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을 사랑한 푸른 눈의 독일인,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다. 그 이름은 브루노 타우트(Bruno Julius Florian Taut, 1880-1938)다. 내가 브루노 씨를 만난 것은 기후현에 있는 시라카와마을(白川鄕)에서였으니 십여 년도 더 된 이야기다. 1938년에 죽은 독일인 건축가를 십여 년 전에 만났다고 하면 의아한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시라카와마을은 기후현 산골짜기에 얼마 안남은 옛 전통방식의 일본집으로 지붕 모습이 사람 손의 합장(合掌) 모습이라 하여 합장가옥 곧 일본말로 갓쇼즈쿠리(合掌造り)라고 부른다. 눈이 많은 지방의 가옥형태다. 이 마을을 전 세계에 알린 사람이 독일인 건축가 브루노다. 브르노가 이곳을 찾은 것은 1933년 일이다. 당시 그는 독일의 촉망받는 건축가였다. 브르노는 1880년 독일 케니히스브루크에서 태어나 33살 때 '철의 기념탑', '유리의 집'을 발표하여 국제적인 평가를 얻은 바 있다. 그 뒤 그는 베를린 주택공사의 공동주택 설계를 맡게 되는 데 건물과 건물 간격을 띄우고 나무를 심는 등 요즘말로 친환경적인 공동주택 설계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은 히틀러가 총리가 되어 무너
[우리문화신문=도쿄이윤옥 기자] 새해 이틀째 도쿄 코리아타운 신오쿠보 거리는 활기찼다. 오후 5시 기자가 찾은 신오쿠보 거리는 오고 가는 사람들로 꽤나 붐볐다. JR야마노테선 신오쿠보에서 내려 걷다보면 한국 간판들이 즐비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속에 낯익은 한국어도 꽤 들려온다. "헤이트스피치(혐한시위자)들이 늘기 시작하면서 이곳 코리아타운의 명성도 점차 사그러든 느낌입니다. 하지만 어떻게해서든지 이곳의 경기를 살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한국인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 지난해 여름 신오쿠보에 있는 고려박물관을 찾았을 때 이사장 하라다쿄코 씨는 기자에게 이곳 상권이 살아나지 않고 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실제 고려박물관이 세들어 사는 건물 1층의 한국인 가게도 문을 닫았다는 이야길 듣고 내심 마음이 아팠다. 한류 붐이 일고 경기가 좋을 때는 이곳 신오쿠보 거리를 지나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데 어제 둘러본 신오쿠보 거리는 뭔가 활기찬 느낌을 받았다. 환하게 불을 밝힌 가게마다 사람들이 몰려있었고 어딘지 모를 생기가 돌았다. 올 한해는 더욱 활기찬 코리아타운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문화신문= 일본 군마현 치요다쵸 이윤옥기자] “1월 1일 오후 3시에 오시면 시간을 내보겠습니다.” 일본 군마현 치요다쵸에 자리한 광은사(光恩寺, 고온지) 주지스님은 서울에서 누리편지(메일)를 보낸 기자에게 시간까지 정해주면서 찾아오라고 했다. 1월 1일은 일본 절에서 새해맞이(初詣, 하츠모우데) 로 한해 가운데가장 바쁜 때로 외부 손님과의 대담이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스님은 흔쾌히 기자와의 약속을 해주었다. 광은사는 고구려 혜관스님이 개산(開山, 산문을 연다는 뜻으로 창건을 뜻함)한 절로 이카호의 수택사(미즈사와데라, 水澤寺), 이바라기현의 근본사(根本寺, 곤본지)와 함께 관동 지역의 3대 고찰 가운데 하나인천년 고찰이다. 하필 이렇게 바쁜 시기에 주지스님을 찾아뵙겠다고 한 것이 죄송스런 일이긴 하지만 기자 역시 시간을 낼 수 있는 것이 이때뿐인지라 용기를 내어 편지를 보낸 것이 가상했는지 광은사의 주지스님은 약속대로 3시에 기자를 맞았다. 팔십은 족히 되어 보이는 모습의 주지스님은 검은 옷에 흰 목도리를 두르고 기자를 만나자 마자 명함을 건네주었는데 광은사주직(光恩寺住職) 나가라쿄코(長柄行光)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실례지만 연세는? 이라고
[우리문화신문=일본 군마 다카사키 이윤옥 기자] " 아! 이곳에 고구려 혜관스님 동상이? 스님 사진을 찍어도 됩니까? " " 물론이죠. 얼마든지 찍으십시오" 주지스님은 친절히 대답했다. 본당(한국의 대웅전)안은 약간 컴컴했으나 고구려 혜관스님 동상 앞에 켜놓은 두 자루의 촛불이 이내 주위를 밝혀주었다. 자세히 보니 혜관스님의 동상은 목상(木像)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1,300여 년 전 멸망한 고구려의 스님을 수택사(水澤寺, 미즈사와데라) 본당에서 마주하다니 기자는 잠시 감격에 겨워 울컥 목이 메었다. "고구려 혜관스님을 찾아 우리 절에 온 한국인은 이 선생님이 처음입니다. 우리 절에 관한 자료는 선대로부터 내려온 이 자료가 전부입니다만 혹시 이 선생님께서 다른 자료를 찾게 되면 알려주십시오." 주지스님은 젊은 분으로 몹시 친절했다. 기자가 찾은 12월 31일 오전 10시는일본절에서는 한국의 석가탄신일에 버금가는 중요한 날로 새해를 절에서 맞이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날이기에 주지스님을 개인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좀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주지스님은 한국에서 일부러 찾아온 기자를 위해 따끈한 차 한 잔을 내어주며 흔쾌히 시간을 내주었다.
