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동등잔받침으로 등잔을 2개 받칠 수 있게 되었다.사자의 발모양으로 4귀퉁이를 받치고 있는 기단위에 사람과 말의 혼합상인 켄타우르스 조각상이 서서오른손에 낫을 들고 있고, 양쪽의 등잔 받침위에 등잔을 놓았다. ▲ 청동 등잔 ▲ 흙으로 구워서 만든 등잔-1 ▲ 흙으로 구워서 만든 등잔-2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폼페이 최후의 날에 화산폭발로 삶의 현장이 그대로 화석화 되어버린 뒤에 까마득히 잊혀졌던 당시의 유물들이 그대로 들어났다 귀족들의 생활상은 지금 우리가 보아도 전혀 뒤지게 보이지 않은 화려한 것들인데 조각의 기법도 무척이나 세련되었다. 그들이 사용하던 일상의 것들중에 집안을 밝히는 등잔들 또한 무척이나 아름답고 인상적이었다. 청동으로 만든 등잔이나 흙으로 만들어 구운 등잔, 청동으로 주조하여 만든 등장받침 등은 현대 조각가들도 쉽게 만들지 못할 것 같은 것들이었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중. 04월 5일까지 전시예정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
▲ 비너스상. 그리이스 조각기법을 그대로 계승한 듯 ▲ 청동인물상 포비디우스 가문의 인물로 추정 ▲ 대 저택의 집주인의 두상으로 추정 ▲ 여인의 두상 ▲ 정원의 조각상 ▲ 남자의 전신상 ▲ 청동인물상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국립중앙박물관 폼페이 발굴 유물전에 전시된 인물상들이다. 아름답고 세밀한 조각기법이 뛰어나 2000년 전의 조각상이 아니라 현대 조각가의 작품이라고 하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조각상들에 감탄이 절로 나는 작품들이다. 석조와 청동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서양예술의 진수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서양미술은 이집트의 조각기법이 그리이스로 전해지고 그리이스의 기법은 로마로 전해졌다. 그런데 그리이스는 각 각의 폴리스들이 도시국가를 이루면서 자신들이 추앙하는 신들을 위하여 신전을 짓고 자신들의 신들을 가장 사실적이고도 아름답게 조성하였다. 그 조각기법은 로마가 그리이스를 정복함으로써 그대로 로마에 전수되었다. 한편 그리이스의 조각기법은 파키스탄 지역을 정벌했던 알렉산더대왕에 의해 파키스탄 간다라지역에 전수되어 불상의 출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불상의 조각기법이 없었으면 지금 중국이나 한국에도 불상이 없었을지 모르
▲ 화산연기 속에 몸부림치는 개 ▲ 업드려서 최후를 ▲ 코를 막고 외롭게..무척이나 냉정한 자세이다. ▲ 화산지옥-1 ▲ 화산지옥-2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중인폼페이 발굴유물전에 다녀왔다.2000년 전 번성했던 로마의 한 도시였던 폼페이 근처에있던 베스비우스 산의 분화구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과 화산재 그리고 유독가스가 분출하여 그동안 로마최고의 문화생활을 하던 폼페이는 지상의 천국에서 아비지옥유황불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최후의 화산이 폭발한 때는 기원후 79년 8월 24일부터 하루동안이었고 그 이전에는 기원후 62년 격렬한 지진을 경험하여 그곳이 지진지대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살던 삶의 터전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인간의 습성 때문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곳임을 알면서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에 화산이 폭발한 때는 기원전 7세기이니,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로나 들어서생각하고 있었다. 그후 700년이 지난 당시(기원후 79년)화산이 또 폭발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며 하루 하루를 바쁘게 살았다. 또 그런 재난이 닥칠 것을 알았다고 해도,자신의 모든 것이 있는
