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울 근교에는 가볼만한 절들이 많은 편이나 그 가운데서도 안성에서는 남사당패의 본거지였던 절인청룡사와 자장율사가 7인의 악인들을 교화시켰다는 전설이 깃든 칠장사 그리고 승유억불의 조선조에는 안성을 대표하여 세조의 친필교지가 남아있는 석남사가 있다. 그 가운데 오늘은 청룡사를 찾아본다. 청룡사는 본래 1265년 고려 원종 6년 몽골의 치하에 들어가던 시기에 세워졌다. 처음 절 이름은 대장암으로창건 스님은 원종 당시 국사로 추앙받던명본국사로 전한다. 이어 몽골시절 동안 작은 암자로 이어온100년쯤 지난 1364년 공민왕이 새롭게 고려를 되살리려 할 때, 고려말고승인 나옹화상이 청룡사를 크게 중창하고 그 이름도 대장암에서 청룡사로 바꾸었다. 청룡사라는 절 이름은 나옹화상이좋은 수행처로절터를 찾아다니던 중 이곳을 지나다, 비가 온 후 산 자락에 그윽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그구름을 타고 힘차게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당시 나옹화상은 산줄기에서기가 넘치는 구름을 보았고 그 구름속에서 내려오는 청룡을 이곳에서 본 후, 그 청룡이 절을지키는 수호신이 되게하고자 하여, 이곳산의 이름을 서운산(상서로운 기운이 깃든 구름이 있는산)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6월 말, 무더위가 시작하는 가운데, 한국의 전통놀이 중 서울 근처에서 그 유명세를 떨쳤던 한국 전통 서커스로 이제는 세계문화유산이 된 안성 남사당놀이를 보고 왔다. 남사당은 본래 다양한 재주를 가진 연기자들이 자신들의 장기를 자랑하면서 흥을 돋구기 위하여 풍물과 함께 전통시장을 중심으로 펼쳐지던 놀이였다. 그런데 그 의미를 살펴보면 남사당(男寺黨)은 남자들로 구성된 '사당패'라는 뜻이다. 이들은 조선 후기 사찰의 경제가 어려울 때, 절의 주변에 살면서, 절의 불사를 하기 위하여 모금운동에 동참했던 사람들로 그 연기자들은 신분이 낮은남자들로 구성된 연희집단을 뜻한다. 따라서 사당패는 전국의 절 주변에 많이 있었던 공연단체였던 것이다. 그런데 안성의 남사당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던 1865년 경복궁을 짓느라 수고가 많은 모든 관계자들을 위로하고 흥을 돋구어주기 위하여 전국의 각종 연기자재주꾼들을 모두 모아 전국 놀이패 경연대회를 거행하였는데, 여기서안성 남사당은공식적으로 최고의 연희집단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 때 안성 남사당의 연희중에서도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은 공중에 줄을 매고 그 줄 위에서 각종 놀이와 재담으로 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강원도 첩첩산중 영월 읍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유서깊은 절이보덕사다. 보덕사는 조선 6대 왕인 단종의 능을 보살피는 절이기도 하다. 본래 보덕사는 신라 통일후인 686년 신라 화엄종의 초조인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가 처음 창건했을 때에는 지덕사(旨德寺)라 하였으나, 후에 그 이름이 바뀌어 보덕사(報德寺)가 되었다. 지덕사는 1132년 고려 인종때 설하스님과 원경국사가 대대적으로 중창을 하여 많은 전각들을 지었다.이렇게 이어오던 지덕사는 조선조에 들어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영월 청령포로귀양 유배시킨 뒤 그가 죽고 난 후, 한동안 방치되었던 단종의 능이 건립된 후, 그 장릉을 보살피기 위한 절로 지정되면서절이름을 노릉사(魯陵寺)라 보르게 하였다. 아마도 노산군(단종)의 명복과 능을 보살피는 절이라는 뜻으로 절 이름을 바꾼 듯 하다. 이렇게 불리우던 노릉사는 영조시절 '장릉수호조포사'라는 왕의 은전이 내려지면서 보덕사(왕의 은혜에 보답하는 절)로 다시 이름이 바뀌게 되어 오늘에 전한다. 이렇게 유서깊은 절이었던 보덕사는 임진왜란시절에는 첩첩산중에 있었던 때문에 큰 손상이 없이 지켜왔으나, 안타깝게도 1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지금은 교통이 발달하여 한나절이면 전국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곳이 되었지만, 조선조에는 이곳 영월 청령포는 전국의 그 어느 산간 두메 보다도 더 깊은 살골짜기 였다. 그런데 그 산간두메에 또 작지만 강물까지 가로막혀 있으니, 이곳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은 그야말로 절해 고도에 유배된 것과 마찬가지 였다. 이곳에 유배되었던 단종은 여기에서도 그리 오래 살지 못하고, 결국 숙부인 세조에 의해 사약을 받고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나이 17살 때인 서기 1457년 이었다. 