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원도 고성에 있는 화암사(禾巖寺)는 신라 혜공왕때인 769년 창건한 절이다.신라후기 고승이었던 진표율사는 김제 금산사를 중창한 스님으로 변산 부사의 방에 들어 깊은 수련을 하였고, 이때지장보살과 미륵보살로부터 법을 전해받고 산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진표는 대연진(大淵津)에서 용왕으로부터 옥과 가사를 받고, 용왕의 권속들이 도와 당시 큰 연못이었던 곳을 메워금산사를 크게 중창하였다고 한다. 진표율사는 금산사에 머물며 해마다 개단법회(점찰법회)를 통하여 중생교화를 하였으며, 이후 금산사를 떠나 속리산 법주사를 중창하고, 다시 강원도로 가 금깅신 발연사와화암사를 개창하였다.진표율사는금강산으로 와서도금산사에서 시행했던 점찰법회를 열어, 흉년에 굶주리던 많은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진표율사는 금강산 발연사 동쪽 큰 바위 위에 앉아 깊은 선정에 들었다가좌탈입망하였으며, 제자들은 스승의 선정에 든 모습을 그대로 두고 매일같이 공양을 올렸다. 이후 살이 다 썩어지고난 뒤그의 해골은 바위에서무너져 떨어지게 된 뒤에서야제자들이 뼈를 모아흙을 덮어 진표유율사의무덤이 되었다. 이렇게 신라말진표율사가 창건한 화암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372년 고구려,384년 백제에불교가 공식적으로 들어온 뒤, 한국 땅은 불국토가 되어갔다. 그러나 서력기원 45년 가야땅에도 수로왕비 허왕옥이 인도의 불상과 탑을 가지고 온 기록이 있으니, 불교의 역사는 300년 이상 더 길다. 이렇게 들어온 불교는 삼국시대가 지나고 고려시대가 된 뒤에도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정신적 의지처가 되어 한국문화는 온통 불교문화로 화려하게 꽃피웠다. 이른바 불국토다. 한국의 불교문화 중에는 매우 화려한불상과 석탑과 건축물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건축물로는 백제시대인 600년 초기에 무왕이미륵불국토를 염원하며 건립한 익산 미륵사가 있었다. 그 미륵사에는목조로 9층목탑을가운데 세우고, 양쪽에는 9층석탑을세웠다. 이를 본신라는 백제의 미륵사 9층목탑과 같은훌륭한 탑을 짓고자 선덕여왕과 자장율사의간청으로백제의 대목장 아비지를 초청하여 황룡사에도 9층목탑과 금당을 비롯한 건축물들을 지었다. 한편 이때 고구려는 당나라와 치열한 전쟁중이었고, 또 도교를 들여와 불교가 탄압받는 상황이어서 불교건축물은 오히려 백제나 신라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백제나 신라는 바로 그곳이 미
[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강화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으로 마니산 꼭대기에는참성단이 있어 한민족의 시원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단군의 아들이 쌓았다는삼랑산성이 있다. 지금 삼랑산성 안에는 전등사와 정족산사고가 있다.한반도의 지역을 다 둘러보아도한민족의 수난기에 나라를 지키는 보루가 되었던 역사의 고장으로 강화만한 곳은 드물다. 강화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서 바다가 되는 곳에 있는 섬으로, 두 강에서 흘러내리는 강물이 합해서 강화도와 육지사이로 좁은 물길에거센 강물이 흐르고 있어 지도만 보면업드리면 건너 뛸 수 있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섬이지만, 아무리 강력한 대군의 침략일지라도 강화도로 들어서기만 하면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매우 쉬운 곳이었다. 유목민이었던 몽골족의 징기스칸은중국대륙을 평정하고 멀리 유럽까지 단숨에 대제국을 이루었던 몽골기병일지라도,해전에는 약하다는 것을 간파한고려 무신정부는 송도(개성)에서 바로 건널 수 있는 강화로 서울을 옮겨, 몇 차례 몽골군과 대접전을 벌이면서 공방을 주고 받으며 전쟁을 하면서도 항복하지 않고30여년을 끈질기게 대항하여 싸웠다. 고려의 승병장군이었던 '김윤후'는 대군을 이끌
