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잠들었던 국민들 !! 꿈속에서 일어난 일들이었으면 차라리 다행일텐데... 잠에서 깨어나이제야스스로 주인임을 깨달았다는 듯, 100만 시민이 서울 한 복판을 가득 메우고 있다. 모여든 사람들은 남여노소 가릴 수 없었고, 가족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민주국가의 주인임을 교육하는가 하면,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입시공부에 시달리기만 하던 중고생들까지 서울 한복판광장을 가득 메웠다. 자신들이 뽑아준 것은 공주가 아니고 대통령이며, 대통령은 군림하려 하지 말고, 이제뽑아진 국민의 뜻에 따르기를 요구하고 있다. 점심 무렵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국민들은 4시 무렵에는 시청앞 서울역 종로 을지로 서대문 동대문 숭례문까지 가득했으며, 최종 집회 중심인 광화문 광장으로 모여들어, 6시 쯤에는 광화문광장부터 시청앞 숭례문 서울역까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단 한건의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아, 세계의 어느 시위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평화적이고 모범적인 시민들이 자신들의의사 표현을 하였고, 평화의 촛불을 켜들고 자신들의 주장을 확실히 하였다. 오랫동안의 집회 중에는틈틈히 가수들이 오늘 모임을 함축한의미있는 노랫말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여성은 약하다고한다.하지만 반드시갚아야 할 한이 있거나, 지켜야할 자식이 있다면 가녀린 나약함은 멀리가고 남성보다 더 강하게 변한다. 불굴의정신을 지닌 여성이라고 하면 프랑스의 잔다르크를 꼽을 수 있다. 그녀의 힘으로프랑스는 100년 전쟁에 영국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와 못지 않은 인물을 한국에서 찾는다면 유관순을 비롯한여자 의병장윤희순 등 수많은 여성독립운동가를 들 수 있다.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치욕의 임진왜란시절오직 하나뿐인 목숨을 조국을 위해자신이 사랑한 남편의 원수를 갚기위해초개처럼 목숨을 버리면서 죽어간 여인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논개다. 그는 갔지만 그의 거룩한 생애를 추모하고자 그가 태어났던 곳에혼을 모시고 추모하는 곳이 장수읍내에 있는 논개사당 의암사(義巖祠)다. 의암이란 그가 진주 남강에 뛰어들 때 왜장을 껴안고 뛰어내린 바위의 이름이고, 이를 그의 사당이름에 붙인 것이다. 논개의 사당인 의암사는 그가 의롭게 죽은지 365년 만인 1955년 세워졌다. 300년이 넘도록 사당도 없이 그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과 그녀의 무덤만이 있었던 것을 1955년 그의거룩한 뜻을 더욱 추모하고자 의암사를 세웠고, 이후1974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북 군위군 부계면 팔공산 자락에자리 잡은 또 다른 석굴암이 있다. 이 석굴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절벽 위에 자연동굴을 이용하여그 안에 화강암으로 조성된 아미타삼존불을 모신 한국 최초의 석굴사원이다. 본래 석굴사원은 인도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부처님 당시부터 수행자들은 무소유를 실천하며 진리를 깨닫기 위하여 수행하였고, 그런 까닭에 오로지 수행할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되었다. 이들은 가진 것이 없기에 집도 자연동굴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옷은 중요부위만 가릴 수 있는 긴 한장의 천이면 되었으며, 음식은 아침 일찍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와서 7집을 거쳐서 정성껏 시주한 음식을 받고 수행처로 돌아와 서로 받아온 음식을 나누어 먹는 하루한 번의 식사로 대신하였다. 그런 전통으로 이루어진 인도의 석굴사원으로 수 백 개의 동굴로 이루어진아잔타와 엘로라 석굴이 유명하지만, 이밖에도 크고 작은 많은 석굴사원들이 여러곳에 산재해있었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된 뒤에 중국에서도 많은 석굴들이 조성되었다. 중국에는 둔황의천불동(일천개의 동굴이 있다는 뜻)을 비롯하여용문석굴 운강석굴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 인도와 중국의 석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깊어가는 가을, 갑자기 닥찬 한파와 대통령을 둘러싼 국정의어수선한 국내정치상황 속에서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야할 민족의 통일염원을 안고 파주 임진강가 안보관광지인임진각과 비무장지대 땅굴을 둘러보았다.임진각은 경기도 파주 임진강 바로 앞에 자리 잡아남한에서는 최북단이지만 북한지역으로 간다면, 임진각은 북녘으로 가는 최남단 길목이 된다. 