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왕릉중 태릉은 서울 노원구 태능 선수촌으로 잘 알려진 곳의 중심부에 있다. 태릉은 조선의 11대 왕이었던 중종의 제2계비로 13대 명종의 어머니로, 12대 인종이 일찍 죽은 뒤 12세 어린 명종을 왕으로 앉히고 뒤에서 수렴청정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문정왕후(1501~1565) 윤씨의 릉이다. 문정왕후 윤씨는 중종의 세번째 부인으로 연산군을 내쫒고 등극한 중종이 살아있을 때는 제1계비 장경왕후가 낳은 인종을 친 아들처럼 잘 보살피다, 그가 일찍 죽자 자신이 늦게 낳은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 권력의 야욕에 불탔다. 문정왕후는 조선시대 남성중심인 유교 성리학 시대에 내노라는남성관료들을 호령하며 임금의 뒤에서 왕권을 휘두르고, 대신들의 빗발치는 반대 상소를 무릅쓰고 억눌렸던 불교를 한때 나마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도첩제의 실시로 폐지되었던 승과제도를 부활하여 당대 가장 유명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를 장원급제로 발굴하였고, 당대 불교계를 이끌던 허웅당 보우대사를 강남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고 궁궐로불러들여 국사를 의논하였으며, 그로 하여금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잠들어 있고,태조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대나무고장으로 옛부터 이름 난 고을은 담양이다. 담양은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굵고 큰 대나무가 많이 자라나, 대나무로 다양한 생활용품들을 만들어서 전국에 팔아왔다. 대나무는 속이 텅비어있지만 곧게 자라서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특징이 있어서 이를 길고얇게 살을 만들어 대나무 그릇, 우산, 부채 등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었다. 플라스틱 용품이 나오기 전에는 대나무야말로 정말로 좋은 재료였지만, 이제는 플라스틱에 그 지위를 넘겨주고 대나무고장으로서의옛 명성은 대나무골관광산업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죽녹원은 대나무로 생업을 삼았던 담양에 울창한 대나무를 주제로 공원을 만들어 대나무의 멋을 느낄 수 있도록 오솔길과 정자를 조성하였다. 5월이면 죽녹원의 왕대들에 굵은 죽순이 솟아나는 모습이 장관이다. 이때 대나무 축제도 열린다.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찾을 때는 아니지만 대나무의 곧은 기운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봄을 재촉하며 찾아보았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비었느냐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윤선도 오우가 중에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남 당진의 서쪽으로 가면 서해바다가 있다. 이곳은 고대 중국으로 가는 뱃길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배를 타고 가면 중국의 산동반도와 가장 가까와 이곳을 차지하는 것은 중국과 교역에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기에 고대 삼국시대에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특히 삼국시대 고구려가 한반도와 만주를 차지하고 있을 때, 백제는이곳을 차지하고 있어서 가장 번창하였다. 반대로 이곳을 잃어버린 뒤 백제는 그 힘이 약해졌다. 그런 지리적 위치였기에 백제는 이곳을 뺏기지 않으려 애썼고, 신라는 반대로 이곳을 뺏으려 하였기에 두나라 사이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삼국통일 무렵에는 이곳을 신라가 점령하였고, 당시 신라의 구법승들도 여기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들어가서 불교학을 공부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스님이 바로 의상대사였다. 의상과 원효는 이곳 근처 어디에선가 배를 기다리다 노숙하게 되었는데, 원효는 한 밤에헛간 같은 곳에서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바로 옆에있던,바가지에 고여있던 물을 마시고 편히 잠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다시 보니 그 바가지에 고였던물이 해골물 임에 깜짝 놀랐고, 사물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 가사문학의 본거지인 담양에는 많은 정자들이 있다. 그 중에 오늘은 식영정, 취가정, 독수정을 돌아본다. 