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이번 노벨상의 영광은 돌아가신 부모님과 늘 곁에서 응원해준 아내 마리코에게 돌리고 싶다.” 이 말은 2016년 노벨 의학ㆍ생리학상을 받은 일본의 오스미 요시노리(大隅良典, 71살) 교수가 수상 소감의 말미에 한 말이다. 그제(3일) 도쿄 메구로에 있는 도쿄공대캠퍼스 기자 회견장에는 100여명이 넘는 보도관계자들이 몰려 뜨거운 취재 열기를 보였다. 덥수룩한 수염의 오스미 교수는 “소년시절 노벨상에 대한 꿈을 꾼 적이 있지만 연구자의 길로 들어서서는 완전히 잊고 지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남들이 하지 않는 연구’를 목표로 꾸준히 연구해온 결과 이번에 노벨 의학ㆍ생리학상을 받게 되어 더없이 기쁘다고 했다. 수상소감 자리에서 특히 그는 기초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로써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는 25명으로 늘어났다. 자연과학 부문에서만 22명이 상을 받았으며 2001년 이후에만 16명이 수상해 미국에 이어 역대 2위다. 오스미 교수의 노벨 의학ㆍ생리학상이 발표되자 일본은 잔치 분위기다. 언론도 대서특필 했으며 특히 3일 밤 9시 NHK에서는 ‘뉴스워치 9’에서 가나카와현 오이소에 있는 오스미 교수 집을 찾아가 부인인 마리코 씨와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무덥고 습기 많은 충칭 특유의 찜통더위가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손가화원에서는 난데없이 어른들의 만세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습니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대한민국이 해방된 날이지요. 귀국을 서두르는 우리에게 정든 친구 천진천, 천의, 짱다루, 구팡 등 친구들은 물론 그동안 해코지를 일삼던 애들까지 찾아와 이별을 아쉬워했습니다. 어디서 난 소문인지는 몰라도 차우센미(조선쌀)는 한 알이 달걀만해서 서너 알만 먹어도 배가 부르고, 맛도 좋다며 애들이 부러워했습니다.” 이는 독립운동가이자 1949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김상덕(金尙德, 1891 ~ 1956) 선생의 아드님인 김정륙(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하 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이 충칭에서 해방을 맞았을 때의 소회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참말인줄 알고 귀국했다가 그만 첫날 실망했다고 회고한다. 그도 그럴 것이 김정륙 부회장의 나이 8살 때 일이니 조국의 정보란 것이 얼마나 엉성했을까 싶다. 하지만 푸석푸석하고 바람에 날리는 쓰촨(四川) 쌀에 견주면 우리나라 쌀은 정말 찰지고 맛 좋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식량이 귀하던 시절 그것도 망명땅 중국에서의 쌀밥 한 그릇은 얼마나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 민족적인 성향이 짙은 '아리랑'을 만들어일약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받았던 나운규 선생은 그 누구보다도 투철한 독립운동가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나운규 선생은 함북 회령 출신으로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간도의 명동중학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함북 회령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일경의 수배를 받게 되자 연해주를 거쳐 북간도로 이동하였다. 3.1운동 이후 간도지역의 무장독립운동이 활발할 때 선생은 철도, 통신 등 일제의 기간시설 파괴 임무를 띤 도판부(圖判部)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였으며, 청산리 인근에서 독립군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철도 파괴 계획에 대한 비밀문서를 입수하고 선생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체포했다. 선생은 1921년 3월 보안법위반으로 2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회령에 머물던 선생은 1924년 1월 극단 예림회에 가입하여 연극배우로 활동하였다. 이후 부산의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연구생으로 입사하였고, 윤백남의 백남프로덕션에서 '심청전'의 심봉사 역을 맡아 연기하였다. 이후 '흑과백', '장한몽', '농중조' 등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주목받게 되
