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무라카미하루키(村上春樹, 66살) 씨의 일본은 중국과 한국에 지속적으로 사죄해야 한다.는 발언을 두고 중국의 4,500만 명이나 되는 트위터들이 하루키씨를 칭찬하는 글을 올렸다고 일본의 인터넷 언론, 사-치나(サ-チナ, searchina) 신문이 4월 21일자로 보도했다. 이 신문은 무라카미 씨가 일본은 중국과 한국 그리고 제2차세계대전시 침략을 받은 국가에 대해서 이들 나라가 완전히 잊을 수는 없지만 충분히 사죄 받았으니 이제 되었다고 할 때 까지 반복해서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말을 전했다. ▲ 무라카미 하루키를 칭찬하는 사-치나(サ-チナ, searchina) 4월 21일자 기사 또한 이 신문은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여러 번 오른 일본의 저명한 소설가인 무라카미하루키 씨의 발언에 대해 중국의 누리꾼들은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며 트윗에 올라 온 글을 소개했다. 역사를 존중하고 그것을 인정해줘서 고맙다 / 가장 사랑하는 일본의 소설가 중 한 명이다 / 일본에 모두 멍청이만 있는 게 아니다 / 무라카미 씨의 책을 사야겠다 / 그에게 노벨상을 주어야한다 / 그의 작품은 모두 멋지다. 하지만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민간 기악합주의 주류를 이루어 온 삼현육각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서울 경기지방의 삼현육각(三絃六角)음악이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피리의 최경만, 대금의 이철주, 해금의 김무경 등이 보유자로 인정되었다는 이야기, 삼현육각의 악기편성은 피리 2인, 대금 1인, 해금 1인, 북 1인, 장고 1인 등, 6인이며, 최경만은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의 악장으로 재임하던 2006년 11월, 50여년 만에 대풍류 전곡을 재구성하여 발표하여 호평을 받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대령산과 같은 음악은 매우 느린 템포로 진행되기 때문에 호흡이 길어야 하며 피리와 대금, 해금의 가락이 어렵고 장단이 불규칙한 악곡이라는 이야기, 전승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의욕적으로 공연을 준비한 삼현육각보존회의 열의와 뒤늦은 결정이긴 해도 서울시의 시 지정 문화재로 삼현육각을 선정한 것은 크게 환영할 일이라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삼현육각으로 연주되는 서울경기의 대풍류 원가락을 되찾는 작업에 고심해 온 보존회장 최경만은 어렵고 재현이 불가능했던 부분은 지영희 편 《민속음악연구집》을 참고하였고, 선배나 선생들이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사실을 사실로서 처리하면 문제는 간단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학살, 방화를 자인하게 되는 일이므로 제국주의 입장에 불이익을 초래한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간부들과 협의한 결과 (조선인의) 저항에 대한 살육 등을 인정하지 않기로 결의하고 밤 12시에 산회 하였다. 이는 1919년 4월 15일 화성 제암리교회 학살을 주도한 우츠노미야타로우 (宇都宮太郞,1861-1922)가 그의 일기에서 밝힌 내용이다. 우츠노미야는 당시 일본 육군에서 가장 잘나가는 3인방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선군사령관 육군참의관으로 조선에 건너와 있었다. 그는 15년간 일기를 썼는데 그의 일기는 2007년 《일본육군과 아시아정책(日本陸軍とアジア政策)》이란 3권짜리 책으로 일본에서 펴낸 바 있다. ▲ 제암리학살사건의 진압사령관 우츠노미야의 일기 《일본육군과 아시아정책(日本陸軍とアジア政策)》책 광고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화성 제암리교회 학살에 대해 사건 이틀 뒤인 4월 17일치 매일신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수원, 진위, 안성 등지에서는 하세가와(長谷川)대위가 지휘하는 제1반(第1班)과 츠무라(津村)특무조장이 지휘하는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민간 기악합주의 주류를 이루어 온 삼현육각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서울 경기지방의 삼현육각(三絃六角)음악이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피리의 최경만, 대금의 이철주, 해금의 김무경 등이 보유자로 인정되었다는 이야기, 삼현육각의 악기편성은 피리 2인, 대금 1인, 해금 1인, 북 1인, 장고 1인 등, 6인이며, 최경만은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의 악장으로 재임하던 2006년 11월, 50여년 만에 