식영정은 지난번 기사에 본 송강정 환벽당과 함께 송강 정철이 거하면서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등을 지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본래 식영정은 김성원이 스승인 석천 임억령을 위하여 지은 정자로, 식영정이란 그림자도 쉬어가는 정자라는 뜻이다. 식영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작은 정자로 한칸 온돌방 하나가 있고, 나머지 3칸은 마루가 깔린 대청이다. 식영정의 아래에는 서하당이 있는데 이는김성원이 자신의 호인 '서하당'을 건물의 이름으로 붙인 것이고, 그 옆에는 부용대가 있는데 부용대 앞에는 연꽃을 심은 연못이 있어 여름이면 그 연못에 부용대가 비쳐 정자는 작지만 연못에 다리를 뻗고 있는 모습이 거울처럼비추어 선계를 보는 듯 아름답다. 김성원은 정철과 같은 시대 사람으로 당시 이곳에 머물던 4명의 문인을 천상의 신선처럼식영정 4선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이다. 이들은 이곳 성산의 경치좋은 곳 20곳을 택하여 각각 20수씩 시를 지었는데 이를 모두 합하면 8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무등산을 낀 광주, 담양에는 호수와 계곡의 주변에소쇄원을 비롯한 많은 원림과 정자가 있다. 그 가운데 오늘은 면앙정, 송강정, 환벽당을 둘러본다. 정자는 한국인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건축물이며, 자연속에묻혀 살고자 한 한국인의 대표적조경의 기법이기도 하였다. 강, 계곡,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경치가 좋은 곳에는 어디에나 정자를 짓고, 무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지냈으며, 이곳 담양에는 차갑고 추운 가을, 겨울에도 이용하기 위하여 정자에는 한칸온돌방도 들여서 사계절 선비들이 만나서 소통하는쉼터로 삼았다. 정자는 대부분 경치가 좋은 아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짓되 정면은 주로 3칸으로 지었으며, 지붕의 형태는 팔작지붕으로 날아갈듯하게 날렵한멋을 내었다. 정자에 오르면 어디나많은 시인들이 다녀가면서 자신이 정자에서 느낀 시를 썼고, 그 중에 좋은 시들은 널판에조각으로 새겨서 정자의 대들보주변에 붙였다. 많은 시가 붙은 정자는 그만큼 훌륭한 시인들이 거쳐갔다는 것을 뜻한다. 면앙정은 송순이 지은 정자로, 송순은 1493~ 1582를 살았는데 나이가90세까지 살아 당시로는매우 드물게 장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소쇄원은 전남 담양군에 있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원림이다. 소쇄원에는 계곡옆에 경사진 곳에 돌로 축대를 쌓아 대지를 만들고, 그 대지위에 집 3채를 지었고, 주변에는 여러 인공시설을 하였다. 서쪽이 언덕으로 동향한 대지에는 기와집인광풍각과 제월당 그리고 초가정인 대풍대가 있으며, 기와집 주변에는 자연석 막돌담장을 두르고 그 위에는 기와를 이어 인공구조물을 만들었다. 그런데 소쇄원은 사람이 자기의 의도에 맞도록 축대도 쌓고 담장도 치고, 연못도 만들고 물길도 조정하면서 인공적으로 가꾸었으나, 그 인공적인 맛 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맛이 느껴지는 것이 특징으로, 한국인들의 자연에 대한 심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연유로 한국인뿐 아니라 외국에도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정원을 느끼고자 찾는 가장 유명한 명소가 되었다. 자연에 인공을 더하였으나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인공이 자연속에 동화되어버리는 느낌을 주고 있으며, 그런 느낌은 한국의 옛 건축물들에서 많이느낄 수 있는 조경기법으로 세계인이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연을 사람의 입맛에 맞도록 만들는 조경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속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 근대사의 큰 인물로일제강점기와 해방 후를 치열하게 살다 암살의 흉탄에 생을 마감한고하(古下) 송진우선생의 생가를 찾았다. 선생의 생가는 전남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에 있는 한국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농촌 집이다. 집의 구성은 따뜻한 지방의 가옥 모습으로 각각 일자(一字) 형태로문간채, 안채, 그리고 곳간채로 구성되었다. 이농가는조선조 양반가의 집처럼 번듯한 기와집도 아니었고, 또 웬만한 양반가의 집처럼 남자들의 공간인사랑채가 별도로 구획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 집은 담양지역 양지바른 경사진 언덕에 돌로 축대를 쌓아 평평한 대지를 만들고, 그 대지 위에 터를 다듬어 집을 지은 것이다. 