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륵불 전경 ▲ 쌍미륵불의 다정한 모습 ▲ 왼쪽 미륵불 ▲ 오른쪽 미륵불 ▲ 쌍미륵불은 주변 나무들로 인해 이끼가 항상 많이 낀다. ▲ 미륵불 앞에서 기도하는 다정한 부부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파주 용미리에는 보물 제93호로 지정된 용암사 쌍미륵석불이 유명한데 그 크기만도 압도 당할만큼규모가 거대하다. 용미리 미륵불은 거대한 자연암벽에 부처님의 몸통과 옷자락을 새기고 머리와 갓은 별도의 바위를 깎아서 얹혔다. 조성시기는 고려시대로 알려져 있으니 천년이 넘은 부처님이다. 유래도 흥미롭다. 고려 13대왕인 선종이 자식이 없어 오래도록 부처님께 기도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그러자 선종은 원신궁주까지 맞이하였으나, 여전히 아들을 얻지 못하였다 . 그러던 어느날 원신궁주가 기도하다 깜박 잠이들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도승이 나타나 자신은 파주 장지산에 사는 사람으로 배가 몹시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서사라졌다는 것이다. 꿈을 깬 궁주는 꿈 이야기를 선종에게 이야기하자,선종 임금은 사람을 시켜서 장지산 주변을 살피게 하였다. 그랬더니이곳 장지산에 지금의 미륵불을 새긴 바위가 있어 그 바위에 원신궁주가 보았다는 두 도승을 새기게하고
▲ 북한산 봉우리들이 보이는 고양시 지축동 흥국사에서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수도권 천년고찰로 이름이 있는 고양시 지축동에 있는 흥국사는 경내는 비록 그지 않고아담하지만 유서깊은 사찰이다. 사찰의 유래에 따르면 661년 신라문무왕때원효대사가 창건하고 그 이름을 흥성암으로 불렀으나 이후 나라를 흥하게 하라는 의미의 기원을 담아흥국사로 변하였다. 흥국사는 전국의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때 폐허가 되었던 것을 이후 중건했는데, 조선조 후기 영조임금이 자신의 생모인 숙빈최씨의 묘인 소령원으로 행차하던 중 이곳에서 하루를 묵었다고 하여 왕의 행차를 모신 사찰이며, 그가 직접쓴 약사전 현판이 지금도 약사전 전면에 붙어있다. 이후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원찰로서 유지되었다. 흥국사에는 약사전에 약사여래불을 비롯한 흥국사극락구품도와 흥국사괘불이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건물로는 약사전 나한전등이 경기도 문화재로 보호되고 있다. 가는 길은 구파발 전철역에 내려서 의정부 방면으로 가는 버스나 북한산성으로 가는 버스를 타면 쉽게 갈 수 있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 가을이 물들어가는 불암산 바위 아래 석천암이 자리하고 있다. ▲ 부처님 형상이 있다는 불암산 산마루 ▲ 불암산 바위에 기댄 석천암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푸르고 무성하던 잎들이 차츰 제 색을 잃어가고 있지만, 또 다른 색으로 옷을 입은 듯 아름답다. 무상함을 불가에서는 제행무상이라 한다. 결코 그 어느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이 현상계의 진리이고, 그렇기 때문에 한시도 게으르지 말고 정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름 푸르름과 더위에 지칠 때에는 언제 가을이 올까 싶었지만, 찬이슬과 서리를 한 번만 맞고보면 푸른 잎도 금새 퇴색되고 낙엽이 되어 앙상한 가지만 남긴다. 하지만 그 모습 또한 생명있는 존재의 또 하나의 모습이므로 그대로 반갑게 맞이하고, 얼마 있으면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리라. 불암산 산마루에는 파란 가을하늘과 울긋불긋 단풍진 나뭇잎이 보이고, 물들어가는 나뭇잎사이로 여전히 푸른 소나무도 보인다. 겨울에도 꼿꼿한 푸른 소나무는 세파에변치않는 지조로 여겨 옛 사람들은 몹시 아꼈다. 불암산산마루에는 크고 우람하게들어난 바위의 모습이 있는데 바위가 마치 부처님 모습과 같다하여 불암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