[우리문화신문=이윤옥기자]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하는《서간도에 들꽃 피다》 시집을 6권이나 낸 이윤옥 기자가 항일독립운동가 후손들을찾아 나선다. 항일독립운동가 본인들은 물론 후손 1세대들도 고령으로 살아계신 분이 별로 없는 이때 후손 1세대들을 찾아 항일독립운동에 온 삶을 바친 선조들을 두었던 그들에게이야기를 들어본다. 이제나마 항일독립운동가 후손의 고난에 찬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삼으면 좋을 일이다.(편집자 말) “욕심이 없되 허망하지 않고, 뜻이 있되 결코 나대지 않는 자연의 모습처럼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자연처럼 가는 것이 진정한 영웅과 참된 열사의 길이요 뜻이었거늘, 하물며 나 같은 범부, 졸부가 뭐 남길게 있다고 붓을 들고 나섰는지 나 자신이 생각해도 무척이나 후회스럽고 다시 물렸으면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의 어머니 정정화 여사의 자서전인 《장강일기, 학민사》 머리말 가운데 한 부분이다. “어머님의 삶을 한마디로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라는 기자의 질문에, “어머니는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분이셨습니다.”라고 기다렸다는 듯 김 회장은 대답했다. 독립운동가 1세들이 세상을 뜨고 이제 그 후손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조선의 여성독립운동가로서 한국에 널리 알려져 있는 분은 유관순 열사로 그 밖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윤옥 시인은 여성독립운동가를 널리 알리기 위헤 현재 120명의 여성독립운동가의 삶을 추적하여 세상에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2014년 시화전에 이어 이번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건 30명의 항일여성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합니다. 역사 속에 묻혀있는 여성들을 시와 그림으로 배워 보지 않으시렵니까?” 이것은 일본 고려박물관에서 올 11월 2일부터 2017년 1월 29일까지 전시 예정인 “2016년 기획전 침략에 저항한 불굴의 조선여성들(侵略に抗う不屈の朝鮮女性たち)(2) - 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시 이윤옥에 적혀 있는 글이다. 필자는 지난 8월 말, 도쿄 고려박물관 조선여성사연구회를 찾았다. 이들은 일제의 조선침략의 역사를 반성하는 모임으로 일본의 양심 있는 시민단체이다. 이곳에서는 2014년 1월 29일부터 3월 30일까지 제1회 시와 그림으로 보는 항일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을 연바 있다. “1회 전시회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하루 평균 19명 정도가 전시회장을 찾았지요. 그러나 이곳 고려박물관이 있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비밀여성단체 송죽회로 투쟁한 ‘김경희’ 찬 서리 내려야 비로소 푸르름 드러나는 소나무 한바탕 비바람 흩뿌린 뒤에야 쑥쑥 크는 대나무 서로 걸어온 길 달라도 오직 조국 광복을 향한 곧은 절개 송죽(松竹) 닮았어라 김경희(金慶喜,1888~1919) 애국지사는 31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며 늙으신 어머니와 동지들에게 “나는 독립을 못 보고 죽으니 후일 독립이 완성되는 날 내 무덤에 독립의 뜻을 전해주시오. 나는 죽어서도 대한독립의 만세를 부르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무엇이 그 짧은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도 독립의 끈을 놓지 않게 한 것일까? 김경희 애국지사는 평양 출신으로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동생 애희가 미국에 유학을 했고 막내 동생이 북경을 거쳐 일본 교토로 유학을 갈 정도로 부모님은 이들 세 자매의 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숭의여학교 1회 졸업생인 그는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1913년 25살 무렵 황애덕 등과 함께 비밀결사 단체인 송죽회(松竹會)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펼쳤다. 송죽회(松竹會)는 1913년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 김경희와 황애덕, 졸업생 안정석 등이 주도하여 결성한 항일 비밀결사