[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태안사는 전남 곡성에 있는 고찰이다. 태안사는 신라 경덕왕 원년(742) 세분의 스님에 의하여 개창되었으나, 이후 문성왕 9년(847) 혜철국사(적인선사)가 선종사찰로 새롭게 개산하여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을 형성하였다. 그뒤 고려초 광자대사가 머물면서 대규모 사찰을 이루었고, 동리산문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태안사고 동리산문의 종찰로 송광사 화엄사도 태안사의 말사였을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았다. 창건당시부터 고려까지는 대안사(大安寺)였다가 조선후기에 이르러태안사로 이름을 고쳐부르게 되었고, 한국전쟁으로 대웅전도 불에타고 말았다. 현재의 대웅전 등 전각들은 대부분 최근에 다시 중건한 것이다. 태안사 경내에는 구산선문 중 동리산문을 개창한 혜철국사(적인대사) 사리탑과탑비, 그리고광자대사탑과 비신이 없는 탑비가 있으며, 그 밖에도 대바라 등 보물이 3점 더 있다. 신록이 우거진 여름이면 절 입구에서부터 2.5km에 이르는 진입로가 우거진 숲으로 이루어져, 그야말로 속세를 떠난 피안의 세계를 찾아가는 듯 깊은 맛이 있으며, 새로 건립한 일주문을 지나면, 계곡을 가로질러 능파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괘불은 영산회상도를 중심으로 그린 큰 그림이다. 괘불은 평시에는 족자처럼 돌돌 말아서 대웅전 내부 또는 대웅전의 뒷편괘불함에 보관한다. 그러다가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이를 괘불대에 높이 걸어 놓고 쓰다가 행사를 마치면 다시괘불함에 보관해 놓는다. 괘불대는 대부분 대웅전이나 극릭전 등 절의 가장 큰 법당의 앞에 설치되어있다. 괘불은 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그리는데, 주로 석가모니부처님이 인도의 영축산에서 묘법연화경을 설법할 때의 모습을 그린다. 그때 그곳에 모였던 석가모니부처님의 10대제자와많은 보살들과 천신들 그리고 부처님의 세계를 수호한다는 사방의 신(사천왕) 등이 빼곡히 그려져 있다. 그리고 중생을 살피는 약사여래와 다음 세상에 중싱들이 가고자 하는 아미타여래가 홀연히 나나타 석가모니부처님의 설법을 증명하고 함께하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곧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하여 모여든 사람과 보살과 신장 등이 그림 가득히 채워져있다.용흥사 괘불은 가운데는 설법하는 부처님 모습이고, 한쪽에는약사불 모습으로 약사불은 많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준다는 뜻이며, 또 다른 한쪽은 서방 극락세계의 부처인 아미타불로, 세상에서 명을 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양 사람들이 중세시대를 지나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 처음 식민지 개척을 한 곳은 인도였다. 그런데 인도를 가려면 이교도가 살고있는 중동지역 아라비아를 거치거나, 아니면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가는 먼 항해를 해야만 했다. 이는 많은 희생을 각오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섰다. 그것은 새롭게 알게된 지구가 둥글다는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멀리 남쪽 끝까지 돌아가느니, 차라기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면 그곳에 인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첫번째 성공한 사람은 콜럼버스였다. 콜럼버스는 포루투갈 이사벨라 여왕을 설득하여, 신대륙을 발견하면 그곳에서 금은 보화를바치겠다고 약속하고 후원금을 받고 바다를 횡단하였고, 결국 지금의 서인도제도에 도착하였다. 실제로 그곳은 인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신대륙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인도로, 이전에는 동쪽으로 가야 갈 수 있었던 인도가 아닌, 서쪽으로 가서 찾은 인도라 하여 서인도제도라고 이름붙였다. 그렇게 발견된 아메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진은 해남과 가까운 지역으로 백제시대에는 해상교통이 발달한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런 까닭으로 백제시대부터 명당터에는 절들이 들어섰었는데, 무위사도 그런 절이었다. 사찰의 유래를 적은 '무위사지'에 따르면 무위사가 처음 창건된 때는 신라 진평왕 39년(617)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그 때 이름은 '관음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617년은 이곳이 백제의 땅이었고, 또한 617년은 원효대사가 태어난 해이기 때문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면 그 창건 연대가 적어도 650년은 지난 뒤의 일이었을 것이다. 