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종승 민속학자] 한순옥은 부산의 춤 생활을 접고 상경한 뒤 서울 성북구 삼선교에 70여 평의 큰 공간을 마련하여 다시 한순옥무용연구소 문을 열었다. 이화여대 등 여러 대학 무용과 진학을 꿈꾸는 입시생들을 대상으로 각 분야 전담 지도자를 초빙하여 한국무용을 비롯한 현대무용, 창작무용 그리고 발레까지 가르쳤다. 이 무렵, 한순옥은 국립무용단 창립 단원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실력을 인정받아 지도위원으로도 활약하였다. 그러면서 한순옥은 전국 어느 곳에서나 스승 최승희 춤에 대한 행사가 있게 되면 서슴지 않고 달려갔다. 1990년대 후반에는 부산지역에서 세기의 무용가 최승희 춤 예술의 부활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산 무용가 양학련 등이 주축이 된 추진위원회에서는 최승희 춤 계보를 잇고 있는 김백봉과 한순옥 두 명무를 앞세워 최승희 춤 조명에 나선 것이다. 최승희 춤의 재조명 프로젝트는 20세기를 갈무리하고 새로운 천년의 시대를 맞이하는 한국무용계에 잠재적 포부의 폭발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무용학자 정병호(1927-2011)는 이 사업을 의미 있다고 강조하면서 “예술적 정신을 되살려 세계인의 공감을 끌어냈던 최승희 춤은 1990년대를 마감하는 한국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김 교수가 옆에 앉은 아가씨를 보니 눈이 약간 풀려 있다. 술 냄새가 약간 났다. 아마도 다른 방에 있다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김 교수도 지금 2차지만 아가씨도 2차인 모양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키는 작고 몸의 윤곽이 S 라인은 아니어도 얼굴이 동글동글한 모습이 귀여웠다. 머리는 약간 붉은 빛이 돌게 염색했으며, 입술에 빨간색 연지를 진하게 바른 것이 술에 취한 남자의 시선을 자극했다. 옷은 까만 블라우스에 아주 짧은 검은 치마를 입었다. 허벅지살이 다 드러나 보였다. 가슴이 많이 파진 옷은 아니어도 젖가슴은 봉긋해서 술에 취해 게슴츠레해진 눈에는 예쁘게만 보였다. “미스 최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오빠.” 아가씨는 처음부터 오빠라고 불렀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아가씨는 고향이 어디인가?” 김 교수는 처음부터 고향을 물었다. “전남 승주군이에요.” “그래? 나는 승주군 아가씨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더라. 승주군 아가씨를 꼭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아침 신문에서 본 ‘오늘의 운세’가 좋더니 내가 너를 만날 운명이었나 보다.” “정말이에요?” “그럼! 승주군이 고향인 아가씨가 예쁘다고 강남 술집에서 소문이 났지.” “무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박경민 작가의 《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언제 시작되는가》를 보면서, 무능하고 비겁한 고종에 화가 많이 났었는데, 그러다 보니 또 하나의 무능한 임금 인조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조를 다시 생각하다 보니 인조는 단순한 무능한 임금이 아니라, 살인자로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듭니다. 너무 과격하다고요? 왜 제가 그런 과한 생각까지 하는지, 잠깐 얘기해 보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인조는 쿠데타로 집권한 임금입니다. 인조는 집권하면서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전면 바꿨습니다. 광해군이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잘 펼쳤음에 반하여 인조는 청나라는 오랑캐 나라라고 오로지 명나라에만 충성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이 청나라가 좋아서 균형외교를 펼쳤겠습니까? 당시 명나라는 지는 해이고 청나라는 뜨는 해였습니다. 그래서 광해군은 조선을 위하여 멀리 내다보고 균형외교를 펼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균형외교를 펼치더라도 그동안의 명나라와의 관계나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준 은혜를 생각하여 표 안 나게 조심조심 균형외교를 펼쳤습니다. 