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복사지 전경 주변은 민가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 금강역사로 사찰 입구의 수호신이다. 보통 2기가 있어야 하는데 1기만 보인다. ▲ 금강역사의 모습이 매우 역동적인 무술시범 자세이고 얼굴은 이국적이다. ▲ 절 입구에서 절의 성격을 나타내는상징기를 달았던 당간지주다. 당간지주 사이에 깃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 절의 상징기나 행사를 알리는 기를 달았다 ▲ 고려시대 5층석탑으로 이 시대 탑의 특징은 통일신라의 균형미를 잃고 탑 층수도 3층에서 5층으로 늘었다. 탑신의 하단부에는 목조건물의 난간처럼 돌출한 장식이 있어 이채롭다. ▲ 탑신부는 다 없어지고 옥개석만 몇 층 남은 석탑유구도 있다. ▲ 부서진 석탑과 석불이 모셔진 전각. 전각은 본래 모습이라기 보다는 최소한의 보호각이다. ▲ 화강석 연화대좌 위에는 불상이 안치 되었을 터인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거의 어른키에 이를만큼 연화대좌가 큰 것으로 미루어 불상 크기 또한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 당간지주와 건물터, 석등의 좌대가 일직선을 이룬다. ▲ 정교한 석등의 좌대받침으로 복련을 정교하게 새겼다. 가운데 구멍은 석등의 하부가 놓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건물의
▲ 혼불문학관 전경 ▲ 혼불문학관 전시관모습 ▲ 혼불문학관 앞에서 해설해주는 해설사 ▲작가 최명희의 일생과 혼불의 내력에 대하여 열정에 넘치는 설명이 일품 ▲ 혼불에 대한 설명을 듣는 방문객들 ▲ 최명희 작가의 피할 수 없는 글쓰기 고백은 그것이 운명임을밝히고 있다 ▲ 생전 최명희의 집필실 ▲ 혼불에 나오는 장면을 입체로 제작한 전시물-1 ▲ 혼불에 나오는 장면을 입체로 제작한 전시물-2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50세의 짧은 생을 살면서 오직 하나의 작품에 모든 것을 걸었던 작가 최명희. 그녀는 1980년 4월부터 1998년 12월까지 무려 18년동안 길고 긴 세월을 오직 하나의 작품에 숙명처럼 몰입되었다. 그녀는자신의 몸에 이상신호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자신의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한민족의 혼불에 혼을 빼앗겨,민족 수난기에 남원군 사매면 매안마을의 한양반가를 지키던 3대 며느리들과 거멍굴 사람들의 이야기를 순 우리말의 아름다운 가락으로 복원하여자신의 '혼'마저 다 태우고 간 작가였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오랫동안 내려오던 전근대시대의 우리문화 속에 오롯히 살아있던 말과 글들이 영원
▲ 허가바위 암벽의 입구모습, 절벽 암반에 뚫린 자연동굴로, 바위의 부식상태가 상당히 진행중. ▲ 허가바위의 입구,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입구이나, 본래는 더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바닥이 많이 메워진 듯 보인다. ▲ 허가바위의 내부, 나루터로 사용되던 시절에는 중요한 터전으로약 20여평의 면적 내부에는 임시거쳐로 충분히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허가바위'를 구멍이 뚫린 바위라하여 '공암'이라고도 부른다. ▲ 한강과 인접한 곳에 공암나루터가 있었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허가바위는 서울 강서구 한강변에 위치한 자연암반에 뚫린 바위굴이다. 전해내려오는 바에 따르면 이 바위는 양천허씨의 시조인'허선문'이 출생한 곳이라고도 하며, 한민족의 의학성인인 허준선생이'동의보감'을 저술한 곳이라고도 한다. 허가바위 바로 앞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있어, 옛부터 나루터가 있으며 그 나루터의 이름은 이곳 바위굴에서 유래하여 '공암나루'라고 부렀다.자연암반에 뚫린 구멍으로 굴 안의 넓이가 20여평에 이르는 공간이 있어 비가 오면 피하기 좋을 곳으로, 옛날에는 나루터의 뱃사공이나 승객들의 임시 숙소로도 쓰였으리