이제 세월이 560년에 이르고 보니, 당시 비참했던 단종의 신세는 후세인의 흥미있는이야기 거리로 남았고, 이를 찾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자연속에 초여름의 정취를 느낄 뿐이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럽기 그지 없는 일이지만, 이를 지키지 못하면 제명을 살기도 어려웠던 왕조시대에 비하면, 지금 경제가 어렵네 어렵네 하지만, 그런 불평은 단종이 살던 시절에 비하면 호사중에 호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순간 순간 흐르는 시간이 모여서하루가 되고, 그 하루 하루가 쌓여 날이가고 달이 가서 세월이 된다. 엇그제 까지만 해도 서늘한 바람에 움추려 들어 살며, 봄을 기다렸지만, 봄의 기운이 돌자 말라붙었던 대지에 생명의 기운이 싹터초목에 새순이 돋더니, 어느 덧 연녹의 새잎은 한달 여 만에 진한 녹색으로 변하여 버렸고, 산야는 숲이 우거진 여름이 되었다. 이제는 햇볕이 들면 뜨거워 양산을 받쳐들고 해를 가려야 하고, 그늘진 곳에서 더위를 피하는 것이 당연한 때가 된 것이다. 남한의 서북쪽에 위치한 임진강가 화석정에도 여름이 되고보니 더위를 피하고 임진강가 풍광을 즐기고자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역사의 숨결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민족의 최대 수난기인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화석정을 불태워 그 불빛에 의지하여 나룻배에 몸을 의지하고 임진강을 넘었다는데... 파주 율곡리가 인접한 화석정은 임진강이 잘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의 현인으로 추앙받는 율곡 이이가 살던 곳에 인접하였으며, 어린시절 율곡선생이화석정에 올라 지었다는 시로도 유명하다. 율곡은 자신이 살던 동네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로 삼았다. 율곡이란 밤나무가 많이 있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격동의 100년을 지나오며, 한국의 오늘이 있기까지 한민족은 고달프기 그지 없는 고난의 세월을 살아왔다. 조선왕조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민족의 수난은 차마 몇 편의 글로 설명하기 어렵기 그지 없지만, 우리는 그 고난의 세월을 올바르게 살아와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런 역경의 한민족의 역사를 바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국립현충원이다. 현충원은 서울의 중심을 흐르는한강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이곳에는 조선 선조의 할머니인 창빈 안씨의 묘가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한국이 일제로부터 벗어난 후 국가를 지키기 위하여 혼신의 몸을 바친 많은 선열들을 모시기 위하여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듯 보인다는 명당터인 이곳을 정하여 국립묘지를 조성하기로 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신 선열들, 1950년 한국전쟁에 투신하신 선열들, 미국과의 방위조약에 근거하여 베트남전의 용병으로 출전하여 희생하신 선열들을 위주로 이곳 동작동 현충원에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이 외에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대통령들의 묘소가 있어 한국의 오늘을 있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신 분들이 영면하고 있는 곳이다. 해마다 현충일(6월 6일)이면 우리는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천연기념물 제543호로 지정되어 보호받는 영월 무릉리 계곡요선암 돌개구멍들이다. 돌개구멍이 있는바위는 계곡 가운데 넓게 펼쳐져있고 무릉계곡 바로 위에는 작은 암자 미륵암이 있으며, 그 위에는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요선정이 있고, 그 바로 옆에는 큰 바위에 미륵불을 새겨놓은 큰바위가 있다. '요선'이란 '신선을 맞이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고 '암'이란 '바위'를 뜻한다. 