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주 동천동 소금강산에는 옛 굴불사터 사면석불이 있다. 사면석불이란 네모진 바위의 각 면에 불상을 새겼다는 것으로 자연석 육면체 바위에 각각의 방위별로 그에 합당한 의미가 있는 불상을 새긴 것이다. 이 사면석불의 유래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재위742년~765년)이 현재 굴불사터 사면석불 바로 위쪽에 있는 백률사(栢栗寺)로 가기 위해 이곳에 이르렀는데,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임금이 소리나는 곳을 파보게 하였더니 큰 바위가 나왔다. 파올린 바위에 왕명에 따라 사면에 석불상을 새기고 그곳에 절을 지어 굴불사(掘佛寺)라고 하였다. 사면석불을 새긴 까닭은 이곳을 중심으로동서남북 모두 불국토임을 표현한 것이다. 이 사면석불은 서쪽에는 아미타삼존불상을 새겼다. 삼존불은 서방정토의 아미타불과 협시불로 보이는데, 본존불과 관세음보살은 비교적 온전한 모습이나 아미타불 오른쪽에 있는 보살은 머리부분이 없어져 무척이나 아쉬웠다. 동쪽에는결가부좌를 한 불상이 손바닥에 보주를 들고 있는 모습인데, 이는 약사불로 현생 중생들의 온갖 병고를 치료해준다는 의미가 있
[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 창건한 절로 고승 원효대사와 자장율사가 거쳐간 절이다. 원효대사는분황사에서 출가하였으며, 화엄사상을 깊이 체득하여 난해하기 이를데 없는화엄경을 해설한 화엄경소, 법신 비로자나불을 믿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 자신과 국가가 사천왕 등의 보호를 받 다는 금광명경을 해설한 금광명경소 등 많은 책을 지었다. 원효스님이 열반에 든 뒤에는 그의 아들인 설총(한국 유학자 중 성균관 문묘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 원효대사의 조각상을 만들어 모셔두고 설총이 죽을 때까지이곳 분황사에서아버지인 원효스님을 공양하였다고 한다. 원효대사의 조상은 고려 후기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이 있을 때까지 있었다고 한다. 분황사의 기록에 따르면, 분황사 금당전각의 벽에는 신라시대 신묘한 화가였던 솔거가 그린 관세음보살도가 있었다고 전하며, 경덕왕 14년(755년)에는 무게 30만근에 이르는 거대한 약사여래입상도 봉안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번창하던 분황사는 고려 후기 몽골의 침략으로 황룡사와 함께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과거 분황사의 흔적은 경내를 둘러싼담장 아래 널리 펼쳐진 주춧돌과 각종 석조 유물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주의 동쪽 바닷가에는 감포가 있다.감포(感浦)란 감은사(感恩寺)가 있는 마을의 포구라는 뜻이다. 이곳은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켜주겠다고 서원한 통일신라 문무대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있는 근처이기도 하다. 이곳 감포에서 감은사와 대왕암(문무왕의 수중릉)까지는 8km 정도이다. 그런데감포 해안은 지하의 뜨거운 용암이 지각을 뚫고 솟아올라 그대로 굳은 검은 현무암지대다. 지구의 표면 안쪽에는 끊임없이뜨거운 용암이끓고 있는데, 용암이지구의 약한 곳을 뚫고 나와 뜨거운 용암이굳어 바위가 된 것이다. 이는 용광로의 쇳물이 땅에 쏟아지면 흐르다 그대로 굳은 듯그 모양이 거칠기 그지 없다. 수 천 년 전분출한 용암이 바다속 차가운 물에 노출되어 갑자기 굳은 바위가 된 감포앞바다의 현무암지대는 오랜 세월동안 거친 파도에 노출되어 파도와싸웠지만, 지금도 그 모습이 처음 분출했던 현무암처럼 여전히 거칠다. 겨울이 한창인 1월 말, 그 날 따라 일년에 몇 번 없다는 거친 파도가 몰려오는 날이었다.다행히 바람은 거세지 않고, 파도만 높은데 몰려오는 파도가 마치 바다의 용트림 처럼 거칠었고,현무암과 부딪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주 월성(月城)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던 이곳은 신라 칠처가람의 하나인 황룡사가 있었다. 칠처가람이란 세상에 온 석가모니불보다 먼저 있었던 과거칠불(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불, 석가불)이 있었던 곳이라는 뜻으로, 신라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기 전부터 이미 과거부처님들이 왔던 불국토였다는 것을 주장하는 증거로 신성시 하였던 절들이다. 