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개심사(開心寺)는 서산시 해미면 상왕산 자락에 자리한 오래된 절이다. 개심사가 자리한 상왕산(象王山)은 코끼리 중에 왕이란 뜻으로, 불교에서 코끼리는 보현보살을 상징하며, 보현보살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철저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중생구제를 위해 실천의 보살로 정해져있다. 개심사 절이 깃든 산과 절이름을 함께 생각해보니, 개심사는 중생의 변화무쌍한 마음을 바르게 고쳐먹고 굳은 믿음으로 보살의 마음을 내어 이 세상을 불국토로 바꾸길 바라는 마음에서 정한 이름으로 어쩌면 개심사를 창건한 스님들의 뜻이 아닌가 싶다. 개심사는 현재 충남의 4대고찰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는 절이다. 이곳은 바다가 인접한 절로 뱃사람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절이기도 하였다. 서산 간척지 사업의 완성으로 지금은 내륙의 절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개심사의 기원은 백제시대 의자왕 14년(645) 혜감스님이 창건한 절로 전하고 있으며, 고려 충정왕 2년(1350) 저능대사가 절을 중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더 이상의 자세한 일화와 내력은 전하지 않아 매우 아쉽다. 역사가 깊은 한국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호남평야의 서쪽에 위치한 변산반도는 평야지역에 솟은 꽤 높은 바위산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는 최고 높은 봉우리인 의상봉(508m)을 중심으로 신선봉(486m) 삼신산(486m) 옥녀봉(432m) 관음봉(424m) 상여봉(395m) 등이 있으며, 직소폭포, 봉래곡, 선녀탕 와룡소 가마소 등 산과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변산반도에는 고찰로 내소사와 개암사가 있는데 개암사 뒤로는 험한 산 등줄기에 우금산이 있다. 우금산 꼭대기 능선에는전란시 방어시설로 대비한 우금산성이 있으며, 그 우금산성의 한 봉우리에 우금암봉이 불쑥 솟아있는데, 그 바위에 원효굴이 있다. 개암사의 절 이름은 아마도 우금바위에 뚫려있는 원효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개암사(開巖寺)는 그 창건이 백제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찰이다. 개암사는 백제무왕 35년(634) 묘련스님이 창건하였으며, 신라통일 시대를 살아왔던원효와 의상도 머물렀다고 한다. 이후 고려 말 1314년 충숙왕 1년 원감국사가 개암사를 중창하여 큰 규모의절이 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조선왕조에 들어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높고 낮은 산으로 이루어진 문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처럼 우뚝 솟은 산이 있어 그 이름을 천주산이라 하였다. 천주산은 해발 800여 미터에 이르러 근처에서 보면 하늘 높이 솟은 기둥처럼 보인다. 또 이 산을 멀리에서 보면 큰 붕어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붕어산이라고도 한다. 이런 천주산에 자리잡은 절이 있으니, 그 이름 또한천주사이다. 천주사는천주산의 중턱, 험한 산지에 석축을 쌓아 대지를 조성하고, 그 대지 위에 지형에 따라 전각들을 지었다. 그래서 차로오르기도 쉽지 않고, 걸어서 오르기는 더구나 어렵다. 이런 지리적 여건 때문에 천주사는 전각들의 배치가 정연하지는 못하지만, 산지사찰로절에서 내려다 보는경계만은 어느 절에 비할 바 없이 일품이다. 천주사는 본래 작은 암자였다. 그런데이곳에 불사의 원을 세우고 35년동안 중흥불사를 하여 오늘의 천주사를 가꾼 중홍스님이 있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중홍스님의 말씀을 듣자니그동안 수많은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산중에 건물하나 짓는 것도 쉽지 않은데 험한 비탈과 구릉지로 되어있는산을 깎아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대지를 만들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천안하면 누구나 호두과자를 떠올린다. 그만큼 천안의 명물로 자리잡고 있어, 고속도로로 근처를 지날 때면 누구나 휴게소에서 호두과자 한봉지는 사먹고 오르내리지만, 그 호두나무가 처음 자리한 곳이 광덕사라는 사실은 잘 모른다. 호두나무는 한국 토종나무가 아니고, 외국에서 전래된 나무이다. 