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도쿄 이윤옥 기자] 여기일까 아님 저기였을까 츠보우치 연극관으로 가는 좁은 길목 나무 의자에 앉아 교정을 거닐었을 선배들을 그려본다 나라 잃은 몸으로 적국인 이 땅에서 고이 품은 꿈을 펼치려했던 이들 더러는 거목으로 우뚝 섰지만 더러는 춘원처럼 이름을 욕되게 했던 곳 무더워 매미도 울지 않고 바람 한 점 없는 한여름 니시와세다 교정엔 적막만이 강물처럼 흐른다. -와세다 교정에서 ‘이한꽃’- 한여름 무더위 속, 여름방학이라서 그런지 와세다대학 교정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23일(수) 오전 9시, 캠퍼스를 일찍 찾은 탓도 있지만 평소 같으면 학생들로 북적 거릴 교정은 텅 빈 채 청소하는 아저씨들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의 사립대학 가운데 명문으로 일컬어지는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學)은 과거 한국에서 조도전(早稲田)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초창기 '조도전(早稲田)' 은 낱말 그대로 벼농사를 짓던 논이 즐비하던 땅이다. 때는 1882년 (명치 15년), 일본의 근대화가 한창이던 이 시기에 일본은 서구의 대학을 시찰하고 곧바로 미래의 일본을 책임질 젊은이들을 교육 시킬 책무를 느끼고 대학 설립의 길로 들어선다. 와세다도 그런 이념으로 설립된 대학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 소학관에서 나온 《일본사세시기366일(日本史歲時記366日)》의 8월 24일 이야기를 보면 좀 섬뜩한 이야기가 나온다. 풍신수길 시대인 1594년 8월 24일 강도 두목인 이시카와고에몬(石川五右衛門)이 잡혀 그 가족과 함께 산채로 펄펄 끓는 가마솥에 던져 죽은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처음에는 이 이야기가 허구로 여겨졌으나 예수회 선교사인 페트로모레몬의 일기 속에 “이 일은 분로쿠 3년 여름일이다. 기름에 튀겨진 인물은 다름 아닌 이시카와고에몬과 그 가족 9명이었다.”라는 기록이 나와 실제 사건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을 기록한 또 한사람은 에도초기의 학자인 하야시라잔(林羅山)이다. 하야시라잔이 편찬한 《풍신수길보(豊臣秀吉譜)》에 따르면 “분로쿠 시절 이시카와고에몬이라는 도적이 강도 등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로 풍신수길이 체포하게 하여 어머니 이하 28명의 관련된 사람들을 산죠가와라에서 삶아 죽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후 날강도 이시카와고에몬은 의적(義賊)으로 변신, 가부키(歌舞伎)등에 등장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뜨거운 가마솥에 빠트려 죽었다고도 하고 펄펄 끊는 기름에 튀겨졌
[우리문화신문=도쿄 이윤옥 기자 ] 태풍 9호 등 세 개의 강력한 태풍이 일본열도로 상륙한 날, 도쿄 역시 태풍의 영향권 아래 일부 지하철 운행의 차질이 생기는 등 어수선한 가운데 어제(22일) 가와사키 시(川崎市)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는 ‘헤이트스피치(차별선동표현, 특히 혐한시위)를 용서하지 않는 모임’ 행사 취재를 위해 도쿄 오오츠카 숙소를 나섰다. 가와사키 시는 도쿄의 위성도시로 인구 140여만 명의 제법 큰 도시인데 숙소인 오츠카에서는 전철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곳이다. 도쿄에 상륙한 강한 태풍으로 비바람이 몰아쳐 몸을 가눌 수 없는 궂은 날씨에도 가와사키시노연회관(川崎市勞連會館) 5층 강당에는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이날 모임의 정식 이름은 ‘시민입법으로 가와사키 시 인종차별해소 조례를! 학습・의견 교환회(市民立法で、川崎市人種差別解消條例を! 學習・意見交換會)라는 다소 긴 이름의 모임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차별’에 대한 사례와 이에 대한 문제점 등을 공부하는 모임이었다. 이날 가와사키 시민네트워크가 초청한 강사는 교토 시에서 인종차별철폐조례를 위해 뛰고 있는 김상 교수(류코쿠대학 법학대학원)였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조국의 하늘 밑에는 적반하장의 세상이 왔다. 펼쳐진 현대사는 독립을 위해 이름 없이 피 뿜고 쓰러진 주검 위에서 칼을 든 자들을 군림시켰다. 내가 보고 들은 그 수없는 주검들이 서러워질 뿐, 여기 그 불쌍한 선열들 앞에서 이 증언을 바람의 묘비로 띄우고자 한다.’ 장준하 선생 선생님께서 포천군 약사봉에서 의문의 사고를 당하시기 4년 전에 직접 쓰신 《돌베개》에 부친 글귀였습니다. 