따라서 '요선암'이란 '신선을 맞이하는 바위'라는 뜻으로, 태백산 깊은 무릉계곡에 아주 특별한 형태의 바위들이 있어 선계에 사는 신선들도 유람할 만한 멋진 곳이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조선 중기 시인 양사언(1517~1584)이 한때 평창군수로 부임하여 다스리던 중 이곳의 풍광을 즐기기 위하여 재임중 자주 찾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양사언은 이곳을 찾아 큰 바위에 요선암이라 새겨놓고 갔고, 이후 이곳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무릉리 계곡에는 넓고 펑퍼짐한 화강암반이 펼쳐져 있었는데, 이곳이 물에 깎여나가고 계곡으로 드러나게 되자, 깊은 산속에서 흘러내린 돌맹이들이 물과 함께 흐르면서 마치 돌확을 갈면 구멍이 생기듯이거대한 암반을 다양한 모습으로갈아내게 되어 이런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5대 적멸보궁으로 이름을 얻은곳 중에 하나가 강원도 영월 법흥사다. 법흥사는 그 창건이 당나라에 유학했던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받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분양받아 모셨다고 하여 5대 멸보궁의 하나가 되었다. 자장율사는 법흥사의 적멸보궁 뒤 토굴에서 한동안 수행도 했다고 한다. 법흥사의 창건 당시에는 흥녕사였다고 하나, 이후 신라말기에 선종의 한 고승인 철감선사가 사자산문을 열고, 그의 제자인 징효대사가 선풍을 날리며 번창하였다. 그러나 신라이후 고려 초기혜종(994년)때 절에 큰 불이 나서 완전히 사내 건물들이 다 타고 난 후1000년간 사찰의 명맥만을 유지하여 오다가 대한제국시절인1902년 비구니 대원각스님이 다시중창하여 그 이름을 법흥사로 바꾸었다. 법흥사의 가장 중요한 유물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의 사리탑이라고 하나, 실상 법흥사의 진신사리탑은 한국의 다른 적멸보궁의 사리탑과는 그 양식이 다르고, 그 조성연대 추정상으로도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일설에 의하면 자장율사는 부처님 진신사리를 사자산 어딘가에 숨겨두고 적멸보궁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조로 지어진 적멸보궁의 바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전통무예인 태권도 시범단으로 오랜 전통을 가진 서울 미동초등학교 태권도 시범단의 시범이 서울 남산 한옥마을에서 있었다. 미동초등학교는 한국을 대표하는 태권도 시범학교로 해외에도 태권도를 알리는 사절단으로 많이 나가서 시범을 보이고 있다. 이학교는 1896년 한성공립소학교로 개교하여 오늘에 이른다. 학교의 이름은 1906년 한성보통학교로 개명되었다가, 1908년 관립미동보통학교가 되었고, 이어 1941년 미동국민학교가 되었으며, 1996년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일제잔재라 하여 서울미동초등학교가 되었다. 그런데 '미동'이란 이름은 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 서대문구 미근동(渼芹洞)으로 동명의 첫자만을 따서 붙인 것이다. 어린시절부터 오랫동안 갈고닦은 태권도의 각종 품새와 각파 그리고 시범단원들의 군무가 아주 절도 있게 진행되어 주말 남산 한옥마을을 찾아 한국의 전통미를 찾는 많은 사람들의 아낌없는박수를 받았다. 특히 외국에서 온 손님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관광으로 와 닿을 것 같았다.어린 꼬마들의 절도있는 다양한 품새와 돌려차기와 날아올라 발차기로 송판을 격파하는 모습은 특별히 아름다왔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제주도 제주시 이도동에 있는 삼성혈. 제주를 찾는 사람들이 보통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유명 관광지만 찾을 뿐 제주인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이곳은 별로 찾는 이가 드물지만, 삼성혈은 제주 인문학의 시원과도 같은 곳이다. 화산이 분출하여 이루어진 제주는 섬의 한 가운데 높이 치솟은 한라산이 있고, 한라산의 주변에 수많은 기생화산이 있으며 섬은 위아래로는 좁게,좌우로 길게 펼쳐진 타원형의 섬이다. 화산 분출 후 오랫동안 무인도였던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구석기시대 까지도 거슬러 올라가지만, 제주인들은 이곳에 사람이 살게 된 것은 바로 이도동에 있는 삼성혈에서 3인의 성인이 솟아나면서 부터라고 믿는다. 그 3인은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로 알고 있으며, 이들은 한라산을 배경으로 수렵과 고기잡이로 살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에게 배필이 필요할 때가 되자, 먼 나라 벽난국에서 3인의 공주가 배를 타고 제주의 연혼포에도착하여 3인의 성인들과 혼인하였고, 이들이육지의 곡식을 가지고 들어오고 또농경법을 전해주어 농사를 지으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삼성혈이 지금처럼성역화 되기 시작한 것은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