호도(胡桃)라는 나무의 이름속에 이미 이 나무가 토착나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으나, 사람들은 나무의 이름이 호두나무인줄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국어사전에서는 호두가 표준어지만 원래호도(胡桃)란 말 그대로 '북방 오랑캐 나라의 복숭아'라는 뜻이다. 호두와 복숭아씨를 비교해서 살펴보면, 호두는 주름진 열매가 공처럼 둥글고, 복숭아씨는 타원형에 납작하다. 그러나 그 형태가 비슷하여, 비슷한 나무의 일종이기에사람들은 본래 이땅에 없던 복숭아종류의 나무로오랑캐 나라에서 왔다고 호두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호두나무가 한국땅에 전래된 시기는 몽골 징기스칸이 세계를 휩쓸던고려 후기로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원나라로부터 많은 문물이 들어올 때였다. 그 때 류청신이란 사람이 충렬왕 16년 (1290)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김룡사는 문경지역에 있는 꽤 큰 사찰이다. 문경지역은 주변에 산이 많아 옛날에는 교통이 무척이나 불편했던 곳이나, 그럼에도 불편한 교통은 장애요인이 아니라 수행처로는 오히려 더 좋은 조건이 되어왔고, 그런 이유로 문경에는 이름있는 절들이 여럿있다. 김룡사도 그런 사찰이다. 김룡사의 유래를 보면, 창건은 신라 진평왕 10년으로 서기 588년에 운달(雲達)스님이 창건했다고 하며, 처음의 절이름은 운봉사(雲峰寺)였다고 한다. 산이 높아 구름이 봉우리에 늘 서려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뒤 운봉사에 대한 이야기는 전하는 바가 없다. 이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운봉사에 대한 많은 기록과 전각들이 모두 불타버림으로써 차츰 잊혀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 한동안 빈터였던 이곳에는 인조2년(1624), 김룡사가 다시 중건 되었고, 이후 여러 스님들이 피땀으로 중창불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김룡사의 절 이름에 대하여는 한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옛날 문경의 부사로 김(金)씨 성을 가진 이가 있었는데, 그가 모함으로 누명을 쓰게 되어 이 산에 숨어 살게 되었는데, 혼자 숨어 사는 도중 운달산 속에서 선녀처럼 예쁜 처녀를 만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에는 300여년을 자랐다는 소나무가 있다. 그 모습이 일반 소나무들과는 너무도 달라, 처음에는 쓸데가 없어서 살아 남았고, 세월이 많이흐르고보니, 이제는 다른 나무에서는 느낄 수 없는 오묘한 품격을 갖추어 이제는 마을의 보물이 되었다. 그 나무의 가지가 갈라져 자라면서구부러지고 펼쳐져그 형상이춤추는 듯 하다고 하여,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춤추는 소나무(舞松)라 부르게 되었고, 그 아래는 그늘이 드리워져마을 사람들의 정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 소나무에는 역사적 인물과 관련한특별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곳 문경은 예로부터 풍수적으로명당터가 많은 곳으로 이름이 높은데, 그 많은 명당 중에서도이 근처에는 '연주패옥'(連珠佩玉)이라는 명당터가 있었다고 한다. 연주패옥(連珠佩玉)이란 명당에 무덤을 쓰게되면 그명당 음덕에 후손들이 과거급제자가 많이 나와,옥관자 서말, 금관자 서말에 해당하는 관직을 얻어 후손들이 부귀영화를 대대로 누린다는큰 명당이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으로 조선에 왔던 두사충(杜思忠)이살기좋은 이곳 조선에 살고자 귀화하였다. 그는당시 조선의 문신인 '정탁'으로
[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한국은 산이 많은 나라다. 국토의 70%가 산으로 되어있어 농업을 주 산업으로 생활했던 옛날에는 논농사지을 수 있는 평야지역이야말로 누구나 살고 싶은 곳이었다. 조선의 평야지역은 서남해안으로 펼쳐진 전라도였고, 그 전라도가 조선사람들을 먹여살렸다. 그런데 이곳 무주는 백두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이동쪽으로 흘러 금강산 설악산으로등줄기처럼 뻗어내려 태백산 소백산을 지나 지리산까지 흘러가는 도중 덕유산자락에 솟아났다.지역적으로 이곳은전라도와 경상도가 경계가 되는 산간지역으로 한국에서는 그 어느지역에 못지않게 두메산골로 유명하다. 