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조선조 후기에 세웠지만 세계문화유산이 된 수원화성 가운데서오늘은화성 동쪽에 있는 연무대와 동북공심돈 그리고 창룡문을 소개해본다. 조선 후기 마지막 조선의 문화를 꽃피웠던 정조는 한양의 기득권 대신들이 옥죄고 있었기에 이를 벗어나 자신이 꿈꾸었던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신도시계획을 구상하였다. 정조는 할아버지에 의하여억울하게 죽어간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화성의 융릉에 이장하고, 지금의 융릉 근처에 살던 화성주민들을 신도시 화성으로 이전하여 살도록 하였다. 그런 계획으로 신도시는 번개처럼 시작하여 번개처럼 끝났다. 시작부터 끝나는 날까지 그 기간은 단 2년 6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기간동안 성을 쌓고 행궁을 짓고, 성벽 주위에 문루를 세웠다. 화성의 남북으로는 2층의 성문누각을 세웠고, 동과 서에는 1층의 성문을 세웠다. 이 모든 공사를 2년 6개월에 미무리했고, 주민들까지 그 터전을 이전하게 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화성은 그렇게 완성되었지만, 나라가 쇠하고 망하게 되자, 서서히 허물어져 갔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벽도 허물어지고 건물들도 많이 훼손되었던 것을 다시금 복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겨울이 깊어가는 연말 안면암에는 밀물과 썰물에 뜬다리와 뜬탑이 여전히 걸려있다. 뜬다리는 밀물시에는 이처럼 떠 있다가 썰물이 되면 갯벌에 내려앉는다. 뜬다리는 파도에 출렁거리지만 빠지지는 않는데 그래도 출렁이는 다리를 걷기는 쉽지가 않아 두사람이라면 반드시 손을 잡고 걸어야만 그나마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다. 태안 유류운반선의 침몰로 온통 오염되었던 때가 2008년 초, 이제는 완전히 회복되어 썰물시에는 갯벌에 각종 조개와 게들이 나들이하며 생명의 노래를 불러댄다. 안면암의 뜬탑은 유류운반선의 침몰로 사라져간 뭇 생명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안면암 스님들과 신도들이 직접 건립했다고 한다. 안면암에는 다른 절에 견주어 보다 화려한 용왕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때 정림사지오층석탑을대당평백제탑(大唐平百濟塔), 줄여서 '평제탑'이라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소정방이 전승기념으로 세운 탑으로 잘못 알려졌던 적이 있다. 그렇게 잘못 알려졌던 이유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4면에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이 자신의 공적을자화자찬하며그렇게 쓴 문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가 멸망한 뒤 부여는 7일 밤 낮으로 불탔다고 한다. 그리하여 목조로된 모든 것은 사라지고, 오로지 돌로된 이 탑만이 부여 한 복판에 자리 잡았는데, 이 탑의 기단부에 소정방은 자신의 전공을 새겨넣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라져간 정림사는 오랫동안 잊혀진 절이ㅣ었다.폐허가 된 채 오랜 세월이 지나자그 이름조차 알지 못하다가 근래발굴조사 결과 기와조각에서 정림사라는 문구가 발견되어 그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정림사는 백제시대 정형화된1탑 1금당식의 정연한 가람배치 구조를 가진 사찰로 탑과 금당, 강당을 일직선상에 두고 주요 건물들을감싸는 회랑(복도를 갖춘 궁궐의 구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탑은 돌로 된 것이나, 그 구조는 목조로 지은 탑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지붕돌이 넓고 길게 밖으로 나와있고, 지붕 아래 처마는 공포를 번안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에는 삼국시대 신라의상대사와 관계된 많은 절들이 있다. 의상스님은 원효스님과 더불어 대승불교의 최고 학파라 할 수 있는 화엄종의 최고봉으로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에서도 매우 존경받는 대스승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원효와 의상은 수많은 절들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한국에는 의상대사와 관계된 많은 절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부석사라는 절이 두곳 있는데, 하나는 영주 소백산줄기에 있는 봉황산부석사가 있고, 다른 하나는 서해가 보이는 서산 도비산(島飛山) 부석사(浮石寺)가 있다. 