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명승에꽃지의 해넘이는 반드시 들어간다. 태안반도 꽃지에는 바위섬이 2개 있는데, 하나는 뾰족하고 하나는 넓적하다. 그 때문에 뾰족한 바위섬은 든든한 할아버지섬으로, 넓적한 바위섬은 후덕한 할머니섬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수만년 파도를 맞이하면서도오늘의 모습으로 다듬어져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어, 한국의 명승지로 아름다움을 전해주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절경은 두 바위섬 사이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보여줄 때다. 두 바위섬 사이로 해넘이가 생길 때는 가을이 깊어진 10월 부터 다음해 2월까지로, 이 때가 되면 전국의 사진가들이 매일 수백명씩 몰려든다. 8월말은 아직 두 섬 사이로 해넘이는 안되지만, 그래도 두섬과 등대와 구름이 이루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을까 싶어, 지나는 길에 꽃지를 찾았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인지라 하늘의 구름도 좋을 것 같고, 태풍이 바다안개를 맑끔히 거두어줄 것 같기도 하고 . . . , 기대반 우려반 설레는 마음으로 찾은 꽃지였다. 그런데 그 기대가 헛되지 않아 오늘은 수평선에 바다안개[海霧]도 없어 아름다운 오메가(Ω)를 아낌없이 보여주어 잠시지만황홀한 일몰경에 빠져들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양평 용문사는 오래된 은행나무로 유명하다. 이 나무는 수령 1100년이 넘는 나무로, 그 높이가 42m 에 이르고, 둘레길이는 14m(반지름이 4.0m정도임) 에 이른다. 지금으로부터 1100년 이전이란 800년대 후반으로 신라의 말기에 해당한다. 용문사 창건에 대하여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나무는 신라 경순왕의 세자였던 마의태자가 천년사직이 망하는슬픔에 전국을 떠돌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심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의상대사가 지팡이로 쓰던 것을 꽂았는데 그것이 살아나 거목이 되었다고도 한다. 의상대사의 지팡이라면 그 수령은 1300년이 넘는다. 이 나무가 살아오는 동안 이 땅에는여러 차례 큰전란이 있었다. 크게만 보아도 고려시대 거란족의 침략과몽골의 침략이 있었고, 조선조에는 임진왜란이 있었으며, 근세에는 일제강점기 의병투쟁과 1950년 한국전쟁이 있었다. 그런 전란에 용문사 내 전각들은 불타버려 여러 차례 전각들은 중건이 되었지만, 이 은행나무는 굳게 살아서 그 광경을 다 지켜보았다. 이 은행나무는 현재 사천왕문 바로 위에 있어, 천왕문이 없을 때에도 절을 지키는 천왕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기도 남쪽 시흥시 관곡지는 광활한 논에 연농사를 짓는 곳으로 유명하다. 오랫동안 이곳은 벼농사를 짓던 논이었으나, 특용작물로 연농사를 짓게 되면서, 주변이 모두 연밭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제 주변이 모두 개발되고 있어 언제까지 이곳이 연꽃밭이 될 지는 알 수 없다. 아직 연꽃밭일 때 많이들 가보시길 권해본다. 연은 농부의 손이 많이 안가면서도 소득은 벼농사에 못지 않아, 벼농사를 짓는 것보다 오히려낫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여름이면 화사한 연꽃과 향긋한 연향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벼는 열매만 먹는 것이지만, 연은 뿌리, 잎, 꽃, 열매 모두를먹는 작물이다. 연꽃이 피기전에 딴 연봉오리는 잘 말려서차로 우려내 마시며, 넓은 연잎은 잘게 잘라 덕어서 차로 가공하거나, 가운데 쌀을 넣어 찌면 은은한 향기 밴연잎밥을 짓는데 쓴다. 연뿌리는 연근조림으로 먹기도 하고, 약재로도 쓰며, 연뿌리를 가루내어 김치를 담그면 김치가 쉽게 무르지 않고, 오랫동안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한다. 또 연밥은 옛부터정신적 안정에 필요한 약재로 연자(蓮子)라고 부르며 쓰고 있다. 진흙속에 뿌리를 두고 물위로피어난 연꽃은 세상을 맑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부석사(浮石寺)는 그 이름부터 특이하다. 부석(뜰 浮, 돌 石)이란 '뜬 돌'이라는 뜻으로, 절을 짓는 과정에서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큰 이적이 일어났던것을 절의 이름에 표현한 것이다. 부석사의 창건은 676년 신라 문무왕 16년으로,삼국통일기 신라불교의 대표적 스님으로, 신라에 화엄종을 세웠던 유학승의상대사[義湘(相)](625 ~ 702)가 화엄사상으로 세상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왕명으로 지은 절이다. 