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894년 고종 31년 충남 공주시 금학동과 주미둥에 걸쳐 자리잡은 우금치 고개에서는 죽창과 곡괭이 등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들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관군과 일본군이 연합하여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우금치 전투가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필연은 조선정부의 부패와 무능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선정부는 부패와 무능을 스스로 개혁할 기회를 상실하였고, 이를 계기로 일어났던 1차 동학농민군과 전주에서 화약(1894년 5월 8일)을 맺어 한 때 나마 전라 경상 충청지역에서는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집강소를 설치하여 자치행정을 실현하며 평화로운 시대가 되는 듯 하였다. 집강소에서는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 12개조'를 지방관의 도움을 받아 실천하는 등 농민과 지방관청의 민주적 협조행정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때 실시한 개혁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동학교도와 정부는 서로 화해하여 공동으로 서민정책에 협력한다. 둘째, 탐관오리의 죄상을 자세히 조사하여 처리한다. 셋째, 횡포한 부자들을 엄중히 처벌한다. 넷째, 불량한 유림과 양반을 처벌한다.. 다섯째, 노비문서를 소각한다 . 여섯째, 천민 차별하는 정책을 폐지하고 백성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는 무성서원이 있다. 무성서원은 신라 후기 당나라에 유학했던 고운 최치원이 이곳 정읍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던 인연으로 이곳 사람들이 그의 선정에 고마움을 전하기 위하여 세운 최치원의 사당 '태산사'를 짓고 위패를 모시고 그의 학문을 그리며 유학을 공부하는 도장으로 세운 서원이다. 최치원을 모신 사당이 '태산사'라 이름한 것은 이곳의 옛 지명이 '태산현'이었기 때문인데 이곳 사랃들은 옛부터 '태산사'라는 사당을 짓고 그의 선정에 감사하며 매년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중기 이후 전국의 각지역에 유학의 큰 스승을 모시고 그 지역의 사립학문의 전당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곳 사람들이 그를 모신 사당 태산사를 중심공간으로 하여최치원을 이곳 유학의 종조로모시고자 하여 세워진 서원 무성서원이다. 무성서원은 1544년 퇴락한 옛'태산사' 사당을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고운 최치원 외에이곳에서 태인현감을 지낸 신잠을 함께 모셨으며, 이 외에도 정극인, 송세림, 정언증, 감약묵, 김관을 함께 모시었다. 무성서원은 그 규모는 크리 크지 않아 아담한 편이며, 서원의 권위를 높이고자 숙종으로부터 직접 헌판에 붓글씨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민족의 최대국난기 민족의 생존을 지켜낸 성웅 이순신장군을 모신 또 다른 사당인 정읍의충렬사(忠烈祠)를 찾았다. 정읍 충렬사는 다소 생소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순신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기 전 정읍이 현으로 승격되고 난후처음 현감으로 재직한 곳이기에 정읍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정읍시민들은 그의 선정으로보살핌을 받았다는 것을 감사하였고, 이를 기리기 위하여 일제강점기가 끝난 뒤 군민들이 돈을 모아 이순신장군을 기리는 사당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충렬사 건립에 대한 논의는 8.15 광복이 되자 시작되었는데, 뜻있는 지역 유지들이 힘을 합하여 창건기성회를 조직하였고, 이후 전라북도 학생들 및 각계의 성금으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49년 8월 공사를 착공하였으나, 6.25한국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었고, 그뒤 1963년에 이르러 가까스로 준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충렬사 본당만 건립되었을 뿐 사당을 감싸는 담장과 삼문 선양류 등은 그 때 세우지 못하고 하나 하나 세워나가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 충렬사 경내에는 대로 변에 홍살문과 선양루가 있었고, 이를 지나 충렬사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과 계단위에는 솟을 삼문이 있다. 삼문을 오르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상주 천주산에는 북장사(北丈寺)가 있다. 