 특강은 지난 1차 특강 때인 20
[우리문화신문= 이윤옥기자]“당시 조선7층석탑이 대마도로 건너갈 때 찍은 흑백사진이 있었습니다. 많은 조선사람들이 조선7층석탑 앞에서 찍은 사진을 제가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사진을 갖고 있던 분도 돌아가시고 부인께서도 근 100살의 연세로 치매에 걸려 아무 내용을 모르니 안타깝지요. 그때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진을 확보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기자에게 의정부 원효사에 있는 조선7층석탑(이하 7층석탑)의 유래를 설명해준 분은 홍종필 (82살, 오키나와연구소장) 소장이었다. 홍 소장은 대마도에 있던 7층석탑이 원효사 대웅전 앞뜰로 옮겨 오기까지의 전 과정을 소상히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고국으로 귀환하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분이다. 어제(28일) 설 명절을 맞아 기자는 의정부 원효사(경기도 의정부시 망월로 28번길 356)엘 다녀왔다. 수십 년 동안 집에서 차례를 모시던 부모님을 원효사에서 합동 차례로 모시기로 하고 원효사에 첫 걸음을 한 날이었다. 원효사는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원효대사께서 머무르며 수도했던 도량으로 알려진 곳으로 1626년(조선 인조 4년)에 만든 한글판 <묘법연화경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6호)&g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절분제(節分祭)는 평소에 신의 가호로 무사히 지낼 수 있게 된 것을 가시마신사(鹿島神社)의 신에게 감사드리고 아울러 액운을 막는 행사로 개운(開運)과 행복을 비는 축제입니다. 절분제의 신청용지는 사무소에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신청 마감은 1월 28일, 제1부 오후 3시 기도요금 5천 엔, 제2부 오후 6시 기도요금은 2만 엔” 이 글은 이바라기현 가시마시(茨城県 鹿嶋市)에 있는 가시마신궁(鹿島神宮)의 알림판에 적혀 있는 글이다. 가시마신궁(鹿島神宮)은 전국에 소재한 약 600개 신사의 총본사로 필자가 찾은 1월 10일에는 하츠모우데(정초 참배)를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신궁은 북적거렸다. 해마다 2월 3일은 일본의 절분(세츠분, 節分)날이다. 절분날은 신사나 절에서 액막이 기도회를 갖고 콩뿌리기(마메마키) 행사를 하는 오랜 풍습이 있다. “복은 들어오고 귀신은 물러가라(福は內、鬼は外)”라고 하면서 콩을 뿌리고 볶은 콩을 자기 나이 수만큼 먹으면 한 해 동안 아프지 않고 감기도 안 걸리며 모든 악귀로부터 보호 받는다는 믿음이 있다. 절분행사는 예전에 궁중에서 했는데 《연희식, 905년》에 보면 색색으로 물들인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최재형 선생님, 선생님께서 낯선 땅 우수리스크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시다 일제의 무자비한 총탄에 세상을 떠나신지 어느덧 97년이 흘렀습니다. 선생님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살아내신 일생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낯선 땅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동포들을 위해 선생님은 뜨거운 민족애로 한인들의 난로역할을 하셨습니다. 한인 자녀들에게 배움의 기틀을 마련하시어 학교를 세우시고, 후학들의 장래를 위해 일찍이 장학사업도 하셨지요. 낯선 러시아 땅에서 차별받는 한인들의 보호자가 되어주신 선생님을, 한인들은 최페치카라고 부르며 존경했습니다. 최재형 선생님, 선생님은 동양의 카네기라 할 정도로 막대한 부를 이루셨습니다. 선생님은 러일전쟁 후,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위기를 직시하시고 많은 재산을 털어 독립단체인 동의회를 조직하고 대한의군의 숙식과 무기를 제공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조국독립의 뜻을 둔 애국지사들의 손을 맞잡고 대한의군이 국내진공작전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셨습니다. 일본의 방해공작 탓에 위기도 여러 번 넘기셨지요. 하지만 선생님의 인격은 러시아인들도 감동시켜 일본의 모함임이 즉시 밝혀졌습니다. 일제는 드디어 대한의군의 무기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구미산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이 제법 차다. 눈 내린 용담계곡을 따라 수운 최제우(崔濟愚, 1824~1864) 선생이 득도한 용담정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엊저녁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고 쌓여있다. 추운 날씨에도 수운 선생의 발자취를 좇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드문드문 이어지고 있었다. 용담정은 수운 선생의 아버지인 근암 최옥이 학사(學舍)로 쓰던 곳으로, 수운 선생은 도(道)를 깨치기 위해 오랜 방랑을 끝내고 돌아와 1860년 4월 5일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시천주(侍天主) 계시를 받고 이곳에서 득도에 이르는데 이것이 곧 동학의 시초로 오늘날의 천도교이다. 