신라 칠처가람은 지금의흥륜사, 영흥사,황룡사지, 분황사, 영묘사, 천왕사, 담엄사이다. 신라 진흥왕 14년(553년), 새로이 궁궐을 짓기 위하여 터파기를 하던 중 갑자기 황룡이 나타나 궁궐짓기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절을 짓게 되었으며, 절이름도 황룡이 나타났다하여 황룡사가 되었다. 황룡사는 553년 궁궐로착공하여 절로 바꾼 뒤 569년 완공하였다. 그렇게 지어진 황룡사는 신라를 지나 고려 후기인 몽골의 침략시까지 그대로 남아있다가, 몽골의 방화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이 황룡사를 불사른 것은 고려인들이 부처님에 의지하여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고려인들이 의지하던 부처님이 늘 계시고 보호한다는 믿음의 힘은 바로 황룡사와 고려대장경이었기 때문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북 김천시 증산면에는 부처님의 신령스움이 깃든 불령산(佛靈山) 수도암(修道庵)이 있다. 수도암은 신라 후기인859년(헌안왕 3년) 한국의 풍수지리학을 체계화한 풍수종조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도선국사는 수도암을 창건하기전수도암뒤에청암사를 창건하고 수도하던 중, 멀지 않은 이곳을 찾게 되었는데,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로 편안한 산세가이곳을 중심으로 잘 짜여진 지형에 감탄하고, 이곳에서수행을 한다면 수행자들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수도암을 창건하였다. 이후 많은 수도승들이 거쳐갔는데,고려를 지나 조선조에 이르러 인조27년(1649년) 벽암 각성스님이 중창하였다. 첩첩산중 깊은 산속에 위치하여 세상과 동떨어져 오직 깨달음을 구하기 위하여수도승들이 도를 닦으며 이어오던 암자는 조선 말 동학혁명을 거치면서 세상과 만나게 되었고, 그 과정에전각의 일부가 소실되었다. 그 뒤 1950년 한국전쟁 때 산속에 숨은빨치산 소탕작전으로 수도암 전각들이 모두불에 타고 말았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뒤, 1960년 이후대적광전, 약광전, 요사채, 나한전 등을 다시 짓고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수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에 위치한 인각사는 삼국의 통일기에 건립된 고찰이다. 인각사 창건기에 따르면 선덕여왕 12년(643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그보다 1년 전인 선덕여왕 11년(643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이후 인각사는 구산선문의 가지산문의 사찰로 고려후기 크게번창하였다. 인각사가 크게 번창한 때는 고려 충렬왕 10년(1284년), 일연선사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부터다. 이때선종의 9개 종파의 대표적 본찰인 구산선문의 대표들이 모여전체회의를 2회에 걸쳐 열었고, 이후 인각사는 선종사찰의 중심이 되었다. 5년 뒤 충렬왕 15년(1289년) 일연선사가 입적하자 보각(普覺)이라는 시호와 정조(靜照)라는 탑호를 내렸고, 당시 문호였던'민지'가 비문을 쓰고, 글자는 당대 최고로 여기던왕희지의 글씨를 책속에서집자하여 새겼다고 한다. 일연선사는 인각사에 주석하면서 한민족의 고대사를 정리하여 우리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삼국유사가 저술되기 전에도 한민족의 유래를 단편적으로 밝힌 책들은 많이 있었으나, 당시 유학자였던 김부식은 한민족의 고대사를 정리하면서 중국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화는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국방유적이 많이 있는 곳이다. 조선의 서울인 한양으로 들어오는 한강의 길목을 지키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기에, 강화도 해안가 돌출된 곳 언덕배기에는 모두 돈대가 들어서 있어 적의 침입을 막았다. 그 중에도 광성보는 김포와 강화 사이를 지나는 좁은강화해협의 돌출된 돌산이다. 