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영조 기자] 오늘은 을미년(乙未年) 양띠해가 시작되는 설날이다. 설날을 맞아 그 깊은 뜻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먼저 설날이란 말의 말밑(어원)부터 살펴보자. 먼저 조선 중기 실학자 이수광(李睟光, 1563 ~ 1628년)의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설날을 달도일(怛忉日)이라 했다. 곧 한 해가 지남으로써 점차 늙어 가는 처지를 서글퍼하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설은 사리다'(愼, 삼가다)'의 `살'이 변한 말이라며 설날은 신일(愼日) 곧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라 하여 몸과 마음을 바짝 죄어 조심하고 가다듬어 새해를 시작하는 날이라고 생각한다. ▲ 찬란하게 떠오르는 설날 아침 해돋이 또 설은 새해라는 정신적ㆍ문화적 의미의 낯 설은 날'을 뜻한다고 보기도 했다. 처음 가보는 곳, 처음 만나는 환경은 낯 설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밖에 연세설(年歲說)도 있는데 산스크리트어는 해가 바뀌는 연세(年歲)를 '살'이라 하는데 이 '살'이 '설'로 바뀌었다고 보기도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교토 동지사대학 교정의 매화는 이제 막 꽃망울을 피우고 있었다. 붉은 꽃, 흰 꽃송이가 긴긴 겨울을 이겨내고 곱게 피어났다. 매화꽃 교정을 거닐면서 나는 맑고 순수했던 윤동주 시인의 자취를 행여 느낄 수 있을까 싶어 정문에서 도서관과 예배당으로 이르는 붉은 벽돌의 건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동지사대학 교정에는 홍매화가 가득 피었다. 교토 동지사대학 안의 예배당과 핼리스이화학관 사이에 있는 윤동주 시비는 이제 교토를 찾는 한국인들에게는 명소가 되었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1995년 2월 16일 윤동주시인 순국 50돌을 맞아 시비(詩碑)를 세운 몇 달 뒤의 일이었다. 그때는 시비가 들어선지 얼마 안 되어서 인지 학교 정문의 수위 아저씨에게 물어 보아도 시원하게 시비가 서 있는 위치를 잘 설명해주지 않아 여러 건물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헤맸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쯤 뒤부터였을까? 동지사 정문 수위실에 “윤” 자만 말해도 한글판 “윤동주” 안내문을 내줄 정도로 윤동주는 동지사대학의 유명인이 되었고 나는 해마다 윤 시인을 만나러 동지사를 찾았다. 그가 떠난 교정에 검은 빗돌만 서있는 외로운 모습이지만 그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조선의 아악을 이해하고 그 보존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상진행과 전변상웅(田邊尙雄-다나베히사오)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상진행은 일본 궁내성 악부(樂府)의 책임자였고, 다나베는 부속 기관이었던 아악연습소의 강사였는데, 어느 날 그의 스승 상진행 악장으로부터 당시 조선의 아악부가 폐지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당시 총독부의 반응은 동물원과 아악부 중 동물원을 남기고 아악을 폐지한다는 결정을 내렸는데, 이미 그 이전부터 아악부는 재정곤란을 이유로 악인들이 감축되고 있었다. 1917년 무렵에는 겨우 50여명이 남게 되었다가 폐지가 결정되면서 명완벽 등 6명의 노악사만이 남아 잔무를 처리 중에 있었다. 일본 악부의 책임자였던 상진행 악장 역시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 다나베가 찍은 종묘등가악(宗廟登歌樂), 1921년 대 그렇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지극히 불행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어온 아악부인가!! 저 멀리 신라시대부터 국가의 음악을 관장해 오던 음성서(音聲署)란 국가기관이 그 뒤 대악감이나 전악서 등으로 이름은 바뀌었으나 고