북장사는 신라 후기인 흥덕왕 8년(833년) 진감국가가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사적기에 의하면 산 위에는 수미굴(須彌窟)이라는 동굴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저절로 생긴 돌기둥이 아래는 좁고 위로는 넓어 마치 하늘을 떠 받들고 있는 기둥처럼 보여 산의 이름을 천주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렇게 천주산에 의지하여 터를 잡은 북장사는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국찰로 여러 엄자를 거느린 큰 절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1624년 중국에서 온 스님 10여 명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650년 (효종1년) 화재와 1657년 또 한번의 불로 절터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고본래 위치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재창건하였다. 이후 1663년 (현종1년) 여행(呂行)스님이 극락전을 착수하여 8년의 세월을 거쳐 완성하고, 차츰 다른 건물들도 세워나갔다. 이렇게 세워진 북장사의 건축물들은 대향로전, 소향로전, 백련당, 향적전, 육화당, 삼강실, 황학루, 한송당, 명부전, 삼성각 등이 있는데, 산 중턱에 경치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각들의 규모가 무척 큰 편이나, 찾아오는 신도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 최고의 기도성취처로 유명한 봉정암은 1년 365일 하루도 빼지 않고 기도객이 몰리고 있다. 지금은 길이 좋아 대중교통으로도 쉽게 갈 수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백담사에서 부터는 튼튼한 다리로 한발 두발 걸어서 가지 않으면 갈 수가 없다. 그 거리가 산길로 10km에 이르는 거리이고 보니 쉽게 엄주를 내지 못하지만, 자신이 이룩하고자 하는 염원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올라가서 기도를 해야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기도성취처로 그 명성을 얻은 덕인지, 나이가 많은 할머니들도 그 어려운 길을 마다않고 오르고 있으니, 그 할머니들이 오르는 것을 보고 젊은이들은 힘들다는 말을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힘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백담사에서 출발하여 장장 6시간은 잡고 올라야 하는 먼 길이지만 그 가운데서 1.5km는 그야말로 고행을 각오하지 않으면 오를 수도 없다. 힘들어도 올라야 하는 곳이고, 힘들다고 그냥 뒤돌아 가기에도 너무 먼거리이고 보니, 가파른 깔딱고개 아래에서는 이제는 포기도 어렵다. 그래서 무조건 오를 수 밖에 없다. 어렵게 올라서 봉정암에 이르고 보면 어느 덧, 저녁 5시가 되고, 5시면 배속이 출출하기 그지 없는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청도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각연사를 찾았다. 각연사(覺淵寺)는 괴산군 있는 절로, 그 창건일화 또한 특이하다. 신라 법흥왕때 유일대사가 있었는데 그는 괴산 칠성면 쌍곡리에 절을 지으려고 터를 잡고 나무를 구하여 다듬고 있었다. 그런데 나무를 다듬어 나온 대패밥을 까마귀 떼들이 날아들어 물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이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유일대사는 까마귀가 날아간 곳을 따라가 보니, 지금의 각연사 마당이 있는 곳이 연못이었을 때, 그 연못에 대패밥을 물어다 놓는 것이 아닌가? 유일대사는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그 연못속을 잘 살펴보니, 연못 안에는 광채가 나는 돌부처가 한 분 있었다. 돌부처를 보고 크게 깨달음을 얻은 유일대사는 애초에 절을 지으려던 쌍곡리 절터를 포기하고 이곳의 연못을 메우고 절을 짓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유일대사는 연못속의 돌부처를 보고 깨침을 얻었다고 하여 깨달을 각(覺) 연못 연(淵)을 써서 각연사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각연사가 위치한 곳에는 보개산이 마치 연꽃의 연잎처럼 감싸고 있기도 하다. 현재 각연사에는 보물이 즐비한데, 각연사에서 배출한 고려초기 왕사였던 '통일대사의 탑비'(보물 제1295호)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832년 신라 흥덕왕 7년에 진감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상주 남장사에 들 렀다. 창건 당시에는 장백사라 하였으나,이후 1186년 고려 명종 16년 그 터전을 옮겨짓고 남장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남장사는 고려를 지나 조선조에 이르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이후 1635년 조선 인조때 정수스님이 다시 법당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남장사의 법당은 보광전으로 화엄종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었다. 현존하는 건물들로는 주불전인 보광전 외에 극락보전이 있었고, 이 외에 영산전, 금륜전, 진영각, 강당 불이문, 일주문 등이 있으며, 남장사의 보물로는 보광전에 모셔진 화엄목각탱화와 보광전에 모셔진 철제비로자나불좌상이 있다. 기자는 예불 중이라 남장사의 보물들에 대하여는 사진으로 담지 못하고 나와 아쉬웠다. 