동학은 서양에서 전래한 종교인 '서학'에 대하여 생긴 한국 고유의 종교로 당시 수운 선생은 세상이 어지럽고 인심이 각박하게 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임을 깨닫고 한울님의 뜻을 알기 위해 수행에 힘쓴 결과 37살에 득도한 이래 1861년 포교를 시작하자마자 많은 신도가 추종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교세는 계속 확장되어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 접소는 13개소에 달했다. 정부가 동학의 교세 확장을 경계하기 시작하고 관헌의 감시를 받게 되자 곧 탄압이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민선 6기 송기섭 진천군수의 역점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는 보재 이상설 선생 순국 100주년 기념사업이 순항 중이다. 진천군은 오는 4월 이상설 선생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보재 이상설 선생이 우리나라 항일독립운동 역사 속에서 일궜던 위대한 업적과 다양한 학문적 성과들에 대해 재조명할 수 있는 여러가지 기념사업을 추진한다. 진천군에 따르면 19일 새해 첫 '이상설 선생 순국 100주년 기념사업 실무협의회'를 열었고 기념관 토목ㆍ건축설계 진행사항, 전시실 유품ㆍ유물 확보계획, 100주년 기념행사 추진상황 등을 집중 점검했다. 실무협의회에는 진천군 관계자 말고도 기념사업회, 국가 및 충북도 사업 관련 공무원, 설계사무소 관계자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오는 4월 21일부터 22일까지 이틀간 순국 10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추진 중이다. 22일 본행사에 5천 명 이상의 내ㆍ외빈을 초청, 선생이 걸어왔던 위대한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고귀한 유훈이었던 애국ㆍ애족 정신을 계승발전 시키기 위한 기념식이 개최된다. 21일부터는 ▲이상설 전국학술대회 ▲전국 한시지상 백일장대회 ▲전국 시낭송대회 ▲학생 미술대회 ▲이상설평전 출판기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이 전시관은 히다카시(日高市)가 기본 구상으로 하는 ‘역사와 자연의 고향’ 을 꿈꾸어 만든 자료관입니다. 히다카시는 고마가와(高麗川)의 맑은 물이 입지한 곳으로 우리 조상이 이곳에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후 1만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고도성장기 개발의 물결에 휩싸였고 특히 1960년대에 들어서서는 대규모 택지 개발로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어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생활 도구 등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 보존의 필요성을 느껴 고려향민속자료관(高麗鄕民俗資料館)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히다카시 교육장- 고려천[고마가와, 高麗川]가 발아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히다카시의 ‘고려향민속자료관(高麗鄕民俗資料館)’은 아담한 2층 전시실을 갖춘 향토 자료관이다. 자료관 입구에는 다양한 모양의 떡살이 전시되어 있으며 안쪽 1층 전시실에는 물레 등 의생활에 관련된 도구를 비롯하여 벼농사에 필요한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벼를 훑는 홀태나 탈곡기 등은 과거 우리 농촌에 있던 것들과 흡사하여 전시관을 찾는 한국인들의 시선을 끈다.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권병덕(1868. 4. 25 ~ 1943. 7. 13) 선생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충청북도 청주 사람이며, 천도교인이다.18세에 동학교도가 되고,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 때 손병희와 함께 6만명의 교도를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하여 진압 당한 후 전국 각처를 방랑하였다. 1908년(융희 2)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이에 입교하여 전제관장(典制觀長)·이문관장대리(理文觀長代理)·금융관장(金融觀長)·보문관장(普文觀長)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 25일 무렵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해 상경한 그는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을 만나, 3·1독립만세운동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이 달 27일 최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 등의 동지와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을 열기하고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