대풍류 전곡을 재구성하여 발표하여 호평을 받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대령산과 같은 음악은 매우 느린 템포로 진행되기 때문에 호흡이 길어야 하며 피리와 대금, 해금의 가락이 어렵고 장단이 불규칙한 악곡이라는 이야기, 전승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의욕적으로 공연을 준비한 삼현육각보존회의 열의와 뒤늦은 결정이긴 해도 서울시의 시 지정 문화재로 삼현육각을 선정한 것은 크게 환영할 일이라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삼현육각으로 연주되는 서울경기의 대풍류 원가락을 되찾는 작업에 고심해 온 보존회장 최경만은 어렵고 재현이 불가능했던 부분은 지영희 편 《민속음악연구집》을 참고하였고, 선배나 선생들이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1950~60년대에 미국유학을 갔다가 돌아오지 않아 두뇌 유출된 한국학자들에 대한 보도가 지금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15세기 조선초에도 이런 두뇌 유출이 있었다. 불교나 도교 그림을 그리던 최고 수준의 승려화가들이 조선의 억불정책 아래 활동이 어려워지자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갔다. 당시에는 입국심사나 이민법 겉은 것은 없었다. 일본절에서는 조선의 승려화가들을 우대하여 받아들였으므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 되었다. 이들이 그린 그림들은 모두 일본미술사로 편입 되어 버렸다. 출가한 사람은 속가의 이름을 버리고 법명을 받는다. 이 때문에 그림에 서명된 이름만으로는 그가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이 어렵다. 이는 미술사학자인 코벨의 이야기다. 그는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에서 15세기 일본의 선묵화를 그린 사람 대부분이 조선인이었음을 그의 스승 후쿠이리키치 교수의 발표를 토대로 밝혔다. 그동안 일본 화단에서는 슈분(周文)이라는 일본 화가가 수묵화를 전부 그린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1925년 후쿠이 교수의 조선인 작품을 발표하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그리고 그동안 일본발음이 같은 슈분이라는 인물 가운데 조선인 슈분(秀文)이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 주 속풀이에서는 충남 서천이 낳은 판소리 이동백 명창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근대 판소리사에서 큰 이름을 떨친 이동백(李東伯,1867-1950)은 충청남도 서천 태생이다. 84세로 작고하기 전까지 평생을 소리꾼으로, 창극운동과 후진 양성 등 판소리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란 점, 일제 강점기, 국권상실과 급격한 서구화의 충격으로 판소리가 위축될 시기에 김창환, 송만갑, 김창룡, 정정렬 등과 함께, 판소리를 지켜가며 창극운동에 공이 큰 5명창 중에 한 사람임을 얘기했다. 또 그의 성음은 매우 미려하면서도 다양해서 청중을 웃기고 울리는 일을 자유자재로 했으며 특히 하청(下淸)이 웅장했다는 점, 그는 심청가와 적벽가에 능했고 새타령은 이날치 명창 이후 당대 독보였다는 점, 그의 판소리제는 충청지역의 중고제로 분류된다는 점, 최근에 미국 빅터 음반사에서 녹음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동백 명창의 100년 전 음반, 춘향가 SP(유성기 음반) 희귀본 2장이 발견되었다는 점, 이동백을 기리는 전국판소리 경연대회가 충남 서천에서 열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부터는 엊그제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렸던 삼현육각(三絃六角)이
[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오늘은 24절기의 다섯째 청명(淸明)인데 한식의 하루 전날이거나 같은 날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라는 속담이 생겼다. 이날 성묘를 간다. 옛날에는 한 해에 네 번, 곧 봄에는 청명, 여름에는 중원(中元, 음력 7월 15일), 가을에는 한가위, 겨울에는 동지에 성묘를 했다. ≪동국세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청명날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비벼 새 불을 일으켜 임금에게 바친다. 임금은 이 불을 정승, 판서, 문무백관 3백60 고을 수령에게 나누어준다. 이를 사화(賜火)라 했다. 수령들은 한식(寒食)날에 다시 이 불을 백성에게 나누어주는데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기다리는 동안 밥을 지을 수 없어 찬밥을 먹는다고 해서 한식(寒食)이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온 백성이 한 불을 씀으로써 같은 운명체로서 국가 의식을 다졌다. 