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도쿄초혼사(東京招魂社) 건립 이후 수많은 전사자를 합사(合祀)하는 예대제(例大祭, 레이다이사이: 신사의 신에게 고하는 의식)가 이뤄졌는데 이는 군대가 합사자를 결정하고 일왕의 재가를 받아서 혼을 불러내어 야스쿠니의 제신(諸神)으로 합사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곧 군의 조사와 합사기준에 따라 판정→영새부(寧塞簿, 영혼이름을 적은 명부)작성→일왕보고→재가→초혼→합사의 수순을 밟는 것이다. 전사자는 유골이나 위패가 아닌 영새부(寧塞簿)에 기록되며 이를 신관들이 오하구루마(영새부를 태우는 영혼 가마)에 태워 야스쿠니 본전(本殿)에 자리하는 초혼제를 진행한다. 이후 합사제(合祀祭)를 거행하고 제주(祭主)인 일왕이 그 길을 걸으며 참배한다. 영새부는 사전에 안치되어 신체에 준하는 취급을 받으며 이로써 야스쿠니의 제신이 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이때 만주, 대만, 조선, 오키나와와 일본 내에 살고 있는 유족들을 국비로 야스쿠니에 초대하여 전사자가 신(神)이 되는 과정 곧 예대제가 진행되는 참도(參道) 양쪽 끝에서 참배하게 한다. 이후 야스쿠니 예대제를 마친 유족들은 신주쿠교엔, 황궁, 우에노동물원 등 도쿄의 명소를 구경하고 귀향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본은 해외 전몰자 240만 명 가운데 현재 116만 명의 주검이 미송환 된 상태로 전사자유골의 약 48%가 여전히 해외에 방치된 상태이다. 이 가운데 바다에서 전사한 경우와 상대국 국민감정으로 수습할 수 없는 주검을 제외한 60만 명은 지금도 수습이 가능하지만 일본 정부는 주검수습에 소극적이다. 이렇게 정부가 적극적으로 주검수습을 미루는 것은 일본 특유의 ‘초혼(招魂)’ 사상과 관련이 깊다. 특히 야스쿠니의 제신(祭神)으로 모셔지는 것은 최고의 예우이기에 주검 수습에 그다지 힘을 들이고 있지 않는 측면도 있다.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2010년 일본 NHK에서 방송된 ‘의혹의 주검을 좇아, 전몰자주검수집의 어둠’이라는 기획물이다. 일본정부는 1952년부터 1975년까지 3차에 걸친 전사자 주검수습 작업을 해왔으나 필리핀의 경우 거액을 들여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는 과정에서 수습된 주검이 일본인 전사자 주검이 아니라 필리핀인 주검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주검수습이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후 각 전쟁터에서 전사한 전사자 주검 수습은 거의 방치된 상태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전통적으로 일본의 장례식은 반드시 주검이나 죽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1919년 3월 10일, 전남 광주 만세 시위 도중 일경에 의해 왼팔이 잘려 낭자하게 흐르는 피를 부여잡고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결코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않았던 남도의 유관순, 윤형숙 (1900.0.3~1950.9.28, 다른 이름 윤혈녀) 열사를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린다. 전남 여수시 여수문화홀에서 오는 9월 27일(금) 낮 2시부터 여수시와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회장 오룡) 주최로 열리는 이번 학술대회는 “의혈지사 윤형숙을 기억한다”라는 주제로 3.1운동100돌 기념 학술세미나와 추모제를 겸하며 윤형숙 열사 관련 학술세미나는 이번 행사가 처음이다. 이날 학술 세미나는 한규무 광주대학교 교수의 ‘항일애국열사 윤형숙 관련자료 검토 및 생애와 활동 재조명’과 김호욱 광신대학교 교수의 ‘일제강점기 호남 기독교 선교와 윤형숙의 항일운동’ 발제에 이어 토론은 김인덕 청암대학교 교수, 김병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윤치홍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 독립유공자발굴위원장이 맡아 그동안 학술적으로 조명 받지 못했던 윤형숙 열사의 삶을 재조명한다. 이어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에 있는 윤형숙 열사 무덤을 찾아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나는 영감을 믿지 않는다. 나는 단지 그릴뿐이다. (I don’t believe in inspiration. I just keep working)” 이 말은 프랑스의 마지막 구상회화 작가 베르나르 뷔페(1928-1999)가 한 말이다. 어제(7일), 서울 한전아트센터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박연도(86세) 화백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나는 문득 베르나르 뷔페의 이 말이 떠올랐다. 