▲ 황산대첩비 전경, 왜구와 치열한 전투의 흔적을 기록했던 대첩비의 훼손된 원본과 다시 세운 황산대첩비가 함께 있다. ▲ 파손되어 땅 속에 묻혔던 비석을 다시 캐내어서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역사의 흔적은 잘 지워지지 않는 법. ▲ 부서진 대첩비 원본의 보습 ▲ 세로 세운 대첩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그 안에 세로 세운 대첩비가 있다 ▲ 새로세운 대첩비각 현판과 대첩비 ▲ 새로 세운 대첩비의 모습 ▲ 대첩비를 보러온 답사객들, 국립민속박물관 문화답사팀 ▲ 한자로 쓰여진 대첩비를 한글로 다시 세운 번역본 황산대첩비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나라이면서 멀 수밖에 없는 나라인가 보다. 한국과 일본,그 인연은 참으로 기구하다. 고대 한국이 일본열도에수많은사람과문물을 전한 것은 일본의 사서들이 앞다투어 기록하는 바와 같다. 그러나 그러한 은혜는 침략과, 침탈이라는 형식으로 고대 한국을 괴롭혀 왔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역사적 상처는 첫째가 고려말 왜구들의 침탈이었고; 둘째는 조선시대 중기에 발생한 임진왜란이었으며, 셋째로는나라를 통째로 빼앗겼던일제강점기이다. 벌써 70년이 지난 일제
▲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 전경 ▲ 가까이 본 평화의 문 ▲ 평화의 문 옆면 ▲ 물에 비친 평화의 문 ▲ 평화의 문 천장(좌 청룡) ▲ 평화의 문 천장(우 백호) ▲ 평화의 문 천장(남 주작) ▲ 평화의 문 천장(북 현무)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서울송파구 올림픽공원은 본래 고대 백제의 첫번째 도읍지였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열 때에는 몽촌토성 이외에본격적인 발굴조사 없어, 이곳이 백제의 도읍이었는지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왈가왈부 무성한논쟁만이 있었다. 그런 과정 속에 올림픽이 결정되고경기장이 지어지고 공원이 조성되면서,이곳에올림픽을 역사적으로기념한 공원화가 이루어졌다.당시 서울올림픽의 목표는 세계인이 한데 모여 체육대회를 한다는 것을 넘어첨예한 이념대립을 해소한다는 세계사적인 소원이 있었고, 한국은 이를 내세워 울림픽을 열수 있었다. 이는 한반도가세계이념의화해의 장이되고 평화의상징물이 되기를 기원하는 시작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리하여 한국은 그런 의미를주제로세계인을 대상으로 상징적인 작품을공모하였고 그 중에 이'평화의 문'이 당선작으로 뽑혀서 들어서게 된 것이다. 평화의
▲ 세월호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는 물고기 (조계사 앞마당) ▲ 물고기등(조계사 극락전 앞) ▲ 하늘을 나는 물고기등 ▲ 물고기등이 마치 희생자의 영혼이 하늘을 나는 듯하다. ▲ 떼지어 하늘을 나는 물고기등들 ▲ 멀리 멀리 떼를 지어 나아가는 듯한 물고기등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인천항에서 아름다운 제주를 향하여부푼 꿈을 안고 출항했던 세월호가 2014년 4월 16일 새벽엉터리 같은 선장과 승무원들의 미숙으로항해도중졸지에 침몰하여진도 근해에서 수장된지가 7월 24일로 어언100일이 되었다. 처음 인천항을 출발할 때 부풀었던 어린 싹들과 제주에서의 새삶을 꿈꾸었던 젊은이들의꿈은 망망대해 바닷속으로 흔적도 남기지 않고사라졌고, 이제 300여명의원혼들은 대한민국을 짓누르고 있다. 그러나 원혼들을 달래줄 정부의 대책은 나오지 않고, 떠도는 원혼들을 달래주지 못하는 유가족들만이 하염없는 안타까움에 애를 태우고 있다. 기본을 잘 지키지 않은 탓에 난 해난사고이지만, 그 해난사고를 막지는 못했더라도기본적인 구조활동만 제대로 했더라도 수많은 인명은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나 하나 집어 볼수록 너무도 원망스러움에 허망한마음 달랠 길이
▲ 혜화동 주민센터 대문 ▲ 대문 앞에서 본 혜화동 주민센터 ▲ 한옥 주민센터 전경 ▲ 'ㄷ'자 집 주민센터 본채의 중정(가운데 뜰) ▲ 중정 밖에서 본 안쪽 ▲ 나무의 구조체와 문짝이 이루는 정갈한 주민센터 벽면 ▲ 중정 안쪽에서 본 중정 전경 ▲ 주민센터 내부 업무공간 ▲ 뒷 뜰 ▲ 주민센터 앞마당의 왼쪽 뜰 ▲ 담장의 꽃담과 화초들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지 100여 년. 그 이전 시대에는 모두 한옥이었던 우리 건축문화가 100년이 지난 지금에는 대부분 서양식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간 우리 조상들의 삶은 터전인 살림집은 물론이고 사무공간까지 모두 전통 건축이었으나 이 모든 것을 서양건축에 내 맡긴 이래 아무도 업무용 공공건축물을 한옥으로 지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로구에서는 다른 지자체에서는 꿈도 못꿀 시도를 하였다. 종로는 한국의 심장부로 조선시대 5대 궁궐과 많은 한옥이 그나마 잘 남아있는 곳이다. 이러한 특성을 잘 살려 종로구에서는 혜화동 주민센터를 한옥으로 짓고자하는 발상의 전환을 하였던 것이다. 이런 계획에 따라 한옥으로 남아있으면서도 주민센터로서의 위치와 규모가 적당한 집을 물색하다가 현재의 집