[우리문화신문= 이윤옥기자] 서일(徐一, 1881. 2. 26~ 1921. 8. 27(음), 9. 28(양)) 선생은 1881년(고종 18년) 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 농가에서 태어났다. 18세까지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신학문에 뜻을 두고 경성에 있던 성일(成一)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로부터 후학을 기르는데 전념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나중 그의 행적을 미루어 보아 식민지 젊은이들의 의(意)와 기(氣)를 살리는데 앞장섰으리라 생각될 뿐이다. 그러나 그의 20대는 날이 갈수록 어두운 색깔로 채색되어갔다. 혈기왕성했던 스물다섯 살에 을사조약 체결을 겪었고 서른 살에는 망국(亡國)의 경술국치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와 망명지 만주 등에는 사범학교 설립이 급증했다. 이는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선지자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선생 역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망명 후 선생이 교육에 정신(대종교)과 힘(무장투쟁)을 융합시킨 사실이 그 증거이다. 선생은 서른 한 살 때인 1911년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의 어려움과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라쇼몽(羅生門)은 헤이안시대 헤이죠쿄(平城京)에 있던 큰 문이다. 궁성을 드나들 때 거쳐야하는 큰 문으로 나성문(羅城門)이란 한자를 썼던 것인데 훗날 나생문(羅生門)으로 바뀌었고 이 문이 유명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芥川龍之介, 1892~1927)의 단편소설 《라쇼몽(羅生門)》 덕일 것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라쇼몽》말고도 《코》 등 많은 단편소설을 남겼는데 이들 소재는 12세기 작품인 《곤자쿠모노가타리(今昔物語集)》에서 얻고 있다. 헤이안시대에 만들어진 이 책 속에는 당시에 나돌던 1200여 가지의 설화가 들어있는데 《라쇼몽》은 이 설화집 세속부 권 29화의 이야기를 소재로 쓴 것이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85)는 왕조의 부귀영화가 절정에 달하던 시대로 말기에 이르면 잦은 화재와 흉년, 굶주림 따위로 백성들의 곤궁한 삶이 드러나는데 설화집의 나성문(羅城門) 이야기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때는 헤이안 말기, 한 사내가 나성문을 어슬렁거리다 2층 누각으로 올라간다. 2층에 올라가보니 한 노파가 죽은 여자의 시체에서 머리카락을 뜯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노파는 이 머리카락으로 가발을 만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대동강물 흐르는 비옥한 땅 / 일제 침략 없었다면 / 구김살 없이 살아갈 터전 등지고 빼앗긴 나라 되찾고자 / 갓 태어난 핏덩이 / 남겨두고 뛰어든 / 험난한 가시밭길 어미 품 그리며 / 유치장 밖서 / 숨져간 어린 딸 하늘이여 /어린 영혼 가는 길 / 무궁화 꽃 뿌려주소서. 박 지사님의 일생을 추적하면서 저는 이러한 노래를 읊었습니다. 어린 핏덩이가 유치장 밖에서 울어댈 때 지사님의 찢어지는 마음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었을까 싶었습니다. 왜경이 악랄하다고는 해도 갓 태어나 한 달밖에 안된 핏덩이를 둔 어머니를 잡아다 유치장서 고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것도 옷을 모두 벗기고 ‘그 나체 좀 구경하자’면서 실신하도록 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어린 핏덩이를 안고 면회소에서 삼일동안 애걸복걸하던 그 친척이 싸늘히 죽어간 주검을 보듬어 돌아가던 그 발걸음은 고스란히 우리 겨레가 겪은 아픔이요, 눈물이요, 고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죽하면 이때의 내용이 1922년 동아일보에 ‘산모를 나체로 심문, 어미가 정신없이 매 맞는 중에 아기는 경찰서 문 앞에서 죽어’라는
[우리문화신문= 이윤옥기자] 고무공장 어린 여공 보듬은 "강주룡" 숨 쉬기도 거북한 고무탄내 자욱한 공장 안에서 폐부에 달라붙어 켜켜이 쌓여가는 죽음의 그림자 뒤로하고 힘겨운 작업량 채우며 하루하루 버티던 어린 소녀들 밥이나 제대로 먹게 해주라고 울부짖던 그대는 여공들의 자애로운 어머니. “유치(留置) 중인 강주룡, 단식 74시간, 을밀대 위에 올라갔던 여직공, 감임취소(減賃取消)해야 취식(取食)한다.” 이는 1931년 6월 2일 동아일보 2면에 큼지막하게 나온 강주룡 (姜周龍, 1901~1932.6.13) 애국지사의 기사 제목이다. 단식 74시간이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거기다가 노동쟁의를 위해 평양의 을밀대 지붕에 올라갔다는 말도 예사롭지 않은 말이다. 서른 한 살의 강주룡 애국지사는 어째서 단식 74시간에 들어갔던 것일까? 74시간이라면 만 3일하고도 2시간이나 되는 시간 동안 곡기를 끊었다는 이야기다. 당시 강주룡 애국지사의 단식 사건은 1931년 6월 2일치 기사 말고도 각 신문에서 대서특필할 정도로 큰 관심을 보였다. 강주룡 애국지사는 1931년 5월 평원 고무공장 파업을 주도하던 중 왜경의 간섭으로 공장에서 쫓겨나자 을밀대 지붕에 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