얼마 전 미국으로 이민간 친지가 30년 만에 조국을 찾아왔다. 한국의 발전상만을 보기보다는 해외에 있다보니 오히려한민족 통일의 염원과 분단의 현실을 한국내에서보다 더 뼈저리게 느낀다기에, 기자는 그 현장을 찾아 이번에 자유로를 달려 임진각으로 가보자고 제안했다. 오랫만에 친지와 함께가본 임진각에는 여전히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었다. 30년 전에는 젊음을 불살라 이국땅에서한참 열심히 일하여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았다지만 세월의 흐름에는 예외가 없어서이제는 노인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임진각은 명절이면 북녘에 고향을 둔 실향민과 그의 자손들이 뻥뜷린 자유로를 가득 메우고 찾는 곳으로 자유로 왕복 10차선이 좁을 지경이 된다. 기자가 찾은 날은 명절연휴는 아니었기에 그리 붐비지는 않았지만, 북녘을 그리는 사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남한산성에 남아있는 유일한 장대(장수가 올라서서 명령ㆍ지휘하던 대)이다. 본래는 남한산성에5개의 장대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수어장대만 있다. 인조 2년 서장대라고 하여 1층으로 지었던 것을 영조 27년 광주유수 이기진이 왕명에 따라 2층으로 짓고 그 이름도 수어장대로 바꾸었다. 2층 내부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현판이 있는데 인조가 겪었던 8년 동안의 병자호란의 시련과 그의 아들이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청나라 심양에 갔던 것을 최대의 치욕으로 여기며 잊지말자는 뜻으로 무망루라는 별칭을 부여하였다. 이 무망루 현판은 영조가 쓴 친필로현판은 보호각에 보관하고 있다. 수어장대 바로 아래에는 청량당(淸凉堂)이란 사당이 있다. 청량당은 조선왕조 시절 남한산성을 축성할 때 동남쪽 부분을 축성책임을 맡았던 이회와 그의 처첩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당시 이회는 공사는 게을리 하면서 경비는 탕진한다는 모함을 받고 그만 억울하게처형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회는 성벽을 쌓는데 최선을 다했고, 그의 처첩은 삼남으로 내려가성벽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던 중, 남편 이회가 모함으로 처형당했다는 소식을들었다. 그 소식을 듣고 다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이제 남한산성은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시대(한민족의 국가였던 가야 부여를 합하여 오국시대라고도 한다.)부터 한강을 낀 요충지로 성곽과 한강을 지키는 군사주둔지였으나. 옛 성곽의 자취는 많지 않고 주로 조선시대의 성곽이 많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 내에는 전쟁 등유사시 왕이 대피하여 기거할 수 있는 행궁을 지었고, 실제로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기마병을 피하여 인조가 피신하여 한동안 농성도 하고, 피신한 동안 온나라에서지방군대까지 다 동원하여 남한산성으로 집결하였으나 불과 수백명의 청나라 기마병을 당해내지 못하여 결국 송파 삼전동으로 내려와 청나라 심양을 향하여 신하의 예를 갖추고 항복하고 말았던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이때 남한산성 행궁에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머물렀던 역사적 장소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부터 성곽과 행궁들은 돌보지 못하여무너져 내리고 훼손된 채 거의 버려지다 싶이 방치되었다가, 근래 역사유적 발굴자료조사를 거쳐 대대적인 복원사업을 마무리하여남한산성 행궁이 지금처럼복원되었다. 이제 가을이 되면 산천이 아름답게 물들고, 많은 사람들이 평화로운 산책길로 나들이를 하지만, 역사를 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이 내려다 보이는 운길산 중턱에 있는 수종사. 조선 전기 세조는 단종을 내치고 임금 자리에 올랐으나 그의 부도덕한 왕위 찬탈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꿈속에 나타나 더러운 놈이라 힐란하며 침을 뱉었는데, 그 침이 묻은 자리부터 종기가 나고 피부병이 온몸으로 퍼져 무척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세조는 피부병을 낫게하기 위해 온갖 영약을 처방하여 먹고 발랐지만 낳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전국의 유명한 기도처를 찾아다니며 기도하고 시주를 하던 중, 오대산 상원사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문수동자가 씻어준 뒤 그 피부병이 낫게 되었고, 상원사에서 돌아오는 도중 이곳 수종사 근처에서 머물다 밤중에 바위 굴속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마치 종소리처럼 들려와 그곳을 찾아 절을 짓고 수종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수종사는 운길산의 가파른 언덕 위에 있어 걸어서 오르자면 꽤 힘든 곳이지만, 요 근래에는 절 일주문까지 가파른 산길에 콘크리트 포장도로가 나 있다. 