[한국문화신문 = 최우성 기자] 삶은 현실이다. 삶은 관념이 아니라 처절한 현실이다. 바다는 그런 현실을 깨달은 사람들의 것이다. 아낙들은 정직하다. 꾸밈이 없다. 성형으로 삶을 뭉개는 도시의 여자들과 근본이 다르다. 하루종일 허리 한번 못 펴고 조개를 캔다해도 도회지 여자들 카페에 앉아 홀짝 마시는 커피 한 잔 값도 안나올 때가 허다하다. 그래도 캔다. 조개는 돈을 위해 캐지 않는다. 꿈을 위해 캔다. 그 꿈은 때로 아들을 변호사로 만들고 딸을 선생으로 만든다. 손자놈 군것질 거리도 되고 바튼 기침내뱉는 서방님 약값도 된다. 조개는 삶이다. 1월의 바다도 갯마을 아낙에겐삶의 현장일 뿐이다. -삼천포 바닷가에서-
▲ 새벽 7시 동녘에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이시간에는 태양의 위치를 잘 알 수가 없어서 우왕좌왕!! ▲ 방위를 나타내는 조형물과 바닷가 배조형물을 배경으로 해돋이를 기다린다. ▲ 모래밭에 포크레인 사이로 배조형물을 넣어본다 ▲ 붉게 변하는 하늘과 수평선 저 편의 태양을 기다리며 ▲ 검은 배조형물과 암벽사이 방파제로 찬란한 태양을 받아본다. [한국문화신문= 최우성 기자] 해가 바뀌어 2015년이 되었다. 그 햇수는 서양력으로 예수의 탄생이후 2015년이 되었다는 것인데, 우리 조상님들이 써오던 한겨레의 기원으로 치면 2015+2333=단기4348년이 되고, 부처님의 입멸을 기준으로 한 불기는 2015+544=불기 2559년이 된다. 그 기준에 따라 기원의 시작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었다는 것은 어찌보면 사람의 셈법상으로 볼 때 새롭게 정한 날짜의 시작을 의미할 뿐, 태양의 입장에서는 하등의 변화를 느끼기 어렵고, 우주적 관점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져 태양의 주변을 1년이라는 주기를 두고 한바퀴씩 돌고 있기에 지구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계절이 생기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하루도 빠
▲ 이게 붙을까?? 하면서 붙여보는 돌들!! ▲ 정성을 다하여 붙여보면.... 붙겠지...!!! ▲ 왜 이리 안붙나 !!! ▲ 드디어 붙었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새해를 맞이하여 올해의 운수를 미리 점쳐보는 마음으로 깎아지른 암반 위에 정성으로 붙여보는 돌맹이들..!!! 그냥 붙을 수 없을 것같은 90도 가까운 암벽 옆에 한해의 소원을 빌면서 붙여보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남들이 붙여놓은 돌 옆 빈공간에 자신의 돌을 붙이면서 정성을 들요보지만, 붙여놓고 돌아서면 또 떨어지니간단한 듯 하면서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사람들은 이리 저리 위치를 바꾸어가면서 돌을 붙여본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어딘가 암반의 턱이 있는 듯한 곳을 찾아 걸어보고 걸린듯 하면 슬며시 손을 떼지만 쉽게 붙이지 못하고 한참을 시름하다 천신만고 끝에 넓적한 돌하나를 붙여놓고 큰 염원이라도 이룬듯 의기양양하게 웃으면서 산을 내려온다. 작은 돌맹이 하나이지만, 깎아지른 암반위에 붙이는 것은 쉽지가 않고, 어렵게 붙인 돌맹이 하나에도 정성이 깃들여야 붙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깨달음으로 붙이고 돌아서는 마음이 자못 흡족한 모습이다. 작은 성공이지만, 그 작
▲ 의상대를 배경으로 떠오르는 해돋이 ▲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을 만났다는 홍련암, 모두가 관세음보살을 만나서 소원성취하시길...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또 희망을 품고 새해를 맞이한다. 지난 해는 세계적으로도 많은 전란과 테러로 얼룩도 졌지만, 한국의 육해공으로도많고도 많은 재난이 있었기에 이제는 그런 어려움을 떨치고 국운이 융성하는 새로운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역사적으로 보면 을미년은 그리 수월한 해가 아니었다. 근세 구한말에는 일제의 침략야욕에 스스로 중국의 제후국에서벗어나고자 선언했던 대한제국을 건국했으나,호시탐탐 남의 나라를 침약하여 제 속국으로 만들려는 제국주의에 시대를 맞이하여, 힘이 없는 대한제국은 국난의 연속 속에 살아야 했다. 일본의 앞잡이들은 갖가지 위협과 회유를 하면서 살고자 발버둥치는대한제국 황실을 제집 드나들듯 국정을 농락하였고, 미리 충분히 훈련한 사무라이들을 동원하여 대한제국의궁궐 수비대를처치하고 구중궁궐 경복궁 건청궁의 황후 침소까지 들어가 황후까지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 바로 120년 전 을미년의 일이었다. 나라가 망해 가는 절망의 시대에 일제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러나 그 시대를