창건 뒤 무위사는 헌강왕 원년(875) 신라말 도선국사가 중창하여 '갈옥사'라고 했다하며, 고려초기 정종 원년(945) 선각대사가 3창하여 그 이름을 '모옥사'로 고쳐불렀고, 이후 조선 명종 10년(1555)에 태감선사가 4번째 중창하고, 그 이름을 '무위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무위사는 역사가 오래된 고찰임에는 분명하나, 그 창건유래와 중건의 인물들에 대하여는 아쉽게도 확인하기 어려운 점이 많이 있다. 그러나 3차 중창주인 선각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보림사는 서울의 정 남쪽에 있다는 정남진 장흥의 고찰이다. 보림사는 759년 창건한 절로 창건당시에는 화엄종의 사찰이었다. 처음 창건한 스님은 원표스님으로절의 이름은 가지산에 있는 절이라하여'가지산사' 였다고 한다. 그런데 창건 후 100여 년이 지난 뒤 신라에 선종을 처음 도입했던 '도의선사'의 제자였던 '보조국사' 채징이 이곳에서 수행하며 제자를 가르치다880년 입적한 뒤, 신라 헌강왕이 절의 이름을 '보림사'로 내려주어 절의 이름도 바뀌고 선종의 대찰이 되었다. 보림사란 이름은 중국에서 선종을 크게 퍼트린 육조 혜능대사가 주석하던 절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본래 가지산사의창건 설화에 따르면 신라의 고승 원표스님이 인도 보림사, 중국 보림사를 거쳐 한국 땅에도 서기가 어린 것을 참선 중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신라로 돌아와 전국의 산세를 팔피며 절 지을 곳을 찾아 헤메다가, 어느날 가지산에서 참선을 하는 중, 신선이 나타나 자기가 살고있는 못에 용 9마리가 판을 치고 있어 살기 어렵다고 호소하였다. 그말을 들은 원표스님은 부적을 그려 연못 속에 던지니, 못속에 살던 8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전남 보성군 대원사 앞에는 티벳불교의 모습을 재현한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은 보성 대원사의 현장스님이 오랫동안 수집한 티벳의 불상 보살상탱화 등과 각종 불교용품과 민속품 등이 다양하게 전시되고 있다. 특히 이곳에는 밀교인 티벳불교의 특징으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깊고 다양한 모습들을 체험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한 전시물들로 현실속에서 오로지 삶만을 생각하고 죽음을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전시품들이있다. 또 불교의 세계관에서 사후세계에대한 개념은 같다 하더라도한국의 불교에서 볼 수 없는 모습들도 있어 꼭 한 번은 들려볼 만하다고 하겠다. 티벳불교에서는 《사자의 서》라는 책이 있는데, 이책의 저자는 8세기 인도의 밀교수행자였던 파드마삼바바로 인도의 탄트라 불교를 처음 티벳에 전한 인물이라고 한다. 《사자의 서》에는 살아있는 그 어떤 것도 개별적 실체는 없으며, 오직 마음만 실재한다고 한다. 세계는 마음의 결과이며, 마음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고 한다. 수행이 깊어져 깨달음의 상태에 이르면 현실속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은 실재가 아닌 변화무쌍한 환영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남 공주시에 있는 마곡사는 640년백제 무왕41년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당시는 백제땅이었을 것인데, 어찌 신라의 고승이 창건했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마곡사지에는 그렇게기록되어있다. 신라말에는 도선국사도 중수에 힘을 보탰으며, 이후 고려 명종때인 1172년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려 힘쓰며 정혜쌍수를 주창한 보조국사 지눌이 거하면서중수하였다고 한다. 조선조에는 세조가 마곡사에 들러 영산전 편액을 써준 일도 있다. 신라 통일기 자장율사가 창건 당시에도 마곡사는 주존건물이 30여칸의 불전이 있는 큰절이었으며, 현재는 중심에 비로자나불이 모셔진 대광보전(보물 제802호),이 있고, 경내에는 근세에 지어진 대웅보전,조선 중기에 지어진 영산전(보물 제 800호), 사천왕문, 해탈문 등과, 대광보전 앞에는 오층석탑(보물 제 799호)와 범종, 괘불, 세조가 탔던 가마, 청동향로 등 많은 문화재도 있다. 많은 보물 중 사찰 경내중심에 있는 오층석탑은 다른 절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이한 형식의 탑이기도 하다. 또 대광명전의 뒷편 언덕 위에는 중층으로된 대웅보전이 있는데, 한국의 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