꺼지기 쉬운 불이어서 습기나 바람에 강한 불씨통(藏火筒)에 담아 팔도로 불을 보냈는데 그 불씨통은 뱀이나 닭껍질로 만든 주머니로 보온력이 강한 은행이나 목화씨앗 태운 재에 묻어 운반했다. 농사력으로는 청명 무렵에 논밭의 흙을 고르는 가래질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특히 논농사의 준비 작업이다.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한국의 장승은 돌이나 나무에 사람의 얼굴을 새겨서 마을 또는 절 어귀나 길가에 세워 잡귀와 나쁜 액운의 출입을 막거나 절의 경계를 표시하는 민간 신앙물이다. 이러한 장승을 마을에서는 수호신으로 믿기도 했다. 장승은 대부분 남녀로 쌍을 이루는데 남자를 가리키는 장승 기둥에는 천하대장군, 여자를 가리키는 기둥에는 지하여장군이라고 새기기도 한다. 그런데 일본에도 이러한 장승이 있다. 도조신(道祖神, 도소진)이 그것이다. 일본의 장승은 대부분 돌장승이 많으며 한국처럼 마을의 경계를 나타내거나 교차로 등에 세우는데 이 장승을 마을신으로 받들고 나쁜 액운이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거나 길 가는 나그네의 안전을 비는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 나가노현에 있는 석비 형상이 장승 도조신(道祖神) 일본의 장승은 조각을 하여 어떤 형태를 만들기 보다는 자연석 상태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더러는 석비 형상이나 5층탑 모양 또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도 있다. 이러한 장승은 전국에 널리 분포하고 있으나 흥미롭게도 이즈모신화(出雲神話)의 고향인 시마네현에는 장승이 거의 없다. 아마도 강력한 신앙인 이즈모신사(出雲神社)가 장승신앙을 허락하지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조선의 세력가들이 다나베를 위한 만찬장에서 가곡을 들려준 것과 관련하여 가곡이 어떤 특징을 지닌 음악인가 하는 점을 간단하게 언급하였고, 궁중음악과 춤을 촬영하는 현장 이야기를 하였다. 가곡은 형식이나 선율, 시김새나 창법, 또는 발음법 등이 특징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재미있는 노래가 아니어서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기는 어려운 노래라는 이야기, 그러나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을 하나로 묶는 힘을 지닌 노래라는 이야기, 그리고 다음날 궁중음악과 춤을 촬영할 때, 이를 신기하게 여긴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담장 일부가 허물어지는 소동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명월관에서는 궁중 연례악과 춘앵전 등 궁중무용을 찍었고, 촬영이 끝나고 명월관 특별 연회장에는 이동백(李東伯)이 나와 판소리를 들려주었는데, 그는 조선 제일의 명우인 만큼 성량이나 음색이나 모두 탄복할 정도였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명월관 별실에서 가진 연회에 조선 명창 이동백이 어떤 소리를 들려주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러나 조선 제일의 명우답게 성량이나 음색이 모두 탄복할 정도라는 점에서 이동백의 위용이 대략적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근대 판소리사에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헤이안시대(平安時代、794-1185)는 일본 역사상 가장 문화가 꽃핀 시대라고 일컬어지는데 바로 이 시기에 일본문자인 가나문자가 생겨났는가 하면 궁정문화가 농익은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헤이안시대 391년 가운데 천황들의 수명은 후기로 갈수록 짧아진다. 전기의 평균 수명은 54살, 중기는 44살인데 견주어 후기에는 33살로 급격히 천황의 수명이 떨어진다. 후기로 오면서 천황의 수명이 짧아진 것은 정권의 불안정 속에 끝내는 사무라이에게 정권을 빼앗기게 되는 원인에서 찾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와 연관 시키는 견해도 있다. 특히 헤이안 말기로 오면 승려들의 정치개입이 극심해지게 되는데 후삼조천황 집권기인 1072년에는 매사냥이 금지되고 1130년에는 살생금지령이 법률로 정해지게 되어 왕실의 식단이 푸성귀로 일색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에 그 원인을 두는 사람들이 있다. 왕실의 식단이 단백질 부족 등 영양결핍의 지경에 까지 이르러 이 무렵의 천황들의 수명은 안덕천황 전의 2조(23살), 6조(13살), 고창(21살)천황의 평균 수명은 19살로 생을 마감할 정도였다. 헤이안 말기 천황의 권력이 쇠퇴하는 한편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