[우리문화신문= 일본 군마 다카사키 이윤옥 기자] "저는 도쿄에 사는데 다카사키(高崎)에 일을 보러왔다가 유명한 다카사키다루마(高崎だるま, 달마인형)를 하나 사려고 들렸습니다. 해마다 하나 사서 집안에 두었다가 연말에 신사(神社)에 가져갑니다. 올해는 건강을 기원하고 싶어 초록색 다루마를 샀습니다. 다루마는 원래 눈이 없는 상태로 파는데요. 사다가 바로 왼쪽 눈을 칠하고요. 연말에 나머지 눈을 칠한 뒤 신사에 갖다 주고 태우게 합니다." 도쿄에서 왔다는 다나카유지(田中祐二, 60살) 씨는 다루마 상점 안을 기웃거리는 기자에게 초록색 다루마를 손에 쥔 채 친절히 다루마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JR다카사키역 상점가에 진열된 다루마인형은 빨강, 파랑, 노랑 등 다양한 색으로 한껏 새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일본 전국에서 팔리는 다루마 인형의 80%를 이곳 군마현 다카사키에서 만드는데 일본말 다루마(だるま)는 중국 선종(禅宗)의 개조로 알려진 인도 승려 달마대사(達磨大師)에서 나온 말로 한국에서는 달마(達磨)라고 부르지만 일본에서 만들어 파는 인형은 다루마라고 부른다. 달마대사는 9년간 면벽을 하고 좌선(坐禪)을 하느라 팔다리가 썩어 문드러졌기에 일본의 다루마는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춘천의병장 습재 이소응(李昭應, 1852~1930) 선생을 2017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52년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자는 경기(敬器), 호는 습재(習齋) 또는 사정거사(思靖居士)이며, 후에 의신(宜愼), 직신(直愼)으로 개명하였다. 본관은 전주로,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별자(別子)인 경창군(慶昌君) 주의 후손이다. 선생은 1872년 22세 때 화서 이항로의 제자인 유중교의 문하에 들어가 일생을 화서학파 선배인 의암 유인석과 항일투쟁에 매진하였다. 조선이 1876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자 면암 최익현 등 화서학파 유생들과 반대 상소를 올려 일제의 침략성을 규탄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선생은 유인석의 권유로 의병 대열에 동참하여 1896년 춘천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춘천의병진에는 전직 관료와 재야 유생을 비롯하여 군인, 보부상,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다. 선생은 의병진의 전열을 재정비하고 군량과 무기를 확보하는 한편, 효고팔도열읍(曉告八道列邑)이란 격문을 지어 의병을 일으킨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에서 한해 가운데 청소 도구가 가장 많이 팔리는 때를 들라면 단연코 요즘과 같은 설밑(연말)일 것이다. 해마다 연말에 대청소(오오소지, 大掃除) 하는 풍습이 있는 일본이라 그런지 여러 언론에서는 대청소 요령이라든가 청소도구 등에 관한 기사가 넘쳐난다. 일본에서 연말 대청소는 아예 ‘연중행사’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을 만큼 전국적인 행사다. 대청소의 의미는 1년 동안 집안에 쌓인 먼지 등을 털어내고 집안팎을 깨끗이 청소함으로써 새해의 신(神)을 맞이하기 위한 의식으로 이러한 풍습은 멀리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92)때 부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궁중에서는 12월이 되면 오오소지(대청소)를 연례행사로 실시했는데 이는 스스하라이(煤払い)에서 유래한 것이다. 스스하라이란 먼지와 그을음 등 한 해 동안 곳곳에 쌓여있는 것들을 털어내는 것으로 ‘털어낸다’는 의미는 집안에 들어온 악귀나 나쁜 기운을 털어내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일로 여겨왔다. 그래서 지금도 신사(神社)나 절에서는 긴 장대 빗자루로 경내 곳곳을 털어내는 의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하라이는 에도시대(1603~1868)에만 해도 음력 12월 13일에 하였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몸이 불편해도 촛불집회에는 꼬박 참석했지요." 