그러나, 운전하기는 무척 당혹스럽다. S자로 굽이 굽이 돌고 돌뿐 아니라 그 가파르기가 눈앞이 아찔하기도 하며, 중간에서 차량이 서로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만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기도가평의 운악산에는 깊은 골짜기에 유서 깊은 고찰 현등사가 있다. 현등사는천오백년된절로 그 창건 연대는 신라의 불교 공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연대는 서기 528년 으로 법흥왕은 불교를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불교를 공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구려, 백제가 150여년 전 불교를 받아들여발전을 하고 있었지만, 신라는 토착 귀족들의 반대로 불교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그 때 신라 하급관리였던 이차돈은 주변국으로부터 불교를 알게된 후 불교신자가 되어있었다. 이차돈은 신라가 발전하기 위하여는 보다 더 크고 넓은 세계와 접해야하고 국가의 부흥과 백성들의 교화를 위하여 좋은 종교인 불교를 신라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이차돈은 불교를 공인받는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바치기로 마음 먹고 왕에게 건의하였다. 자신은 죽어도 좋으니 자신이 죽을 때 분명 이적이 일어날 것이니, 그 이적을 본 뒤 불교를 받아들이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처럼 왕은 많은 대신들 없에서 이차돈의 목을 쳤다.그런데 그의 목을 치고 나서 이차돈이 예언한 대로 기이하게도 이차돈의 목에서흰 피가 솟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 22대 정조의 첫아들로 문효세자의 '묘'다. 문효세자는 정조와 '의빈 성씨'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정조의 왕자로 1781년에 태어나 1786년 5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마도 홍역이나 급한 전염병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어린 왕자가 죽자 정조는 크게음이 상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린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마음을 전했는데 처음에는 시호를 온효(溫孝)라 했다가다시 문효(文孝)로 바꾸었다. 처음에 묘를 쓸 때에는 '효창묘'라 하였다가 1870년 고종이 묘를원으로 승격되면서 '효창원'이 되었다. 정조는 문효세자가 너무도 일찍 죽어서 왕권승계를 무척 걱정하였고, 그 애잔한 마음을 담아 일찍 세상을 떠난 아들의 신도비를 직접 써서 세웠고 그 신도비가 '효창원'의 묘역 입구에 서있다. 그런데 효창원은 본래 마포구 효창동 현재 효창운동장 근처에 있었다. 그러던 효창원은1944년 일제 말기에근방을 개발하는 과정에 지장이 있게 되자, 이곳 고양시 원흥동서삼릉으로 이전하였다. 현재 효창원 앞에는 왕자의 묘로서 석물들이 서 있으며, 왕아니 왕비의 능에 비해 훨씬 간소하다. 석물은 원 앞에 장명등과 혼유석이 1기씩 서있고원의 앞에는망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어느덧 가을이 깊어 간다.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농부들이 부지런히 일하며 퇴비도 주고 잡초도 뽑아주는 노동의 나날이 있은뒤 그정성으로곡식이 익어가듯 불교를 공부하는 스님들은 무더위fmf 피하지 않고 마음 공부를 한다. 그 여름공부를 하안거라고 하여 장마철이 낀 무더운 여름100일 동안 참선 정진한다. 그 참선 기간동안 많은 스님들은 깨달음을 향하여 화두를 꿰뚫고자 정진 또 정진한다.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지금은 잠시 휴식을 취하는 기간이다. 이제 또 얼마 후면 다시 동안거를 시작한다. 인생과 우주의 진리를 깨치기 위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에 접근하고자하안거와 동안거를 통한 깨달음의 마음공부를 하는 곳이 서울 근교에 몇몇 참선 도량이 있다. 그 중에도봉산에 있는 원효사는 신라 원효스님이 창건한 절인데 이곳에많은 비구니 스님들이 참선공부를 하는 곳으로 꽤 유명한 송라선원이 있다. 세상이 늘 혼돈 속에 하루하루가 힘들다고 하지만, 지나고 보면 또한 그리운 추억이 되어버린다. 무덥다고 여름을게을리 보냈다면 이가을에 아무런 소득을 얻기 어렵다. 힘들어도 부지런히 공부하여 깨달음을 얻어야 진리에 가까울 수 있고, 그 깨달은 진리를 중생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