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윤봉길 의사 고향인 충남 예산군을 찾아 독립유공자 포상 전수식을 연다. 예산군은 제76주년 광복절을 맞아 포상된 247명의 독립유공자 가운데 가장 많은 인원인 38명을 배출한 지방자치단체다. * 건국훈장 4명(애국장 1, 애족장 3), 대통령표창 34명 이번 포상 전수식은 독립유공자 포상 확대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 발굴 등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 예산군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독립유공자 유족의 자긍심을 드높이기 위해 계획되었다. 포상 전수식은 31일(화) 저녁 4시, 예산군청 대회의실에서 진행되며, 황기철 국가보훈처장, 황선봉 예산군수 등을 비롯해 이번에 포상을 받는 독립유공자 유족(손자녀) 6명이 참석한다. 행사는 국민의례, 포상 전수, 축사, 기념촬영 등의 순으로 진행되며, 특히 전수식에서 독립유공자 발굴 및 포상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 예산군에 감사패가 수여될 예정이다. 모두 38명 포상자 가운데 이번에 유족에게 포상이 전수되는 독립유공자는 6명으로, 고 박동복 선생(대통령표창), 고 신매손 선생(대통령표창), 고 윤칠영 선생(대통령표창), 고 정계호 선생(대통령표창), 고 정대홍 선생(대통령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저는 신협(이하, 신용협동조합)을 사랑합니다. 왜냐구요? 우선은 신협의 주인은 타인이 아닌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은행의 주인은 예금주가 아니라 주주이지만 신협의 주인은 조합원입니다. 이것이 신협을 영원히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인 것입니다. 은행에 예금을 많이 하면 의료혜택을 줍니까? 그러나 신협은 조합원(가족포함)이면 누구나 다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이창호 ‘나의 신협’ 글 가운데, 중앙신협회보 1978.2.15. - 은행의 주인은 주주이며, 신협의 주인은 조합원(나)이라는 말이 꽤 설득력이 있게 느껴진다. 1978년이면 이창호(더불어사는 사람들) 대표의 나이 22살 때다. 이창호 대표라고 하면 따라붙는 수식어가 한두 개가 아니다. 한마디로 요약해서 "벼랑 끝에 놓인 어려운 사람들에게 무이자, 무담보, 무보증으로 대출을 해주는 사람”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3무(3無: 무이자, 무담보, 무보증) 대출? 헉 그런 곳이 있나 싶지만, 확실히 ‘있다’. 단, 조건이 있다. 아파트를 사거나 큰 차를 사기 위한 대출이 아니라 당장 아파서 병원 갈 돈을 구하지 못한 사람, 쌀 살 돈이 없어 굶고 있는 사람, 적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미주한인사회의 큰 어른’이었던 홍명기 이사장이 18일(이하 현지시각) 87살로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묵념으로 홍명기 이사장의 타계를 애도했다. 기자가 홍명기 이사장을 직접 뵌 것은 3년 전(2018)으로 그날은 LA 가든스윗호텔에서 ‘제73주년 광복절 기념식’이 있던 날이다. 광복절 기념식이라고는 했으나 참석해보니 단순한 기념식이 아니라 동포들의 잔칫날과 다름없었다. 그날 정식 행사이름은 ‘제73주년 광복절 및 도산 기념동상제막 17주년 합동 기념식 –파이오니어 소사이티 연례 오찬회-’ 였다. 1부 기념식에 이어 2부에서는 점심모임(오찬회)답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동포들은 잡채, 부침개, 삼겹살, 호박죽 등 한국 음식들로 가득한 뷔페식을 먹으며 정담을 나누는 모습이 잔칫집 분위기였던 기억이다. 이십 여 년째 ‘광복절 잔치’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홍명기 이사장이다. 고 홍명기 이사장은 특수페인트로 미국 시장을 석권한 듀라코트사를 세웠다. 홍 이사장은 1954년 유학으로 미국에 건너가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UCLA) 화학과를 졸업하고 26년 동안 화학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51살의 나이로 창업을 했다. 그때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그꽃은 늘 음지에서 자란다. 키큰 소나무 아래서 묵묵히 자신의 꽃을 피운다. 