12월 10일 토요일, 제 7차 광화문 촛불집회가 열리던 날, 낮 1시 서울역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최사묵 선생은 84살의 노구에도 기자와 대담을 마치고 촛불현장으로 가기 좋게 약속장소를 서울역으로 잡았다. 100년만의 무더위를 기록했던 지난 여름, 욕실에서 나오다 삐끗하여 척추를 다친 이래 여러 달째 척추보호대를 차고 있으면서도 촛불집회에 꼬박 참가해왔다는 선생의 눈빛을 보며 구한말 충남 당진의 당당했던 최구현 의병장(1866 ~ 1906.12.23) 후손임을 대번에 알아차리게 했다. “의병장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제 나이 70이 다되도록 그 행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구한말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부참서관(軍部參書官)을 하던 할아버지께서 을사늑약 이후 벼슬을 사임하고 낙향한 것 까지는 알지만 이후 종적을 알 수 없었습니다.” 무과에 급제한 교지(敎旨)까지 있지만 집안 어른 그 누구도 할아버지의 행적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어린 손자 최사묵은 더욱 할아버지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살았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할아버지 최구현에 대한 평생의 숙제를 풀어준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문화신문= 이윤옥기자] 이종일(李鍾一, 1858. 11. 6~1925. 8. 31) 선생은 1858년 11월 6일 충남 태안군 원북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향리에서 한문을 수학한 선생은 15세가 되던 해인 1874년에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부모슬하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문과에 급제하였다. 1882년 8월에는 박영효 수신사의 사절단 일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유신 이후 쇄국에서 깨어나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일본의 개화 모습을 목격하였다. 이후 유교사상에서 벗어나 실학과 개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선생은 1896년 [독립신문]에 개화의식에 대한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896년 11월 선생은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민족의식의 진작과 민족사상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1898년 3월 동료들의 추대를 받아 개화사상의 대중기반인 대한제국민력회를 조직, 회장에 취임하였다. 1898년 선생은 중추원 의관에 피임되었으나, 당시 나라의 정세는 세계 열강들의 침략과 국내적 혼란 등으로 국운이 기울어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이를 통한이 여긴 선생은 우선 나라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10개월 만에 의관직을 그만두었다. 선생은 신교육의 하나로 1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다사다난했던 한해가 슬슬 저물어 가고 정유년 닭의 해가 밝아 올 무렵 일본 분위기는 어떨까? 아직 12월 중순이라 연말 분위기는 나지 않지만 그래도 길거리나 상가에 가보면 연말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시메카자리(注連飾り)” 따위 장식품도 그 한몫을 한다. 시메카자리는 연말에 집 대문에 매다는 장식으로 짚을 꼬아 만든 줄에 흰 종이를 끼워 만드는데 요즈음은 편의점 따위에서 손쉽게 살 수 있다. 이러한 장식은 농사의 신(稻作信仰)을 받드는 의식에서 유래한 것인데 풍년을 기원하고 나쁜 액운을 멀리하려는 뜻으로 신도(神道)에서 나온 것이라는 설도 있고 한편으로는 일본의 나라신[國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과 관련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시메카자리는 12월 말에 대문에 내달고 지역에 따라서 다르지만 대개 1월 7일 이후에 치우는 게 보통이다. 관서지방에서는 1월 15일에 치우고, 미에현(三重縣 伊勢志摩) 같은 지방에서는 1년 내내 장식하는 곳도 있는 등 곳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또한 연말연시 장식으로 “카도마츠(門松)”도 빼놓을 수 없는데 이것은 12월 13일에서 28일 사이에 집 앞이나 상가 앞에 세워두고 치우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