부석사의 창건에 대하여는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가 함께 전하는데, 그 이야기를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의상은 젊어어지러운 난세에개달음을 구하고 세상을 구하고자당나라에서 싹트는 새로운 불교학을 배우기 위하여 당으로 유학을 떠났다.당나라 유학시절의상의 공부를 도와주는 중국의 여인이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선묘낭자였다. 그런데의상의 인품에 반한 선묘는 의상을 존경하다 사모의 정이 생겨서짝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상은 출가 수행자 스님으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화엄학을 공부하여 10년 동안공부를 다 마친 뒤, 신라에 새로운 불국토를 이루구자화엄종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각화사는 한국불교의 영원한 스승인 원효스님이 창건한 절로 전한다. 각화사가 세원진 때는 신라의 남북국시대 신문왕 시절이다. 그러나 원효대사의 창건 이후 기록은 별로 전하지 않고 있으며, 500여년이 지난 고려 예종 때, 무애(無礙)국사가 중건하였다고 하나, 이후 여러차례 전란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다. 각화사는 조선왕조실록 수호절로 임진왜란 이후조선 선조때 (39년, 1606) 전란이 와도 해를 입지 않을 첩첩산중인 이곳에 지어졌다. 임진왜란때 불타지 않고 살아남은 전주사고본을다시 펴낸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해지어진 태백산사고 수호절로 지어진 태백산 문수사의 각화사는 한 때는 800여명의 스님들이 수도정진하여 국내 3대 수행사찰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기울고 한일병합이 되고나자, 전국에는 들불처럼 의병들이 일어났는데 전국의 의병들이 태백산으로 숨어들자, 일본군들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하여들이닥쳐 귀하게 간수했던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와각화사를 불태웠다. 폐허가 된 얼마후1926년 사라진 절터에또 다시 달현스님이 법당과 요사채를중건하여 각화사를 다시 세웠다. 그리고 197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북 봉화군에 있는 문수산 축서사는 673년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로 전한다. 창건설화에 따르면 인근에 있는 지림사에서 보니 문수산쪽에서 상서로운 빛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곳에 가자 비로자나불이 광채가 발하고 있어, 그 자리에 축서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후 신라 경문왕7(867년) 부처님 진신사리 10과를 가져와 사리팁을 조성하고 축서사를 참선도량으로 가꾸어 축서사는 참선수행의 도량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이후 전하는 전각들은 불타고, 석조비로자나불과 삼층석탑의 일부와 석등 등의 석물과 비로자나불의 목조광배와 큰 행사에 쓰는 괘불탱화가 축서사의 보물로 있다. 유서깊은 축사사는 근래 무여스님이 원을 세워 중창을 계속하여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들이 들어서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석탑을 새롭게 축조하는 등 많은 변화를 하여, 아름다운 사찰이 되고 있다.
[우리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해돋이 명소로 이름난 동해 추암 ‘촛대바위’ 위로 아침 해가 봉긋이 떠올랐다. 날마다 같은 해가 떠오르지만 ‘촛대바위’의 해돋이 정경은 계절마다 다르다. 시리디 시린 겨울은 해가 떠오르는 주변의 바다 물빛도 검은 듯 시려보이지만, 요즘처럼 열대야 끝에 맞이한 아침 해는 겨울 해와 또 다른 느낌이다. 묵직한 카메라를 든 작가들은 겨울 추위 속을 견디듯, 아침부터 찌는 날씨에도 ‘촛대바위’ 위로 떠오르는 해를 잡기 위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애국가 첫 소절의 배경화면으로 해돋이 장관이 유명한 ‘촛대바위’는 동해시와 삼척시를 마주한 바닷가에 자리하고 있다. 한국 관광공사가 뽑은 "한국의 가볼 만한 곳 10선"에 뽑힌 해돋이 명소 ‘촛대바위’는 주변에 거북바위, 부부바위, 형제바위, 두꺼비바위, 코끼리바위 등 기암괴석이 온갖 형상을 연출하고 있어 전국의 사진 애호가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동해 여행에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촛대바위에는 재미난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 추암 바닷가에 살던 한 남자가 어느 날 소실을 얻었는데 본처와 소실 간에 투기가 빚어져 급기야 하늘이 노했다고 한다. 