저는 이 글을 보고 부끄러워졌습니다. 조국이 해방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광복 조국의 하늘 밑은 적반하장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고 민족의 정기를 훼손한 친일파와 반민족행위자는 처벌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 사회의 특권계층이 되어 지난 수세기 동안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조국을 위해 피를 뿜고 목숨을 바쳤던 독립운동가들을 억압하였습니다. 역사의 책임을 져야하는 세력이 역사를 책임지지 못하고,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하는 세력이 역사를 책임지고 있는 굴곡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기에 선생님께 편지를 쓰는 지금 이 순간도 마음이 너무나도 무겁기만 합니다. 선생님께서 의문의 사고로 돌아가신지 벌써 40년이 넘었지
[우리문화신문=도쿄 이윤옥 기자] “한국, 조선인 피폭자의 존재는 일제 식민지 지배 탓이며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폭을 맞은 것은 전쟁을 일으킨 천황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한 일제국주의의 전쟁범죄와 천황제를 용인한 일본인의 무자각과 무책임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와 데루다카(塙輝高, 도쿄 거주) “인터넷을 통해 고려박물관에서 피폭 관련 전시회를 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히로시마에 친구가 살고 있어서 조선인 원폭 피해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일본인으로 매우 부끄럽다.” -아리타 고타로(有田幸太郎, 시코쿠 거주)- 이는 도쿄 고려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피폭 71년 한국ㆍ조선인과 일본(被爆 71年 韓国·朝鮮人と日本)> 전시회장에서 만난 일본인들의 이야기다. 특히 아리타 씨는 멀리 시코쿠 지방에서 ‘피폭전시회’를 보기 위해 도쿄로 올라와 이날 고려박물관을 찾았다고 했다. 어제(21일) 오후 2시 기자는 신오쿠보에 있는 고려박물관을 찾았다. 고려박물관(관장 히구치 유우지)을 만든 사람들은 양심 있는 일본인들로 아베정권을 비롯한 극우 성향의 정치인들이 “침략전쟁은 없었다. 위안부의 강제성은 없다. 독도는 일본땅이다.”를 주장하는 것에 쐐기
[우리문화신문=도쿄 이윤옥 기자] 도쿄 도심 순환선인 야마노테센(山手線) 오오츠카역(大冢駅) 주택가는 도심의 화려한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서는 곳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도시마쿠 스가모(豊島区 巣鴨) 주택가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으로 이곳은 비좁은 골목과 낡은 주택들이 즐비하여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그렇다고 낡은 주택 골목이라고해서 무질서한 곳은 아니다. 낡고 비좁지만 그 나름의 질서가 공존하는 곳이 도쿄 주택가 골목의 모습들이다. 주택가의 모습만 그런 게 아니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을 느낄 수 있는 도쿄의 명물이 있는데 바로 땡땡전차 (일본말로 친친덴샤 ‘ちんちん電車’)를 들 수 있다. ‘친친’ 이란 전차운전사가 땡땡(친친)하고 벨을 울려 붙은 이름이다. 이제는 퇴역해도 좋을만한 1량짜리 전차는 그러나 이용객이 많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도심의 전철이 지나가지 않는 곳을 공략하고 있는 도쿄의 명물 땡땡전차는 달랑 1량짜리로 와세다대학에서 미노와바시까지 달리며 정식이름은 토덴아라카와센(都電荒川線)이다. 출발역인 와세다대학에서 미노와시바시까지는 모두 30개역으로 전차 값은 170엔이다. 일본에는 도쿄의 이런 땡땡전차(노면전차,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야마다 다카오(山田貴夫)씨를 만난 것은 8월 13일 오후 4시 인천관동갤러리에서였다. 이에 앞서 인천관동갤러리 관장인 도다 이쿠코 씨로부터 야마다 씨에 대한 간략한 누리편지 한 통을 받았다. “야마다 씨는 반(反) 헤이트스피치(hate speech. 증오 조장자)인데 8월 13일 인천 관동갤러리에 올 예정이니까 취재를 해보라.”는 언질이었다. 찌는 날씨 속에 야마다 씨를 만나러 인천 관동갤러리로 달려갔다. 오후 4시 쯤 야마다 씨는 갤러리 안에 들어섰는데 자그마치 6명의 일행과 함께였다. 야마다 씨가 인천에 온 것은 개항지인 인천의 여러 유적지를 보러 온 것으로 특별히 나하고 인터뷰를 할 시간은 없었다. “이번에는 일행도 있고 해서 죄송합니다. 다른 기회에...”라고 하며 인천관동갤러리에서 전시하고 있는 [한인면모(韓人面貌) - 중국 조선족 이야기] 전시를 둘러보고 헤어졌다. 약간은 아쉬웠으나 야마다 씨가 귀국하여 도다 이쿠코 씨에게 보내온 누리편지가 나에게 전달되었다. “덕택에 인천과 중국 조선족의 역사를 배울 기회를 가졌다. 다만 시인 이윤옥 선생과의 인터뷰를 할 시간이 없어서 아쉬웠다. 가와사키시(川崎市)의 반헤이트운동(반혐