광성보가 처음으로 방어시설이 갖추어진 때는고려시대 강화로 서울을 옮긴 고려무신정부가 몽골군을 방어하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별 관심없이 세월이 가고광성보가 국방요새로 본격적인 해안진지가 된 때는 조선조 후기인효종 9년(1658년)이다. 효종은 정나라의 볼모로 다녀온 후 북벌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이를 실행하기에는 국력이 뒷받침되지못하였지만 한양이 위급시 방어기지로 강화를 요새화 하였다.이때 광성보와 함께 많은 돈대들이 축조 되었다. 이렇게 세워진 광성보 안에는 광성포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있는데, 광성보에서는신미양요(1871년)때 미군과 사투를 벌였다. 당시 이곳에는조선군 500여명과 어재연장군이 지키고 있었다. 이땨 미군과전투에서 300여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하고,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29일 저녁 5시 강화도 장화리엔 사진작가들이 무려 200여 명이나 몰렸다. 2018 무술년을 마무리 하면서 멋진 해넘이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하지만 구름은 해넘이를 보여주기 싫어 심술을 부린다. 그럼에도 간간이 얼굴을 내미는 해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을잡기 위한 사진작가들의 집념도 대단하다. 무술년의 해넘이를 이렇게 아쉬운 모습으로 보내지만 2019 기해년 황금돼지해를 맞이하는 해맞이는 장관을 보일 것이다. 또한 우리 겨레의 기해년을 더욱 활짝 열기 위한 몸부림이라 생각해본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한 켠에는 박물관 조경의 조각품들처럼 솟아있는 석탑들이 있다. 이 석탑들은 고려시대 조성된 것들로대부분 국보와 보물들로 지정받은 선조들의 혼이 담겨있는 보물들이나, 지금은 제자리를 떠나박물관의 전시물로 박물관 정원의 조경물처럼 전시되어있다. 이 석탑들은 본래 각각 해당 절의 대웅전 앞에서 인간과 우주의 진리를 깨달아 이를 나타내 보이고자 한 부처님의 진리를 조형으로 표현하여 제작되었으나, 조선조 불교의 탄압으로 그 절들이 폐사되자 건물들은 다 무너지고 썩어 없어진 빈터에, 더러는논밭으로 바뀌고, 더러는잡초가 가득한 폐허 속에 나뒹굴게되었다. 그리고 조선이 망하여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임자없는 선조들의 귀한 작품들은 일본 제국주의고관대작들의정원 장식품으로 쓰기 위해 서울 경복궁으로 자리가 옮겨져 일본행을 기다리다가 갑자기 해방을 맞자 경복궁 한 켠에서 그저오가는 사람들의 눈요기 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광복 이후에도 고려시대 석탑들은 수십년을 경복궁 안에서 보호(?)받고 있었는데,구 총독부청사로 쓰던 국립중앙박물관을 허물고용산에 다시 지으면서, 이곳 용산으로 함께이전하였고, 박물관 주변에 산책로 겸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즈믄 해를 살아온한민족의 주거형태로는 초가와 기와집이 있었다. 기와집은 돈 많은 양받들이 주로 살았고, 대부분 양민들은 초가집에 살았다. 그러나 급속히 발전(?)하는 산업화와 건축기술의 변화로 이제 초가집은 아예 짓지 않고 있고, 기와집도 새로 짓는 것은 보통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이땅에서 오랜 역사를 살아온 한국인이 주거양식을 알기 위해서는이제 용인민속촌이나 정부에서 지정 보호하고 있는 전국의 민속마을을 가보아야만 한다. 전국의 민속마을로 정부에서 지정한 마을로는 제주도 성읍민속마을, 경주 양동마을, 안동 하회마을,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 전남 순천 낙안읍성 그리고 충남 아산 외암리마을이 있다. 50년 전에는 전국의 시골마을은 대부분 이러한 마을이었으나, 이제는 주거양식이 바뀌어서 일부러 찾아가야만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제 이런 민속마을을 찾는 사람들은 한국인들보다 오히려 외국인들이 많아졌다. 겨울 추위가 다가온 12월 중순 초가는 새롭게 옷을 입어 노랗게 변한 외암리마을의 모습이 정답게 옛정취를 보여주고 있었다. 오늘 아무리 편리하고 번듯한 고층 아파트시대라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