남장사는 노악산의 남측에 위치한 절로 굽이굽이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주차장이 나왔고, 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들어갔는데, 그 출입문은 일주문이 아니고 보광전 권역의 동측에 있는 협문이었다. 협문을 들어서자 바로 남장사에서가장 중요한 전각인 보광전이 나와서,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경내를 탐방하였다. 보광전 주변에 요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충북 보은군 탄부면 임한리에는 아름다운 솔숲이 잘 가꾸어져 있다. 수십 년 마을 사람들이 가꾼 솔숲은 이제 명물이 되어 많은 사진가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곧게 자라는 나무들과는 달리 구불어지고 뒤틀린 소나무들이 자라는 솔숲은 자연의 신비함을 더해주고, 더러는 땅바닥으로 쓸어질 듯 한 모습에 소나무의 강인한 생명력도 느끼게 한다. 한국인들은 모진 역사속에멸망의 위기에 처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그때마다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다시 일어나 오늘에 이르렀다. 크게 수나라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낸 고구려의 전설같은 이야기,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의 배신으로 한민족은 당나라의 한 주가 될 뻔도 하였고, 고려시대에는 몽골제국에 완전히 복속될 뻔도 하였으며, 조선조에는 임진왜란때 일본의 속국이 되거나 남과 북으로 나위어 중국과 일본의 영토로 분할 될 뻔도 하였다. 그리고 100여년 전에는 지도자들의 무능력으로 영토와 국권을 빼았겨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나라안팎에서 포기하지 않고 나라를 되찿겠다고 선열들이 피흘린 덕으로일본의 패망과 함께 다시 광복을 맞이한 것이다.뒤틀리고 꺾이면서도 하늘을 향해서 뻗어오르는 소나무는 그래서 한국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동학혁명의 발상지였던 고부군에 있던 향교이다. 조선조에는 국가에서 세운 공공교육기관으로 전국의 군에는 향교를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에 따라 고부군에도 향교가 있었고, 그 고을의 이름을 따라 '고부향교'라 불렀다. 하지만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폭정에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게 된 뒤, 고부군수 조병갑은 파면되었고, 고부군은 주변의 다른 시군으로 갈라져 사라지고 말았다. 고부군은 사라졌지만 그 이름만은 그대로 전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고부군의 중심지에 있던 고부관아는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있다. 그리고 관아 바로 옆에 있던 향교는 그대로 남아있다. 유교를 국교로 삼고 통치이념과 생활철학으로 받들던 조선시대,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금과옥조로 따르던 시대였지만, 조선조 말기 유학을 공부하고 따르던 많은 유생들과 선비들은 그 본래 가르침보다는 자신들이 속한 학문적 계보와 자신의 혈연적 이해관계속에 백성들의 삶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나라의 국력이 기울고 백성들은 못살겠다고 일어나게 되니, 그것이 동학혁명이다. 유학을 국시로 삼았던 것은 그것이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잘 살게하는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정읍시 고부면 남복리에 있는 작은 절 미륵사를 찾았다. 무더운 여름 120여년 전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지였던 곳을 찾던 중 찾은 작은 절이다. 김제 벽골제, 부안 백산성; 말목장터, 전봉준장군 옛집, 그리고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미륵사는 그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적어도 고려 이전에 창건되었던 절임에는 분명하였다. 그 이유는 미륵불의 상호가 고려시대의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현존 미륵불상 외에도 옛적에는 많은 자취들이 있을 것이나, 지금은 오직 이 미륵불만이 옛날의 영화를 이야기 하고있어 아쉽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전국의 대부분의 절들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고부군 두승산 자락에 있는 남복리 미륵사도 또한 폐사되어 전각들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이 미륵불만이 하반신은 땅속에 묻히고 상반신만 땅에서 노출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태의 미륵불이 지금처럼 다시 절의 전각 안으로 들어오게 된 때는 100여년 전 한 신도의 기도결과라고 한다. 은(殷)씨 성을 가진 한 신도는 100년 전 고부에 살았는데, 그 슬하에는 아들이 없어 늘 걱정만 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하루는 꿈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