맥문동이 밝은 햇살아래 심어진 것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해바라기나 백일홍처럼 그들만의 꽃밭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대부분 큰 나무 아래 심어둔다. 그래도 강인하게 잘 자라는 꽃, 맥문동이 지금 한창이다. 일산 호수공원에서.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재일 한국계 교토국제고가 명성 높은 일본 청소년 야구의 본선 무대에서 8강을 차지하여 재일동포 세계는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잔치 분위기다. 교토국제고는 24일 아침 8시 효고현(兵庫県) 니시노미야시(西宮市)에 있는 한신고시엔구장(阪神甲子園球場)에서 열린 103회 고시엔(甲子園) 대회에서 도쿄도 대표 니쇼가쿠샤(二松學舍)대학부속고를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6대 4로 꺾고 승리했다. 시합에 앞서 본선 경기가 열리는 날 “동해바다 건너서 야마도(大和)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로 시작되는 한국어 교가가 방송을 통해 전국 생중계되자 재일동포들의 감동은 더욱 컸다. 1947년 한국계 민족학교로 세운 교토국제고는 야구부 창단 22년 만에 야구 청소년들의 꿈의 무대인 여름고시엔(夏の甲子園)에 처음 출전하여 8강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교토국제고는 지난 봄고시엔(春の甲子園) 대회 때 16강에서 패배하는 설욕을 당했으나 분발하여 이번에 8강에 오른 것이다. 8강에 오르기까지 상대한 팀은 예선전을 포함해 무려 3,603개로 이들 팀과의 접전을 뚫은 것이기에 더욱 값지다. 고시엔구장(甲子園球場)은 일본 프로야구팀인 한신타이거즈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21일(토) 낮 2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태원(李兌遠) 애국지사가 향년 93살로 세상을 떴다고 밝혔다. 이태원 지사는 1943년 4월경 대구상업학교 재학 시 항일 학생결사인 태극단에 가입하여 활약하던 중, 같은 해 5월 일 무렵 들켜 체포된 뒤 모진 고문을 당했고 동년 10월 무렵 기소유예로 출옥했다. 정부는 지사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이태원 지사는 서울센트럴요양병원에서 지병으로 임종을 맞았으며, 중앙보훈병원 장례식장 6호실에 빈소가 마련됐다. 이어 24일(화) 아침 7시 발인 뒤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6묘역에 안장될 예정이다. 이태원 지사가 세상을 뜸에 따라 생존 애국지사는 18명(국내 15명, 국외 3명)만 남게 됐다. 한편, 국가보훈처는 앞으로도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에게 합당한 예우를 통해 국민의 애국정신과 민족정기를 높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ㅇ 이태원(1928.04.14~2021.08.21.) 공적사항 - 1928년 경북 의성 출생 - 대구상업학교 재학 중 1943년 4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카지 와타루(鹿地亘, 1903~1982)란 일본인이 있다. 동경제국대학 국문과 출신의 카지 와타루를 일본 위키사전에서는 소설가로 소개하고 있는데 뜻밖에 그가 쓴 소설 《태평의 눈》(1931)은 조선의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단편소설이라는 데 시선을 끈다. 카지 와타루는 일본인이면서 이 책에서 일제에 저항한 조선 민중의 치열한 독립운동을 다루고 있다. 그는 왜 일제에 저항하는 조선 민중에 관한 소설을 쓴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강연이 지난 7월 24일, 일본 도쿄에 있는 고려박물관에서 있었다. 강사는 한국독립기념관 연구위원 윤소영 박사로 이날 강연 주제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일본인들 – 서로 비난하는 근대 한일의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발견한 희망(韓国の独立運動を支援した日本人たち-罵り合う近代日韓の歴史のはざまで見つけた希望)”이었다. 카지 와타루는 청년기에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뜻을 두고 고바야시 다키지, 나카노 시게하루 등과 함께 활동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문인들과도 어울리며 유랑하는 환경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 뒤 중국으로 건너가 반전항일운동을 이어 나갔으며 조선의용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오랜만입니다. 