[한국문화신문 = 김리박 시조시인] 냄팥꽃(瑞香ㆍ千里香) 즈믄길 간다는데 골길은 못가는지 아니야 그만하면 바람도 춤출걸 오늘밤 고래술꾼이 냄걸치고 오는구나 * 즈믄길 : 천릿길 * 골길 : 만릿길 * 고래술꾼 : 술부대 * 냄 : 냄새 향기가 즈믄길(천리길)을 간다는 냄팥꽃(천리향)이 필 때가 되었는가? ▲ 향기가 천리를 간다는 냄팥꽃(천리향)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한국에는 예전에 서당이 있어 아이들의 글공부를 전담했다. 그렇다면 일본에도 서당이 있는가라고 묻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있다. 한국의 서당과 같지 않지만 일본에는 테라코야(寺子屋)라는 곳에서 아이들의 교육을 맡았다. 테라코야(寺子屋)는 한자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절집(테라)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서 유래한다. 한국의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중심으로 한 선비들이 글공부를 통해 과거시험을 치러 정계로 나갔지만 일본에는 가마쿠라 막부 성립 (1192) 이후부터 명치 때까지(1868) 약 670여 년간 무사정권시대이다 보니 차분하게 글공부를 시킬 상황이 되지 못했다. 권력을 장악한 무사들은 자신이 싸워서 쟁탈한 정권을 빼앗기지 않게 늘 방어를 해야 했기에 일본의 670여 년간은 한마디로 사무라이들의 싸움판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내전 상태였기에 글공부를 하고 앉아 있을 여유는 없었다. 붓 대신 칼의 시대였다. 그래도 글줄께나 하던 사람은 절집의 승려들이었다. 따라서 일찍부터 절에서는 아이들 교육을 맡아 했는데 여기서 테라코야(寺子屋)가 한국의 서당 구실을 했던 것이다. 일본의 테라코야의 시작을 흔히 중세의 절에서부터 잡고 있지만
[한국문화신문 =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 주 속풀이에서는 조선의 음악 현황을 살피러 나온 다나베 앞에서 아악부의 존폐를 걱정하며 연주하게 된 노악사들의 심경을 상상해 보았다. 그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선조들에게 응원을 청하였을 것이고, 그러면서 최선을 다해 연주를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 이에 감동을 받은 다나베는 실로 세계의 보배인 이 음악을 동양의 음악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는 이야기, 악사들의 혼신을 다한 연주도 연주이지만, 그보다도 종묘제례 음악속에 녹아있는 한민족의 혼이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하였다. 감동을 받은 다나베는 아악부의 청사를 확대 증축하는 문제, 악사들의 처우 개선문제, 아악의 보존을 당국에서 더욱 철저히 해야 된다고 청원을 하였고, 일본 정부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아악부에서는 계획대로 일반인들로부터 아악생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등, 등을 하였다. ▲ 다나베 히사오가 쓴 《조선, 중국음악조사기행》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침략국의 음악인이 식민지국가의 음악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니 쉽게 믿어지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조선을 방문하여 조선의 아악을 직접 조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2월 3일은 일본의 절분(세츠분, 節分) 날이다. 보통 입춘 전날을 절분으로 치는데 새로운 계절이 돌아오는 때 특히 추운 겨울이 끝나고 사람들이 활동하기 좋은 때에 귀신도 슬슬 활동하기 좋은 때라고 여겨서인지 이날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기 위한 콩 뿌리기(마메마키) 행사가 절이나 신사에서 있다. “복은 들어오고 귀신은 물러가라(福は內、鬼は外)”라고 하면서 콩을 뿌리고 볶은 콩을 자기 나이수 만큼 먹으면 한해동안 아프지 않고 감기도 안걸리며 모든 악귀에서 보호 받는다는 믿음이 있다. 절분행사는 예전에 궁중에서 했는데 《연희식, 905년》에 보면 색색으로 물들인 흙으로 빚은 토우동자(土牛童子)를 궁궐 안에 있는 사방의 문에 걸어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인형은 대한(大寒) 전날 밤에 만들어 입춘 전날 밤에 치웠다. 토우동자 풍습은 헤이안시대(794-1185)의 츠이나(追儺)와 밀접한데 이는 곧 귀신을 물리치는 행사로 이후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로 내려오면 토우동자의 장식은 사라지고 복숭아 나뭇가지를 신성시 하면서 콩뿌리는 행사로 변한다. 복숭아 나뭇가지는 고대 중국과 한국에서도 귀신을 쫓는 주술적인 나무로 통했다. ▲ 절분날 볶은