이에 여자 둘을 징벌로 없애고 남자만 남겨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백장암은 남원 실상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실상사의 부속암자이다. 실상사는 신라에 구산선문의 본찰로 신라시대에는 9곳 큰 선종종찰이 있었다.실상사는 신라시대선종이 들어와 큰 사찰이 된 곳 중 가장 먼저 세워진 한국 선불교의 전통종가이다. 그런데 이곳 백장암 이름의 유래는 선사로 유명한백장선사와 관계가 있다. 선종이 꽃피어난 당나라시절 육조 혜능의 계보를 잇는선불교의 큰 스승으로 백장선사가 있었는데, 그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좌선에만 매이지 않고, 스스로 농사를 짓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곧 놀고 먹는 것을 절대 금하였다. 하루는 노인이 된 백장선사가 밭일을 나서려 하자, 제자들이 이를 말리기 위하여 백장선사의 농기구를 감추어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백장선사는 그날 하루를 굶어버렸다. 제자들은 다음날 부터는 백장선사의 농기구를 다시 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백장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굶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것을 생활화 하여, 이후 선종에서는 경전공부와 좌선 뿐 아니라 경작노동을 필수적 수행의 한 방편으로 삼았다.' 그가 살았던 생활규칙은 백장청규[百丈淸規] 하여 선종사찰의 제도화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왕조에서 식민지로, 광복과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과 독재시대를 넘어오는 동안한국의 정치발전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파란만장하다. 그 중에서도 근세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전쟁으로피폐 속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친일파와 재벌들을 중심으로독재정치에서 4.19와 5.18을 거쳐오늘날민주화의 과정은 더욱 격동적이다. 광복이후 한민족이 남북으로 분할되면서 남한에는 국민이 선거권을 가진 민주국가가 들어섰다고 하지만, 진정 국민이 주인 대접을 받기까지는 많은 청년, 학생들의 희생과험난한 투쟁의 과정이 있었다. 그 과정에 노동자도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다며 서민과 노동자들의 삶을 살피고자 기득권과 권력에 섞이지 않고, 힘없는 서민과 민주화를 위하여자신의 젊음을 바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교과서의 이론만 따르지 않고, 직접 노동 현장에 뛰어들어 가난하고 못배워 법으로 보장된 자신들의 권리조차 모르는 사람들과함께 공장에서힘든생활을 하면서 현장에서 문제점을 찾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노동조합을 만들어 산업현장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자 하였고 더 나아가 이들은진보정당을 만들어 자신들의 주장을법률적으로 정당하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무더위가 전국을 덮고 있는 7월 중순 남도 땅 끝자락에 있는 아름다운 절 도갑사를 찾았다. 도갑사에는 백제시대에 창건한문수사(文殊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신라말 도선국사가 근처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라났다고 하며, 바로 그 도선국사가 후에 도갑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도선의 탄생에 대하여는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그 중에 한 이야기를따르면 도선의 어머니는 최씨라고 하는데, 그의 아버지를 알 수가 없어서 어머니 성을 따서 최씨가 되었다. 도선의 어머니는 처녀시절 빨래를 머리에 이고 늘 다니던우물에서 빨래를 하였는데, 하루는 우물속에 참외가 떠 있었다고 한다. 처녀는참외를 먹고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집안에서는이를 수치로 여겨갓난아이를숲속에 버리게 하였다. 그런데갓난아기를 버린 어미는 아이의 생사를잊을 수 없어 버린 곳에 다시가보고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산비둘기들이 날아와 아기를 보호하고 먹이를 물어다 먹여서 기르고 있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이아이가 보통아이가 아님을 직감하고 버렸던 아이를 거두어 이곳 문수사 주지스님께 자초지종을 말하고맡겨 기르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