이곳 무주가 속한 곳을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를 줄임말로 임산자원이 풍부하다는 뜻도 있음)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이처럼두메산골이기에 조선왕조시대 왕조의 가장 중요한 보물인 왕들의 재임동안 모든 통치기록을 자세하게 기록한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할 장소로 선택되어, 이곳에 적상산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왕조실록의 제작과 보관에 대한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태조 이성계가 창건한 후 기록하기 시작한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 이전에 한양도성에는 춘추관사고를 시작으로,충주에 개천사사고, 전주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원주 치악산 구룡사는 1350년의 창건역사를 간직한 절이다. 구룡사는 의상대사가 668년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본래 이곳은 9마리 용이 살던 연못이었다고 한다. 의상대사가절을 지으려 하자, 이곳에 살던 용들은 이를 막기 위하여 천둥과 함께 폭우를 내리게 하여 산을 온통 물로 다 채웠다. 그러자 의상대사는 부적을 한 장 그려서 연못속에 던져넣었는데순식간에 연못의 물이 말라버리고, 이곳에 있던 9마리 용 가운데한마리가 갑자기 눈이멀어버렸다고 한다. 나머지 8마리는 구룡사 앞산을 8조각으로 갈라놓고 도망쳐버렸다는 것이다. 의상대사는 9마리의 용이 살던 곳에 절을 지었다고 하여, 절이름을 구룡사(九龍寺)로 하였다고 전한다. 창건 이후 구룡사에는 많은 고승들이 거쳐갔다. 신라말 도선국사, 고려말 무학대사, 조선중기 서산대사 등이 잠시나마 머물다 갔기에, 한때는 강원도 영서지방의 고찰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원주 지역의 큰 절이었던 법천사, 홍법사 등과 같이 구룡사도 사세가 기울었다. 어느날 풍수를 볼줄 아는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절 입구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운이 쇠해졌으니, 그 거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북 괴산에는 꼭 가보아야할 천년고찰 공림사가 있다. 공림사는 낙영산에 의지한 사찰로 그 연원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낙영산은 산전체가 기묘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골짜기에는 공림사를 감싸안고 있다. 낙영산의 바위틈에는 자생하는 나무와 들풀들이 뛰어난 생명력으로 산전체를 아름답게 장식하여 충북의 자연환경 명소로 지정되었다. 공림사의 사적비에 따르면 공림사는 신라 48대 경문왕때 자정선사가 암자를 짓고 수도하면서 부터라고 한다. 자정스님명성이경주 신라왕실에까지 알려져 신라왕실은 스님을 국사로 봉하고, 입궐초빙과 국태민안 법문을 요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정선사는 세속을 떠난 납자(출가한 스님을 뜻하는 말)로 다시 세간에 나갈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왕은 이런 선사의 겸양과 덕에 더 감동하여 이곳에 왕명으로 특별히 절을 창건하고 그 이름을 공림사(公林寺)라 하였다. 그 뒤 공림사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자세하게전하지 않고, 조선 2대 정종 2년(1400년) 금강경에 훌륭한 주석서를 낸 함허당 득통화상이 이곳에서 수도정진하였다고 한다. 이처럼공림사의 역사는 계속되었고, 조선의 최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에 있는 고려시대 융성했던 청룡사터 보각국사 승탑, 석비, 석등을 찾아보았다. 보각국사는 고려말부터 조선초 격동기에 불교를 이끌었던 고승이다. 보각국사는 고려말 공민왕으로부터 큰 존경을 받으며 타락한 권승들이 판치던 시대에 청정행으로 불교계를 이끌었던 스님이다. 그는한때많은 국사를 배출했던 순천 송광사의 주지를 지냈으나 고려가 기울고 조선이 들어서자, 충주 두메산골인 이곳 청룡사에 들어가 더 이상 속세로 나가지 않고 살다가 열반에 들었다. 보각국사의 행적은 기록이 소실되어 구체적으로 전하지 않으나, 그 행적을 기록한 대리석 탑비가 이곳 승탑 뒤에 세워져 있고, 비석의 앞뒤로 삶의 내용이 가득 새겨진 것으로 보아 당대 고승으로 존경할 만한 삶을 살았던 스님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격동기에 살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그분의 구체적인 행적이 궁금하기만 하다. 그러나 보각국사 이후 조선조에 들어 융성했던 청룡사는 폐사되고, 웅장했던 건물들도 모두 사라졌다. 주춧돌마저 땅속에 묻혀 이곳이 청룡사였다는 증거는 오로지 보각국사의 승탑과 석등 그리고 탑비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최근 문화재당국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