영주 봉황산 부석사는의상대사가 창건하기도 하였지만, 현재 한국내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무량수전)이 있어서 더욱 유명한 절이 되었고, 서산의 도비산 부석사 또한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로 알려져있으나, 조선조임진왜란 전란으로 모든 전각들이 불에 타고, 전각들을다시 지은 절이기에 영주 부석사에 견주면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부석사(浮石寺)라는 절의 이름의 유래는 영주 부석사나 서산 부석사나 거의 같은 유래가 전해진다. 부석사의 유래에 대한 것은 부석사내 안내판의 글로 대신하고 부석사내 전각들의 이모저모와 의상대사의 공부하는 모습과 선묘낭자 그리고 부석사를 창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남해바다에 접한해남땅에는 큰사찰 대흥사가 있다. 크게 흥한다는 뜻의 사찰명으로 그창건 설화는삼국시대까지 오르는 오래된 절임에는 분명하나 이에 대한 이야기는여러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그런데 대흥사는 후덕한 두륜산 넓은 구릉지에 위치하여사찰의 규모가 크기도 하지만, 대흥사는 그 규규모가큰 절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다른 어느 사찰에는 없는 표충사(表忠祠)가 있어 한국 내특별한 사찰이 되었다. 표충사란 절 이름이 아니라, 사당의 이름으로 본래 사찰과는 별 관계가 없는 권역으로, 훌륭한 선조의 혼령을 대신하여 그 위패를 모신 곳이기 때문이다. 밀양에 있는 표충사(表忠寺)와 그 의미는 상통하나 밀양 표충사는 사명대사만을 모신 사찰명이고, 대흥사 표충사는 대흥사 내 별도로3인의 스님을 모신 사당이다. 대흥사 내 있는 표충사(表忠祠)는 조선조 중기 불어닥친 임진왜란을 당하여풍전등화 같았던 국란속에 불살상을 가장 큰 규율로 여기며 불도에만 전념하던 스님들이 일본군의 침략에 분연히 일어나 이들과 목숨을 걸고 창과 활을 들고 맞섰을 뿐 아니라, 당당히 이들을 패퇴시키는데큰 공적을 남겼기에, 충효를 가장 큰 덕목으로 여기던 조선시대에선비 유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가을도 저무는 11월 말, 해남 땅끝마을 근처에 있는 고찰 대흥사에서도 1.6km를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일지암을 찾았다. 일지암(一枝庵)은 조선조 후기 한국의 차문화를 정리한 초의 선사가 39살이었던 1824년(순조24)에 중건하여 1866년 (고종3) 81세로 입적할 때까지 40여년간 이곳에살았던 암자다.일지암이란 이름은 어디서 유래한 걸까? 중국 당나라 때 시에 달관했던 스님이 있었는데, 그의 법명은 한산(寒山)스님이다. 그가 지은 많은 시 가운데다음과 같은 '시구'(詩句)'가 있었다."뱁새는 언제나 한 마음이기에 나무 끝 한 가지(一枝)에 살아도 편안하다." 일지암은 여기서 따온 말이다. 마치 자신을 뱁새에 견준 것만 같다. 초의 선사는 남해 바다가 굽어보이는 두륜산 중턱에 작은 암자를 짓고 고려때 까지 융성했던 한국의 차문화를 찾고자각종 문헌을 찾고, 선인들이 즐겼던 한국차의 명소들을찾아 보며, 한국에도 훌륭한 차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온몸을 던져 증명하고자 하였다. 초의선사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당시 근처로 귀양왔던 정약용을 만나 그와 더불어조상들이 즐기던 차의 멋을 함께 나누며 한국의 차문화를 마음껏 즐기며 살았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가을이 저무는 11월 중순, 백제의 마지막 도성이었던 부여를 찾았다. 부여는 백제의 도성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흔적은 그리 많지 않다. 궁궐이 있었던 읍내에는 궁궐터도 찾지 못한채 궁궐 앞에 있었던 연못만이 궁남지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궁남지란 고유명사가 아니라 궁궐의남쪽에 있었다는 못이라는 뜻의 명사로 보통명사에 가깝다. 부여는 규모가작은 지방자치단체로 주변의 많은 자치단체들이 시로 승격되었으나, 아직도 인구가 적어여전히 부여군으로 남아있다. 부여를 찾아 아침에궁남지 주변에 피어난 국화꽃을 보고읍내 큰 절이었던 정림사터오층탑과 정림사터 박물관을 돌아보고 하루를 묵은 뒤, 다음날 새벽에부여 북쪽을 감싸도는 백마강변의 부소산성을 올라 부여의 가을을 느껴본다. 