▲ 금관-1 ▲ 금관-2 ▲ 금관-3 ▲ 금관-4 ▲ 금관-5 ▲ 금관-5의 상세 ▲ 금관장식-1 ▲ 금관장식-2 ▲ 금관장식-3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에 의하면 한국은 고대 금관의 과반을 갖고 있는 금관의 나라라고 한다. 중국의 거대한 황제릉들이 많이 있지만 금관만은 별로 보이지 않으며, 여타 많은 나라들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로 보아도 금관은 단연 우리 한국의 독보적인 전유뮬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신라의 금관이 화려하기 이를데 없지만, 백제의 우아한 금관도 여럿있고, 신라와 백제의 사이에 있었던 가야도 금관이 여럿 발굴되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이 금관을 그리도 잘 만들었던 연유는 금을 귀하게 여긴 탓도 있지만, 금이 많이 생산되었으며, 금을 잘 다루는 기술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금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까닭이리라. 우리는 한국에 가장 많이 있는 사람들의 성씨를 금(金)이라그 쓰고서도 금으로 읽지 않고 김(金)이라고 읽는다. 그리고도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당연한 듯 생각하지만, 이는 본래부터 금을 김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고, 본래는 금이라고 불렀었다. 그런
▲ 대가야박물관 전경 ▲ 대가야를 대표하는 토기모형(박물관 앞에 재현품) ▲ 고분발굴장면 목곽의 관이 있고 주변에는 순장자들과 부장품들이 가득하다. ▲ 왕릉의 부장품들 재현 곡식과 토기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 발굴된 토기들-1 대부분 굽이 있는 받침과 토기들이 제기의 모양을 연상한다. ▲ 발굴된 토기들-2 ▲ 가야토기상세-1 ▲ 가야토기상세-2 ▲ 가야토기 상세-3 ▲ 토기-4 ▲ 토기-5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고령군 대가야박물관에 전시중인 가야왕릉의 토기들. 나무 널판지로 목곽을 만들고 그 안에 왕과 함께 시중들 시자들을 둘러서 배치하고 그 안에는 저승에서 사용할 수많은 부장품들을 함께 묻었던 가야왕릉에는 가야만의 독특한 형태의 토기들이 함께 묻혀있었다. 고령 대가야는 가야왕국들이 차츰 신라에 복속되는 중에도 최후까지 남아있던 왕국으로 서력기원 400년 경 고령읍을 둘러싸고 있는 지산동의 산의 능선에 700여기의 무덤들이 있으며, 이 무덤들 중에는 가야왕으로 추정되는 능(지산동 73호분)들도 있다. 대가야는 금관가야가 멸망한 뒤에도 우수한 철을 생산하여 이를 매개로 무기를 만들고 농기구를 만들어 이웃한
▲ 전시장과 고분군 ▲ 전시장 내부 ▲ 전시장 동산에서 내려다본 고분군들 ▲ 전시장 윗 동산에서 본 고분군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가야는 경상남도 김해의 금관가야가 기원 전 42년 김수로왕을 왕으로 세우면서 여러개의 가야연맹국가로 존재하였으며,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가야만의 독특한 토기와 철기를 발전시켜 500여년을 생존하다가 562년 신라 진흥왕에 의하여 멸망당할 때까지 신라와 백제 그리고 왜의 사이에서번성했던 고대국가였다. 가야는 반도의 동남쪽의 내륙에 위치하여 바다도 그리 멀지 않지만, 내륙의 산간지방으로 쉽게 접근할 수도 없는 곳에 위치하여 치열한 각축속에서도살아남았지만, 그 역사적인 기록이 많지 않아 잊혀진 왕국이었다. 근래 가야시대의 고분발굴을 통하여 차츰 그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래도 본 모습을 알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실정이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 부여와 함께 5국이 존재했던 한국 고대국가의 당당한 일원이었다고 하여, 보통 한국의고대국가를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으로 한정하는 것에 반하여 고대 한민족은 고조선의 후계 국가로 크게 5국이 각축을 벌이던 시대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홍제천가의 물레방아 ▲ 홍제천가의 갈대숲 ▲ 안산에서 본 북한산 ▲ 안산의 맨위에 있는 봉화대 ▲ 안산에서 본 서울성곽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굽어보고 ▲ 63빌딩이 보이는 한강 ▲ 메타세콰이어 숲속에서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안산은 서대문구의 중심이 되는 산이다. 산 높이 해발 295m로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한양도성의 서쪽을 감싸고 있으며, 한양에서 중국으로 가는 길은 안산과 인왕산을 이어주는 재를 넘어야 했다. 이 재의 생김새는 짐을진 소의 등과 비슷하다하여 질마재라 부르기도 했지만 산의 모양이 어머니처럼 넉넉하고포근한 산이라하여 안산을 모악산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그 모악산에 있는 재라 하여 무악재(모악의 변음)로 더 알려져 있다. 안산의 최고 높은 봉우리에는 봉화대(최근 복원)가 있어 서해에서 접근해 오는 외적의 침입 시에 이 봉수대를 통하여 임금이 있는 한양성에 변고가 전해졌다. 이 산의 주변으로는 연세대, 이화여대, 홍익대 서강대 등이 있으며, 산 자락에는 오래된 봉원사가 자리잡고 있다. 안산의 동측면에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우리의 독립투사들이갖은 고초를 당하고 목숨을 잃은