▲ 짚으로 생활용품을 만드는 장인. 옛날에는 집에서 누구나 하던 일을 이제는 한옥마을 같은 곳에서 재현해주는 모습으로 봐야한다 ▲ 짚으로 만든 짚신들. 여름에는 땀이 차지 않아 무좀 걱정도 없다. ▲ 짚신꾸러미. 먼길을 갈 때는 괴나리봇짐과 함께 짚신봇짐을 챙겨서 갔다. ▲ 예쁘게 색실을 넣어 만든 아이들용 짚신 [그린경제/얼레빗= 최우성 기자] 지금으로부터 50년, 기자가 어렸을때만 해도짚신을 삼는 광경은심심치 않게 보았다. 그 때 고무신은 막 나온 신발로비싸고 귀했다. 우리의 삶이 50여년도 채 안되어 급속한 물질문명의발전으로 송두리째 바뀌었다.초가집과 기와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던 마을은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가 자리를 잡은 요즈음 남산 한옥마을은 그나마 우리에게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이곳에는 한국인들도 많이 찾지만 푸른눈의 외국인들도 많이 찾아온다. 그런데 최근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찾아 오고 있는 듯 한옥마을 곳곳에는 중국인들 일색이다. 이러한 외국인들을 위해 한옥마을에서는 짚신이나 짚방석 따위를 재현해주고 있다. 무더운 여름에도 쉬지 않고 짚풀을 엮어 짚신 따위를 삼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름없는 장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
▲ 삼척 천은사 아래에 있는 동안사(動安祠, 이승휴의 사당), 사당의 앞에는 연못이 있다. ▲ 동안사 정면 ▲ 동안사 측면 ▲이승휴의 유허지에 세워진 기념비,천은사에서 1km 아래에 있다. ▲ 동안사 근처 통방앗간, 물레방아의 원형으로 물의 낙차를 이용하여 방아를 찧던 방앗간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삼척 두타산 기슭에는 '천은사'라는 절이 있고 그바로 밑에는'동안사(動安祠)'라는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고려말 무신정권 이후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시절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한민족의역사를 대 서사시로 읊은 이승휴를 기리는 사당이다. 이승휴는 제왕운기를 지어서 역대 조상들의 왕계보를 시로읊은 시인이기도 하다. 고려중기김부식은 우리의 역대 단군의 조선과 삼한의 역사가 중국과 비슷한 시기였다고 기록한고서들을 믿을 수 없다며모조리빼버리는 우를 범했다. 하지만 이승휴와 일연스님은 우리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와 견주어서 전혀 못할 게 없다는 생각으로 당시 있었던'고기'의 기록들을 믿고 그대로 인용하여고조선과 단군을 비롯한 삼한의 역사를 기술함으로써한민족의 역사와 유래를 오늘의 기록유산으로 남겨주었다. 고기에 적혀있던 고대 한국
▲ 죽서루 앞마당에서 본 죽서루, 누정에 올라보면 오십천 변의 경치가 보인다. ▲ 죽서루의 현판 정면 2층 누각에 쓰인 명필의 글들, 관동제일루, 죽서루 ▲ 죽서루의 측면, 왼쪽에는 오십천이 흐른다. ▲ 죽서루의 1층 기둥-1,자연상태의 바위들이 제멋대로 놓여있다. ▲ 죽서루의 1층기둥-2, 바위와 기둥이 서로 이를 맞추어 자리하고 있다. ▲ 죽서루의 1층기둥-3,바위가 없는 곳에는 자연초석을 설치하고 기둥을 세웠다. ▲ 죽서루 2층누각, 누각에는 200명이 앉아도 충분할 만큼 넓다. ▲ 누각의 외부에서 내려다 본 오십천 주변은 옛 정취는 사라지고아파트와 현대 건축물이 빼곡하다. 동국박람회를 기념한 야릇한 건물이 경관을 차지하고 있다. ▲ 죽서루의 공포, 조선조에 세워진 다른 누각들보다는 단순 간략한 공포를 하고 있다. ▲ 누각 안에서 본 모습. 자연을 전혀 느낄 수 없도록 나무들이 정비가 안된채 자라났다. ▲ 누각에서 무더위를 식히며 글을 읽는 사람들, 마치 옛날 선비들 모습을 연상해본다. ▲ 제일계정 조선조 현종때 명필 허목의 글씨, 유려한 필체가 마치 계곡의 물이 휘몰아 내려간 듯 하다. ▲ 율곡이 죽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