이 집은송진우선생이한국에서 교육 언론에 종사하면서독립운동에 공헌한 중요인물로 인정되어,생가터에 다시 복원한 집이다. 그런데 선생이 살았던 당시의 집이 아니어서 한편으로는아쉬웠고 또 한편으로는이렇게라도 복원되어 다행스러웠다. 이 집은 한말 의병장 성재 기삼연(1851~1908)이 1896년 전남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1902년 체포되었고 이후감옥을 탈출하여 은거했던 집이기도 하다.기삼연은 고하 송진우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산 개심사는 상왕산 서북쪽자락에 있다. 그런데 상왕산의 서남쪽 계곡에는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이 있다. 서산마애삼존불 근처는 보원마을로 이곳은 1970년대 까지도 농촌마을과목장으로 소떼가 풀을 뜯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이 문화재지표조사결과 절터로 판단되어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거쳐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고, 이곳이 고려시대 크게 융성했던 보원사터임이 밝혀졌다. 보원사터는 약 3만평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발굴결과 큰 석조(물을 담은 큰 돌그릇)은 보물 102호, 당간지주는 보물 103호, 오층석탑은 보물 104호, 법인국사보승탑은 보물 105호, 보원사지에서 출토된 철불좌상(문화재지정을 아직 못받음) 그리고 수많은 소불들 등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현재 보원사터에는 절의 입구에 높이 서있던 당간을 받치던 당간지주와 오층석탑 법인국사보승탑과 탑비가 남아 있으며, 이 석물들은 다행히도 땅속에 잘 묻혀 있어서 거의 훼손되지 않고 온전한 모습이다. 땅위에 노출되었더라면 손상되었을 것인데, 흙속에 묻혀있었던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은 박물관에 이전되어 있는 보원사터 철불좌상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산 마애삼존불은 백제시대 언젠가조성된 불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전해지고 있는 백제불상 가운데가장 아름다운 마애불상으로 넉넉한 백제인의 마음씨를 잘 표현한 작품으로도알려져 있다. 서산마애삼존불은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상왕산계곡 가파른절벽에 새겨진불상으로 운산면에 있다고 하여 '운산마애석불'이라고도 한다. 본래 백제시대 부르던 이름은 알 수 없고, 서산군에 있다고 하여 서산마애삼존불로 불리워지고 있다. 현재는공식명칭이 '용현리마애삼존불'로국보 제84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이곳은 당시 백제의 서울이었던 부여, 공주, 익산에서서해 뱃길 포구인태안이나 당진으로 가는 길목으로 가야산을 넘어오는 지름길이다. 가야산 근처에는 많은 큰 절들이 있었는데,조선 후기 까지도 가야산건너편에가야사라는 큰 절이 있었고, 상왕산 서산마애삼존불 근처에는 보원사라는 큰절도 있었다. 또 서산마애삼존불이 있는 상왕산 건너에는 서산 상왕산개심사도 있다. 그러나 이 절들은흥선대원군이 유명 풍수지관의 말에 따라 자기 자손에서 2대 천자를 배출하기 위하여 빼앗기로 마음먹은 뒤, 가야사의수많은 전각들을완전히 불태워 폐사하고, 그곳에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석등은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등 절의 중요한 건축물이나, 야외에 세워진불상 앞에 불을 밝히기 위하여 세운 조형물이다. 석등은 그 뜻과 같이 불을 밝히는 돌로 만든 조형물이지만 단순히 어두운 밤에 불을 밝히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부처님을 모신 전각 앞에서 중생계의 무지를부처님의 진리로 밝힌다는 의미가 있으며, 또 등불이란 등잔 속에 기름으로 자신의 몸을 태워 불을 밝힘으로 자기 안에 있는 깨달음의 불성을 보이고자 하는 큰 뜻도 있다. 곧 불을 밝힌다는 것은 자신을 태워서 세상을 밝힌다는 의미도 포함한 것으로 타인을 위해 자신의 바른 행동으로 보살행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원대한 대승불교의 보살행을석등이라는 조형물에 표현하고자 하였기에, 한국의 석등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매우 정교하고다양한 모습으로 발달해왔다.이런 석등은 한국불교만의 독특한 불교조형물로 시대를 거치면서 발달하여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나, 대승불교가 활짝 피어난 중국이나, 한국불교가 전수된 일본과 달리 매우 독특한 형상으로 다양하게 발달되어왔다. 그런데 일반적인 한국의 석등과는 너무도 다른 흥륜사 석등이 있어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흥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