▲ 흥국사 약사전 앞 연등 ▲ 북한산이 연꽃처럼 보이는 흥국사에서 ▲ 흥국사 약사전 앞 연등 ▲ 흥국사 경내 탑과 연등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울의 서북쪽에 자리한 고양시 흥국사는 13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사찰이다. 경내는 그리 크지 않으나, 고양시에서는 그나마 정연한 격식을 갖춘 사찰로 흥국사에는 약사전을 비롯한 극락전 지장전 나한전 삼성각등의 전각과 종루 요사채를 갖춘사찰로 고양시가 신도시로 커지면서 고양시와 서울 서북부에 사는 불자들과 시민들이 많이 찾는 고찰이다. 그런데 추운 겨울 사찰의 경내에 뜻밖에 연등이 걸려 있었다. 사찰의 연등은 주로 석가탄신일인 4월 초파일에만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때로는 음력 12월 8일을 기념해서도 연등이 걸린다고 한다. 12월이 다가는 이 추운 겨울에 걸린 연등은 다름아닌 부처님의 성도일을 기념하기 위함이다. '성도일'이란 부처님이 6년의 고행을 거친 후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가 된 날을 뜻하는데, 이로써 부처님은 자신이 생사를 걸고 수행하며 찾던 그리도 갈구하던 도를 이루었고, 그 이룩한 도를 중생들에게 펼쳐보이겠다고 나섰기에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성도일을 큰 명절로 여기는 것이다. 성도일을 맞이하여 연
▲ 목어를 배경으로 마루에 걸터앉은 사람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의 절에 가면 이제웬만한 곳이면 대부분 목어(나무 물고기)가 걸려 있다. 목어는 통나무의 속을 파내고 앞부분은 마치 용의 형상으로 머리를 만들고 몸통과 꼬리는 물고기 비늘과 꼬리를 형상화하여 만든 물건이다. 보통 목어는 범종 북 운판과 함께 범종각에 만들어 거는 것이나, 파주 보광사에는 대웅전 앞 누각건물의 처마밑에 걸려있어 이채롭다. 목어는 뱃속을 파낸 곳에 목탁을 치는 막대기로 안에서 두들겨서 소리를 낸다. 이처럼 목어를 치는 것은 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스님들이나 신도들에게 말로 하지 않고도 하고자 하는 바를 알리는 신호로 사용한다. 함께 모여 일을 한다든지, 공양(식사하는 일)을 할 시간이니 오란다든지, 중요한 회의가 있으니 모이라는 등의 일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신호로 알리는 것이다. 목어는 목탁과 같은 용도로 사용할 수 있으나, 들고 다닐 수는 없고 높이 매달아놓고 필요시에는 안쪽에서 막대기로 앞뒤로 두들겨서 소리를 내는 악기의 역할을 하는 물건으로 불전 4물의 하나이다. 목어를 만들게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옛날 한 승려가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옳
▲ 추사고택 솟을 대문 ▲ 솟을 대문에서 본 추사고택 사랑채 ▲ 안채와 뒤에 있는 추사선생 영당 ▲ 추사선생 영당 ▲ 사랑 마당에서 본 사랑채와 솟을대문 ▲ 사랑채에서 본 안채 ▲ 안채의 중정 ▲ 안채에서 본 고택의 담장 ▲ 밖에서 본 추사고택 ▲ 추사선생의 무덤 ▲ 추사선생의 기념관 앞에 있는 동상 ▲ 추사의 마지막 글씨 봉은사 대장경 '판전' ▲ 눈 속에서 더 푸른 소나무 세한도를 보는 듯하다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눈쌓인 추사 고택(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을 다녀 왔다. 어언 추사 선생이 가신지 올해로 158년째다. 하지만 충남예산에 있는 그의 고택에 들어서면 언제나 선생의 인품을 느끼게 된다.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은 조선 후기에독특한 글자체를 남겼을뿐 아니라 사실에 근거를 두고 학문을 하는 실사구시학을 바탕으로 조선은 물론 청나라와 일본에까지 명성을 두루 날렸던 학자다. 당시 학자들은 학문을 사실에 바탕을 두고 연구하기 보다는 스승에게 물려받은 이론만을 금과 옥조로 여기는 풍토가 컸고 스승의 가르침과 다르면 거부하는 학통이 만연했다. 하지만 추사는 24세에 아버지 김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