영감(靈感)으로 떡칠한 그림들이 판치는 세상을 일찌감치 베르나르 뷔페는 거부하고 ‘자신의 색깔’로 사물과 세상을 표현했다. 박연도 화백의 그림을 한 점 한 점 감상해 나가는 동안 나는 '구상화 작품'이 무엇인지 조금씩이해할 수 있었다. 꽃단장한 ‘시집가는 날’, 스무 살 처녀의 ‘성년을 맞이한 여자’, ‘꿈많은 어린이’ 등의 인물화 앞에서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내 유년 시절 바로 이웃집에서 보았던 너무도 정겨운 모습들이 그림 속에서 살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돌담으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시골집을 그린 ‘평화스런 마을’, 갈매기 나는 ‘동해의 여름’, 물오리가 노니는 ‘방화 수류정’ 작품에서는 더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받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벚꽃의 명소로 도쿄 한 복판에 자리한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이하 ‘야스쿠니’)는 일본 군국주의 상징의 현충시설이다. 이곳에서는 A급 전범(戰犯)뿐 아니라 우익의 원조이자 정한론자(征韓論者)인 요시다쇼인과 이토히로부미를 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1910년 9월 15일 한국인에게 치욕스런 한국병합 봉고제(奉告祭)를 올린 곳이다. 야스쿠니에는 일제침략기 징용으로 전쟁터에 강제로 끌려 나가 숨진 한국인 21,000여명과 대만인 등이 합사(合祀)되어 있어 한국을 비롯한 전쟁 피해 당사국으로부터 끊임없는 문제제기를 받고 있는 영령 추도시설이기도 하다. 야스쿠니는 총면적 93,356㎡(28,289평)로 일본에 있는 수많은 신사(神社)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1869년 도쿄초혼사(東京招魂社)로 시작하여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라는 이름으로 바꾼 것은 1879년이다. 이곳에서는 에도막부 말기(1853)부터 명치유신(1868)을 거쳐,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일본이 저지른 국내외 전쟁에서 숨진 군인, 군속 등 전사자의 영령을 제사한다. 야스쿠니에는 태평양전쟁 사망자 213만 3,915명, 중일전쟁 19만 1,250명, 러일전쟁 8만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지청천 장군을 ‘19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뽑았다. 장군은 1888년 1월 25일(양력 3월 7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장군은 1907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1909년 폐교되어 일본 사관학교에 유학하여 1912년 5월 졸업할 때까지 군사학 등을 공부했다. 이후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으로 독립군 간부와 병사 양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서간도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교포사회를 기반으로 성립한 중학과정의 독립군 양성 학교였다. 장군은 1921년 3월 한인 무장세력이 세운 ‘대한의용군 총사령부’의 참모부원으로 선출되었고 ‘대한독립단’으로 개편된 후 군사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6월 하순 홍범도ㆍ안무(安武) 등의 부대와 함께 장군 휘하 부대는 고려혁명군정의회 제3연대로 편성되었는데, 장군은 이 부대의 주요 간부 직책을 맡게 되었다. 1925년에는 남만주의 통합 독립운동 조직이자 교민 자치조직인 정의부(正義府) 군사위원장과 사령관을 겸했고, 1928년에는 만주의 유력조직인 정의부ㆍ참의부ㆍ신민부 등 3부(府) 통합운동에 노력했다. 1930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차별과 빈곤에 맞서온 인권 변호사 우츠노미야 겐지(宇都宮健兒, 73살) 씨는 요즘 한국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인권을 침해당한 사람의 피해회복이 문제의 핵심인데 당사자 없이 국가 간에 전부 결정을 내려 버렸습니다. 일본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진지하게 반성하며 행동으로 나타내는 일이 필요하고 그것을 정부와 국민이 함께 해야합니다.” 후덕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의 우츠노미야 겐지 변호사(전 일본변호사연합회 회장)는 지난 8월 24일 YTN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베정권이 우리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 반발해 수출규제와 백색 국가 제외 조치를 단행한 이후 이른바 양심적인 일본의 지식인 들은 우츠노미야 겐지 변호사처럼 저마다 ‘아베정권의 철딱서니 없는 처사’에 강한 불만과 질책을 쏟아내고 있다. 