최근 한달 동안 (일본 도쿄) 고려박물관에서 기획한 <어린이들의 그림편지 교류전 평화를 나누는 그림편지 ~ 서울·도쿄 (子どもたちの絵手紙交流展~平和を交わす絵手紙 ソウル・東京)>의 책임을 맡아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덕택에 오늘 드디어 개막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홍보전단과 전시자료를 보내드립니다.” 한 달 전 쯤 지인 마츠자키 에미코(松崎恵美子) 씨는 고려박물관에서 한·일 어린이 그림편지전 준비로 바쁘다고 했는데 얼마 전 개막식을 마치고 지금 순조롭게 전시가 진행 중이라며 다시 소식을 전해왔다. 마츠자키 씨는 ‘조선침략을 반성하는 모임’인 일본 도쿄 고려박물관 회원이다. 물론 일본도 코로나19로 비대면 개막식을 했고 관람객들도 방역 수칙을 준수한 가운데 적은 인원만 수용 중이라고 했다. “이번 기획전시는 3개의 주제를 설정해서 꾸몄습니다. 하나는 한국의 천안독립기념관에서 보내준 ‘그림편지’ 전시 공간이고 두 번째는 전시된 그림을 관람객인 일본 어린이들이 읽기 쉽게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 또한 컬러플한 그림 하나 하나를 액자에 끼워 시각적으로 확 흡인할 수 있도록 꾸민 점입니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과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관장 정진영)은 만주망명 110주년을 맞이하여 모두 12회에 걸친 기획 보도를 진행하고 있다. 제11편은 조국 독립을 위해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의 삶과 정신을 기리는 방안을 찾는 내용이다.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만주로 망명한 1세대 독립운동가들을 드러내고 추모하는 사업은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최근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인 안동 ‘임청각’이 언론에 비치면서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상룡은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해 경학사와 부민단ㆍ신흥무관학교ㆍ서로군정서 등을 건설하면서 만주 동포사회의 형성과 독립군 기지 건설에 투신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을 통해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취임하게 되고 1926년에는 국무령을 사임하고 만주로 돌아가서 1929년 길림성 서란현에 정착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고 만주사변 이후 독립군과 한중 합작 항일연군 등이 점차 무너지던 중에 1931년 10월 김동삼의 체포 소식을 듣고 나서 병세가 위중해져 1932년 5월 12일 순국했다. 그는 순국하기 전 “나라를 회복하기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오늘은 광복 76돌을 맞는 날이다. 광복절 하면 태극기와 무궁화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요즘은 무궁화꽃을 좀처럼 볼 수 없다. 동네 공원에서조차 무궁화는 벚꽃이나 장미 같은 꽃들에 밀려 거의 심지 않는다. ‘무궁화 화려강산’ 이란 애국가 노랫말이 무색할 정도로 무궁화를 찾아 보기 어렵다. 정확한 정보인지는 몰라도 “무궁화는 진드기가 많이 생겨 안심는다”는 말을 들은 것같다. 그게 사실이라면 임업시험장에서 무궁화의 진드기쯤은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에는 어땠을까? 동아일보 5월 6일치부터 1936년 8월 20일치 까지 무궁화 기사는 53건(한국사데이터베이스)이 나온다. 흑백사진이긴 해도 무궁화 사진만 나오는 경우도 11번이나 된다. 화보로 나온 무궁화꽃 기사 제목을 곰곰이 들여다보니 ‘은근슬쩍 한민족의 기상(?) 또는 광복(?)을 암시하는 제목 같아 소개한다. 가는 비에 젖은 무궁화 1921.7.22. 고운 꽃 이야기 무궁화 1924.2.4. 무궁화는 잘도 핀다 1926.8.20. 꽃철은 무궁화 1927.7.31. 무궁화 제철 만나 1928.8.12. 날마다 새꽃을 피우는 무궁화 1931.8.26. 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