백마강이 감아도는 부여읍내 잔뜩 낀 새벽 안개길을 헤치고 부소산 입구에 도착하여 부소산을 오르다 보니, 아침 햇살에 안개는 점차 가시고 상쾌한 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단풍길을 돌아 1.2km를 따라가면 백마강변에는 백제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애닯은 전설의백화정이 있고 그 백화정에서 내리막길로 300m를 더 가면 북쪽 백마강가에 작은 절 고란사가 있다. 고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백제지역에는 미륵신앙이 융성했다. 이는 고려시대에도 이어져 백제지역 곳곳에는 미륵신앙의 흔적들이 산재하고 있다. 그 가운데 오늘은 백제의 후기 도성이었던 부여의 대조사를 찾아본다. 대조사는 부여읍내에서 10km쯤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작은 절이다. 사찰기에 따르면 대조사는 백제시대 인도를 해로로 왕래하여 경전을 가지고 왔던 겸익스님과 동시대의 담혜스님이창건한 창곤연대가 527년인 고찰이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한 스님이 큰 바위 아래서 참선수도하는 가운데 새 한마리가 날아와 큰 바위 위에 앉는 순간 스님이 참선에서 깨어나보니, 그 바위가 미륵불로 변한것을 보고, 절의 이름을 대조사라고 하였다 미륵불로 변한 석상은 그 높이가 10m에 이르는 거대불상으로 근처 논산의 관촉사의 미륵불상과 통한다. 불상의 앞에는 철로 만든 연꽃이 있었는데, 지금은 연꽃은 떨어지고 연대만이 꽂혀있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티벳은 히말라야의 북쪽지역에 있는 곳으로 고도가 낮은 지역도 보통 4000m에 이르는 듯 하였다. 라사의 주변에는 산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산과 산이 만나는 곳에는 계곡이 있고, 그 계곡에는 고산지 빙산에서 흘러내린 물들이 모여 강이되어 흐른다. 그러나 그 강물들이 흐르는 곳을 조금만 벗어나면 메마른 땅으로 나무도 풀도 자라기 어려운 민둥산이다. 고산병에 하루를 시달리고 3일째 되는 날 아침 다시 기운을 차려 해발 4998m 전망대에서암드록촉 호수를 보기 위하여 아침일찍 출발하였다.8시에 버스로출발하여 굽이굽이 산비탈을 돌고 돌아암드록촉 전망대에 도착하고 보니 11시 30분이 다 되어간다. 고도가 높아지니 또 다시 고산증이 날 것만 같아 행동은 느리게 숨은 깊이 들이마시고, 틈나는대로자주 물을 마셨다. 그것이 고산병의 예방책이라는 말을 듣고... 날씨는 화창하고 하늘에는 뭉개구름이 시시때때로 변화하여 산 위로 지나면서구름의 그림자가 산 비탈면과 호수에 내려 앉는다. 해발 5000m 높이는 저지대에익숙한 우리에게는 적응이 힘들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띵하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건너편 작은 마을로 가려고 보니호수 앞으로는 가파른 비탈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지상에 세운 관세음보살 궁전으로 알려진 포탈라궁을 고산증 때문에 힘겹게 올라가 보았고,힘겹게 내려왔다. 해발 4,000m에 이르는 높은 고산지에 지어진 거대한 궁전은 1,400년의 세월이 켜켜이 쌓여있었고, 그저 사람의 원력만으로 지어진 건물들이라기 보다는 영원을 향한 신심이 아니고는 도저히이룰 수 없는 거대 구조물 같았다. 티벳인들은 서기 600년 초 처음으로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받아들인 후 지금까지 다른 종교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았기에 오직 부처와 보살에만 의지하여 살아왔다. 티벳인들은 자신들의 땅이야 말로 부처님과 보살이 살피는 곳으로 여겼고, 그런 믿음은 불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이 늘 있다는 '포탈락가산'이 바로 이곳이라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 믿음으로 '관세음보살의 궁전'을 세워 그 이름도 '포탈라궁'이라 하였다. 불교에서 관세음보살은 지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위대한 보살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 누구든 관세음보살은 진심으로 부르는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하여 언제나 준비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관세음보살은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한국의 석굴암 본존불 뒤에는 11면(정면 큰 얼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