▲ 가을이 물들기 시작한 산사 ▲ 석탑과 국화꽃이 어우러진 산사 ▲ 코스모스가 핀 석등 옆을 지나는 스님모습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가 을 산 사 - 이고야 가을이 물든다 마음도 물든다 고운 붉은 빛깔로 노을처럼 그렇게 물들어 간다 고즈넉하게. 가을색이 물들기 시작한 도심산사의 정경을 담아보았다. 최우성(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 문화재수리기술자로 한국인의 삶을 담아온 전통건축의 소중한 가치를 찾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북촌한옥마을 가옥 보수설계, 혜화동주민센타 개보수설계, 파주 화석정, 파산서원 등과 영주 소수서원의 정밀실측설계, 불국사 일주문, 안동하회마을, 제주성읍마을, 영주 무섬마을 등 문화재보수설계 일을 맡아했다. 포천시민의 종 종각설계, 용마산 고구려정, 도피안사 대웅전, 봉선사 종각 등을 설계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사진협회 회원, 문화재청 문화유산사진작가, 불혹의 포토클럽 회원
▲ 선잠단터 주변에는누에가 먹고 자라던 뽕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다. ▲ 선잠단터 표지석 ▲ 선잠단터 표지석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는 '선잠단(先蠶壇)'이 있었다. '선잠단'이란 비단실을 뽑아내는 '누에'신인 '서릉(西陵)'씨를 모셔두고 1년에 한차례씩 제사를 지내면서 뽕나무잎을 잘 먹고 누에들이 잘 자라서 좋은 비단실을 잘 뽑아낼 수 있게 되길 바라는 염원을 빌었던 곳이다. 선잠단의 제사는 왕비가 주관하였는데 왕비가 친히 납시어 누에치는 것을 모법을 보이고 대궐 밖에 사는 모든 사람들도 왕비처럼열심히 누에농사를 잘 짓도록 권하는 행사였으나, 이곳 선잠단은 1908년 선농단과 함께 사직단으로 그 제단과신위를 옮겨서 행사를 하게 되었다. 누에는 열심히 뽕나무 잎을 먹고자라, 다 자란 애벌레가 나방이 되기까지 머물러 있을 누에집을자기 입에서 뽑아낸 실로 누에고치를 짓는데, 그 고치가 바로 비단실이 되는 것이다. 그 가늘고 고운 비단으로 가득한 누에고치를 사람들은 뜨거운 물에 풀어서 누에가 입에서 처음 뽑아낸 실마리를 찾아내서 이를 실패에 감은 뒤에, 실패에 감긴 실들을 베틀에서날줄과 씨줄로 엮어짜서 비단옷감을 만들고, 그
▲ 길상사 관세음보살 ▲ 길상사 관세음보살 ▲ 관세음보살 근접촬영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동양의 불교와 서양의 천주교는인간의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는 같은 목표으로 생겨난 종교이지만,우주와 인간의 근본존재와에 대한 설정이 서로 달라다른 길을 걷고 있다. 다만, 그 수행의 여정중에는서로 통하는 바도 많다. 불교가 '일체유심조'를 내세우며 자신 안에 있는 불성을 깨우치려는 자각의 종교라면, 천주교는 미약한 인간은 절대자인 하나님의 피조물로 창조자에의지함으로써만 구원을 얻을수 있다는 것이니 많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두 종교의 성직자들은 종교인으로써 생활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많은 유사점이 있고, 서로가 통하는바도 많다. 그중에는 신앙의 대상이 되는 성스러운 상으로 조성하는 조각상에 있어서도 비슷한 점도 많다. 불교에서는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수 있다고한다.그래서 불교의 경전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많은 부처님이 등장하고 이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가진 부처상들을 만들어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모습으로 형상화 하고 있으며, 또 깨달은 부처와 중생인 인간 사이에는 그 중간에서 부처와 중생 사이에서 소통의 역할을 하는 보살이 있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