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원도 양양에 오래되지 않은 암자가 있다. 이절의 이름은 휴휴암(休休庵)인데, 쉬고 또 쉰다는 의미의 절 이름이지만, 파도소리 그칠날이 없어 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이 휴휴암은 바닷가에 자연석 바위가 마치 누운 관세음보살과 같아보여 어떤 스님이 관세음보살의 기도처로 그 이름을 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 기도하는 절이 되었다. 이후 스님은 바닷가에 백의관세음보살상과 그를 보좌하는 용왕 동자 그리고 용을 바위에 새겨 명소로 만들었다. 요즈음 추운 날씨에 바닷가 파도가 몰려와 바위 경계에 세워놓은 난간이 얼어붙어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려 멀리에서 보면 마치 고기를 말리는 듯하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겨울 하얗게 부서지는 동해 바다의 파도가 예사롭지 않다. 1,300년 이상 관세음보살의 성지로 알려진 양양 낙산사의 겨울풍경을 찍기 위해 동해로 내달렸다. 체감온도 20도를 넘는 추위에도 사진가들은 삼삼오오 낙산사로 몰려든다. 낙산사 관음보살이 거기서 손짓하기에 가능한 일인가? 낙산사에 내려오는 의상대사 관련 이야기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하여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바다에 투신하려 했을 때 마침 바닷가 굴속에서 희미하게 관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와 수정염주(水晶念珠)를 건네주면서, "나의 전신(前身)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두 그루의 대나무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바닷가 절벽에 위태롭게 서있는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기도하던 곳이요,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건네받은 곳은 지금 원통보전이 들어선 자리이다. 의상대의 싸한 겨울바람을 쏘이며 홍련암 쪽을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홍련암에 이르는 절벽 길 아래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가 장관을 이룬다. 추워도 파도는 쉬지 않고 하얀 포말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도선사 포대화상으로 요즈음 많은 절들에 조성되고 있는 상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중국의 역대인물 초상화> 설명에 보면 "중국 오대(五代)시대 후량(後梁)의 고승(高僧)으로 성씨와 이름의 출처를 알 수 없다. 단지 스스로 계차(契此)로 일컬었고, 호는 장정자(長汀子)다. 세간에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의 화신(化身)으로 알려졌다. 몸은 비만하고 긴 눈썹에 배가 불룩 튀어나왔다. 일정한 거처가 없고, 항상 긴 막대기에 포대 하나를 걸치고 다니며 동냥을 하고,어떤 때에는 어려운 중생을 돌봐주기도 했다."고 한다. 도봉산 도선사에 포대화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면서 쓰다듬고 있어배꼽에는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그대로 묻어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화도 연못의 얼음판 위에서추운 겨울을 즐기는 사람들 . 강화 갯벌에는 각종 게와 물고기들이 살고 있어, 새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특히 저어새는 멸종위기종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데, 강화 갯벌이 저어새의 보금자리로 알려져 있다. 저어새는 새의 부리가 마치 주걱처럼 생겼고, 그 부리를 물속에 넣고 이리 저리 저어서 물고기를 잡아먹는 습성이 있어, 저어새라는 이름이 붙었다. 1990년 문화재청에서 강화군일대 저어새 번식지로 추정되는 강화갯벌을 천연기념물 419호로 지정했다. 여의도의 53배에 해당하는 약 435,016,325㎡(약 1억 4천만평)의 강화갯벌을 지정한 것이다. 강화 갯벌 주위에 살던 사람들의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사람만을 위한 자연은 아니라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그렇게 결론지었다. 겨울철은 갯벌도 얼어붙어 철새는 날아가고 얼어붙은 호숫가에 아이 어른들의 얼음지치는 모습이 정겨웠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추위가 몰려와 바다도 얼어붙었다. 우리나라는그리 춥지 않아 바다가 얼어붙는 일은 없어 보이지만서울에서 가까운강화도 포구가 얼어붙었다. 