에히메현(愛媛県)의 남서부에 있는 세이요시(西予市)에서 태어난 우츠노미야 겐지 변호사는 1946년생으로 그가 태어난 시기는 패전으로 일본 전역이 폐허 더미였을 시기였다. 그가 태어난 고향 아케하마쵸(明浜町)는 반농반어(半農半漁) 지역으로 그는 9살 되던 해에 가족과 함께 오이타현(大分県)으로 이사했다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효창원에 잠들어 계신 외할아버지(차리석) 무덤에 외할머니(강리성)가 합장되었다는 용산구청의 안내판 수정(2019.8.14) 소식을 듣고 우리 가족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지 58년 만에 이뤄진 숙원이라 더욱 감회가 깊습니다.” 지난 22일 오후 3시, 늦여름 매미가 세찬 소리로 울어대는 용산 효창원 내 차리석(車利錫, 1881 - 1945) 선생의 무덤에서 만난 차리석 선생의 외손자 유기방(64살), 유기수(61살) 씨는 이렇게 말을 꺼내면서 기자 앞에 두툼한 서류 뭉치를 내놓았다. 흔히 효창원 묘역에 모셔진 분은 3의사 묘역에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선생과 임정요인 묘역에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선생 그리고 김구 선생 이렇게 7인이 묻혀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9인이다. 7인 외에 2인은 다름 아닌 김구 선생의 부인 최준례 여사와 차리석 선생의 부인 강리성 여사다. 차리석 선생의 무덤에는 지금으로부터 58년 전인 1961년 4월 18일 서울에서 세상을 뜬 부인 강리성 여사가 합장되어 있으며, 김구 선생의 무덤에는 1999년 4월 12일 부인 최준례 여사가 남양주 진건 송정리에서 이장되어 합장되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일제강점기 친일단체 가운데 ‘조선신궁봉찬회(朝鮮神宮奉贊會)’라는 것이 있다. 이 단체는 도쿄에 메이지신궁(明治神宮) 건립계획(1915)이 확정되면서 건축비 모금을 위해서 일본에 명치신궁봉찬회가 결성되자 조선지부로 1933년에 설립되었다. 이 보다 앞서 《순종실록부록》 8권, 순종 10년 1월 10일(1917) 기록에는 “양궁(兩宮)에서 명치신궁(明治神宮)의 봉찬회(奉贊會)에 일금 1만 2,000원을 기부하였다.(창덕궁(昌德宮) 7,000원, 덕수궁(德壽宮) 3,000원, 왕세자 2,000원이다.)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메이지신궁 건립에 조선의 돈이 일찍부터 흘러들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궁봉찬(神宮奉贊)은 메이지신궁이 완성된 이래 곧 100년을 앞둔 지금도 유효하여 메이지신궁 누리집에는 “메이지신궁은 1921년 메이지왕과 부인소헌왕후를 모시는 사당으로 이제 곧 100년을 맞이합니다. 많은 봉찬(기부)을 바랍니다.”라고 써 놓았다. 기부금을 모으는 목적은 메이지신궁진좌100주년기념사업자금(明治神宮鎮座百年祭記念事業資金)이라고만 써 놓았을 뿐 구체적인 사업 내용은 밝혀 놓고 있지 않다. 금액은 불문하며 5천 엔(우리돈 5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오는 15일(목)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지난 1919년 4월 경기 화성시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징역 12년을 받은 이봉구(李鳳) 지사와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된 박기옥(朴己玉) 지사 등 178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49명(독립장 1, 애국장 8, 애족장 40), 건국포장 28명, 대통령표창 101명으로, 이 가운데 생존 애국지사는 1명(백운호, 89살)이며, 여성이 10명이다. 훈ㆍ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74주년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본인과 유족에게 수여된다. 15일(목) 중앙기념식에서는 포상자 가운데 유일한 생존애국지사로 항일비밀결사에 참여하고 1942년 사회 질서와 안전에 해를 끼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고초를 겪는 등 조국독립에 기여한 백운호 지사(대통령표창)가 직접 포상을 받을 예정이다. 또한, 1925년부터 제주청년연합회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1931년 6월 비밀결사에 참여해 활동하다 체포돼 징역 5년을 받은 고 김한정 선생(남, 건국훈장 애국장)과 1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