[한국문화신문 =서한범 명예교수] 지난 속풀이에서는 종묘제례에서 둘째 잔을 올리는 아헌례(亞獻禮)의 이야기와 종헌례, 철변두, 송신례와 관련된 음악이야기를 하였다. 아헌례에 쓰이는 정대업의 음악적 분위기는 보태평과 달리, 씩씩하고 활달하며 강렬하면서도 애절한 느낌을 주는 음악이란 점, 둘째 잔을 올리는 의미는 조상의 외적인 업적, 즉 무(武)와 공(功)을 칭송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 음악의 시작은 진고십통이라고 해서 큰 북을 10회 치는 것으로 시작하며 일무는 무무라는 점을 들었다. 그리고 종헌례는 셋째잔을 올리는 의식이며 음악이나 춤은 아헌례와 동일하지만, 음악을 끝낼 때는 대금십차(大金十次), 즉 징을 10회 쳐서 음악을 끝낸다는 점, 종묘의 제례음악에서 시작은 북소리, 종료는 쇳소리를 내는 것은 고진퇴금(鼓進退金)으로 옛 전쟁터에서 북소리 울리거든 진격, 쇳소리 나면 퇴각이라는 전술에서 유래되었다는 점, 다음의 의식은 철변두와 송신(送神)례로 이어지며 음악은 공히 진찬이란 점, 특히 종묘제례악은 1920년대 초, 조선의 음악을 살피기 위해 나온 일본의 다나베 히사오(田邊常雄)를 감동시켰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 다나베가 찍어 책에 올린
[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나의 소원은 모든 나라 사람들이 나의 조국인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국제인이 되는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교토에 고려미술관을 세운 정조문 선생이 고려미술관개관기념 도록에 쓴 인사말이다. ▲ 조각보(고려미술관 소장) ▲ 검은 칠 나전 화조문양 상자 (고려미술관 소장) 일본에서 평생토록 우리 문화재를 수집해 온 고 정조문(1918~89) 선생은 1925년 일본에 건너가 갖은 고생 끝에 사업에 성공하여 교토를 제 2의 고향으로 여기며 살았던 분이다. 그는 1949년 골동품상이 밀집해 있는 교토 산조(三條) 남쪽 거리를 걷다가 어느 한 가게 진열장에 놓인 둥그런 조선 백자 달항아리를 보고는 그 아름다움에 반해 당시 돈으로도 엄청난 금액을 주고 이 달항아리를 사들이게 된다. 물론 정조문 선생이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는 달항아리를 사고 싶어 자그마치 1년 동안 돈을 모았고 마침내 달 항아리를 손에 쥐게 되는데 그에게 이 골동품은 호사가들이 손쉽게 사들이는 골동품 이상의 것이었다. ▲ 교려미술관 전경(왼쪽), 정조문 선생이 1년 동안 꼬박 돈을 모아
[한국문화신문 = 사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종묘의 제사의식 중 영신례, 전폐례, 진찬, 초헌례까지의 음악과 춤 이야기를 하였다. 영신례는 신을 맞이하는 의식으로 <희문>을 헌가에서 연주하며 왼 손에 약(), 오른손에는 적(翟)을 들고 추는 문무(文舞)가 행해진다는 점, 두 번째 의식은 전폐(奠幣)례로 등가에서 <전폐희문>을 연주하며 역시 문무가 추어진다는 점, 전폐희문은 희문을 변주시켜 연주한다는 점, 세 번째 의식은 진찬의 예로 진찬이라는 악곡을 연주하지만 일무는 쉬게 된다는 점을 말했다. 또 종묘나 문묘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대가 두 곳에 나누어져 있는데, 돌계단 위의 악대는 등가, 댓돌 아래 넓은 뜰에 위치한 악대는 헌가라는 점, 그리고 네 번째 의식이 바로 첫잔을 올리는 초헌례의 의식인데 여기서는 보태평 전곡을 반복하여 연주하게 되며 춤은 문무가 이어진다는 점, 제사를 지낼 때 초헌, 아헌, 종헌 등 세잔을 올리는데, 그 중에서도 첫째잔의 의미는 조상의 내면세계, 즉 문(文)과 덕(德)을 칭송하는 의미라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 종묘제례에서 일무를 추고 있다. 이번 속풀이에서는 종묘제례에서 둘째 잔을 올리는 아헌례(亞獻禮)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