추운 겨울, 바닷물이 얼어 붙어 배들이 묶여있는 모습을 보니 엄동설한 추위가 실감난다. 물 위에 뜬 배가 아니라 눈과 얼음 위에 갇혀있는 배는한폭의 서양화 같다.그래, 겨울 한파에 배들이 오도가도 못하고 쉬듯이, 그 배를 움직여 고기를 잡는 어부들도 이 참에 푹 쉬었으면 싶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여주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그 근거가 될 만한 유물은 아직 발굴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려말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고 그의 사리탑이 있게 되어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 때는 200여칸에 달하는 전각들이 있어 대찰이기도 하였으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세종대왕의 영릉을 근처로 옮기면서 영릉의 원찰로 삼아 조선시대 불교의 맥을 이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기에 그 이름을 보은사(報恩寺)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한편 신륵사(神勒寺)의 이름에 대한 설화는 남한강의 범람으로 인한 수해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바람에 부처님의 가피를 바라는 마음이 표현 된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의 명성을 높게하는 계기가 된 懶翁(나옹) 惠勤(혜근)스님은 고려후기인 忠肅王(충숙왕)7년(1320) 1월 15일에 태어나, 아직 어린 나이에 친구의 죽음을 겪으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를 겪은 뒤 20세 되는 해 공덕산 妙寂庵(묘적암)으로 了然(요연)선사를 찾아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얼마동안 요연선사로부터 가르침을 받던 나옹은 요연선사와의 선문답으로 인가를 받고 요연선사로부터 더 큰 깨달음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 겨울 수원 화성의 성곽을 돌아보았다. 화성의 남북으로 수원천 냇가에는 화홍문이 설치되었고, 한국의 정자중 가장 복잡한 구조를 한 방화수류정이 화성의 북쪽 높은 위치에 있다. 이 방화수류정은 평시에는 경치를 즐기는 정자이나, 전시에는 성의 종합 지휘소가 되게 설계하였다. 평시에 돌아본 수원 화성은 경치좋은 방화수류정의모습이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새봄이 되면 가녀린 싹을 움티워 무성한 잎이 연못을 다 덮고, 한 여름철이 되면 연못 가득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그 향기를 멀리멀리 보내던 연꽃들의 겨울나기 입니다.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이유는 가을철 튼실한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꽃이 아무리 아름다운들 그 열매가 비어있다면 그 연꽃은 실패한 것입니다. 겉이 화려하다고 성공한 것이 아니라, 그 열매가 튼실해야만 성공이라 할 것입니다. 정유년도 저무는 오늘 독자여러분은 얼마나 튼실한 열매를 맺으셨는지... 혹시 저무는 정유년에 조금이라도아쉬움이 있다면, 다시 한 해가 시작하는 무술년 개의 해에는튼실한 열매를 꼭 맺으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조선조 후기에 세웠지만 세계문화유산이 된 수원화성 가운데서오늘은화성 동쪽에 있는 연무대와 동북공심돈 그리고 창룡문을 소개해본다. 조선 후기 마지막 조선의 문화를 꽃피웠던 정조는 한양의 기득권 대신들이 옥죄고 있었기에 이를 벗어나 자신이 꿈꾸었던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신도시계획을 구상하였다. 정조는 할아버지에 의하여억울하게 죽어간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화성의 융릉에 이장하고, 지금의 융릉 근처에 살던 화성주민들을 신도시 화성으로 이전하여 살도록 하였다. 그런 계획으로 신도시는 번개처럼 시작하여 번개처럼 끝났다. 시작부터 끝나는 날까지 그 기간은 단 2년 6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기간동안 성을 쌓고 행궁을 짓고, 성벽 주위에 문루를 세웠다. 화성의 남북으로는 2층의 성문누각을 세웠고, 동과 서에는 1층의 성문을 세웠다. 이 모든 공사를 2년 6개월에 미무리했고, 주민들까지 그 터전을 이전하게 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화성은 그렇게 완성되었지만, 나라가 쇠하고 망하게 되자, 서서히 허물어져 갔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벽도 허물어지고 건물들도 많이 훼손되었던 것을 다시금 복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