[우리문화신문= 이윤옥기자] 해마다 8월이면 일본이 한국을 유독 분노케하는 일이 있다. 어디 그게 8월 뿐의 일이겠느냐 싶지만 특히 8월을 꼬집어 말하는 것은 이때가 바로 일본의 패전일이 들어 있는 달로 전쟁범죄자들을 기리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노골화하고 있는 몰지각한 정치인들의 모습을 봐야하기 때문이다. 도쿄 한복판 치요다쿠(千代田区)에 있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는 일본인들의 주장대로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호국 영령을 모신 신사(神社)’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메이지유신 이래 근대 이후 일본이 관여한 전쟁에서 활약한 전쟁범죄자들을 미화하고 숭상하는 시설이다. 일본군이 한국인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면 모를까, 한국을 침략하고 그것도 모자라 침략국의 선량한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아 죽게한 일본을, 그 책임을 묻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라고 본다. 지금 야스쿠니에 강제 합사(合祀) 되어 있는 니이야마만수(新山滿秀, 한국이름 박만수)도 그런 젊은이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곳에 합사된 박만수 씨는 전북 남원 출신으로 일본 구(舊) 해군 군속신상조사표에 따르면 남양군도에 강제 징용되어 1945년 4월 11일 ‘전사처리’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우리문화신문= 이윤옥기자] 12일(금) 오전 10시, 고양시 신원도서관(관장 장은옥)에서는 “온몸으로 나라를 구한 여성독립운동가”시화전 개막식이 있었다. 개막식이라고는 하지만 동네방네 떠나갈 듯한 개막식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모인 아주 조촐한 개막식이었다. 그러나 뜻 깊었던 자리였다. 이날 조촐한 개막식에는 신원도서관이 지난 7월 22일부터 8월12일까지 청소년을 대상으로 일제침략시기 국난 극복을 위해 온몸을 던진 독립운동가들의 나라사랑 정신 교육인 “아주 특별한 나라사랑 프로젝트”에 참여한 청소년들과 학부모가 주로 참석하였으며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이뤄졌다. 장은옥 관장은 “고양시에서 처음으로 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을 열게 되었다. 고양시에도 오정화 여성독립운동가가 있지만 이 시화를 통해 처음 그 분을 알게 되어 부끄러운 마음이다. 이제 조촐하게나마 열린 이번 시화전이 고양시민 모두가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기폭제가 되기를 기대한다.”라고 인사말을 했다. 이어서 이번 시화전을 주관한 한국문화사랑협회(서울시 비영리단체 제1259호) 김영조 회장의 인사가 있었다. 그는 “그간 서울과 도쿄, 호주 등지에서 10여 차례 여성독립운동가 시화전을 열었지만 고양시에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원주 치악산 상원사 입구에는 치악산을 알리는 커다란 안내지도가 있다. 그런데 이 안내지도의 일본어 표기에 오류가 있어 지적한다. '치악산'에 가장가까운 일본어 표기를 해보면, 1)チアクサン(치아쿠산) 2)チアッサン(치앗산) 3)チアックサン(치악쿠산) 이 세 가지로 표기 할 수 있다. 가장 유사한 우리말 발음이라면 2)또는 3)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적혀있는 표기는, チアシクサン(치아시쿠산)으로 잘못되어 있다. 아마도 안내도 글씨를 쓰는 사람이 촉음의 츠(ッ)를 쓴다는 것이 비슷한 모습의 시(シ)를 쓴 것 같다. 고쳐야 할 것이다. 한편, 국립공원을 나타내는 고쿠리츠코엔(こくりつこうえん)도 고(こ)가 빠진 쿠리츠코엔(くりつこうえん) 상태로 잘못되어 있다. 안내도를 쓴 사람과 이를 교정보는 사람이 꼼꼼하게 처리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원주 치악산 상원사 입구 안내도의 일본어 글씨는 수정해야 할 것이며 다른 곳에 설치된 치악산 일본어 안내도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