그런데 인조는 조선은 소중화(小中華)라는 몽상에 빠져 어찌 오랑캐와 상종할 수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며칠 전 서울 인사동 남쪽 초입에 있는 어느 건물 뒤 카페의 정원에 가니 거기 명물이었던 오래된 오동나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뭇가지와 잎들이 다 말라버린 것을 보니 꽤 오래전에 쓰러진 모양이다. 지난해 5월 저녁에 그 나무 밑에 앉아서 맥주를 먹곤 했는데 몇 달 동안 가지 못한 사이에 쓰러진 것이다. 여주인 말로는 8월 큰비가 왔을 때 나무줄기와 가지, 잎에 물기가 잔뜩 많아지자, 무게를 못 이기고 쓰러진 듯하다고 한다. 쓰러지면서도 다행히 사람이 다치지 않았고 그 옆 다른 나무에도 피해를 주지 않아, 평소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던 그대로 가면서도 멋지게 갔다고 귀띔해 준다. 인사동의 오동나무는 백 년이 넘었던 것 같다. 오동나무로서는 원체 컸기에 이 일대의 명물이었고, 여름에는 무성한 나뭇잎으로, 겨울에는 그 가지들이 하늘로 뻗어간 기세로 사람들을 압도했다. 인사동을 누빈 시인 천상병 씨가 특별히 이 나무를 사랑해 당시 인사동 건달이라 불리던 전우익 씨(《혼자만 잘 살면 무엇하누》의 저자)와 자주 나무 밑에서 그 좋아하던 막걸리를 많이 마셨다는 것이고, 1970년대 말인가 이 나무를 베내려 하자 전우익 씨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90) 정숙하게 앉는 것은 공부하는데 가장 도움이 된다. 반드시 옷을 깨끗이 입고 자세를 엄숙히 한 다음 눈을 감고 코끝을 내려다보면서 망령스레 움직이지 않는 것 또한 좋은 방법이다. 뜻(情)이 움직일 때에는 그 생각이 어떠한가를 살펴서 알맞지 않으면 막아버리고 알맞으면 따라 행하되, 그 도를 이미 다했다면 예전처럼 고요할 것이다. 정숙하게 앉아 글을 읽는 모습. 이것이 옛 선비의 ‘공부하는 모습’으로 가장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모습이다. 위의 글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유명한 홍대용이 자신을 스스로 깨치는 말을 지어 의관을 정제하고 학문을 익힐 것을 다짐한 글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과거제도 때문인지 우리 문화는 유난히 공부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아무리 훌륭한 가문 출신이어도 ‘공부를 잘해야’ 인정받을 수 있었던 분위기, 출신보다 실력을 중시했던 사회 풍조가 수많은 문제 속에서도 조선 왕조를 약 500년 동안 지탱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역사 저술가인 이수광이 쓴 이 책, 《공부에 미친 16인의 조선 선비들》은 조선 역사에서 공부로 이름을 날린 인물 16인을 골라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그들의 삶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식재료 중에서 외국인이 매우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번데기, 깻잎, 오징어, 청국장이 그러하지요. 번데기는 그 생김새 때문이고 깻잎은 독특한 향이 익숙하지 않아서이며 오징어와 청국장은 냄새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외국 비행기 안에서 마른오징어를 뜯으면 비행기가 회항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맛난 오징어 냄새를 외국인은 사체 썩는 냄새로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하니 세상엔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셈입니다. 오래되지 않은 옛날 강릉이나 삼척 앞바다에 가면 밤바다가 오징어 집어등<어화(漁火)>으로 환하게 수놓아지곤 했는데 요즘은 수온의 상승으로 동해안에서 오징어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공부를 가장 잘하는 물고기로는 문어가 꼽힙니다. 한자로 문어(文魚)로 글월 문(文)자를 쓰니까요. 왜냐하면 문어의 머리에는 먹물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놈 먹물께나 먹었구나." 옛 어른들이 지식인을 지칭하던 말이었고 문어의 대가리가 사람의 머리와 많이 닮아 있어서이기도 합니다. 잉크가 귀하던 시절에는 오징어나 문어의 먹물로 글을 썼는데 매끈매끈하니 잘 써졌다고 하지요. 문제는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김 교수가 보신탕과 관련하여 어이없는 사건을 이야기했다. 브리지트 바르도(프랑스의 유명한 여배우)가 최근에 우리나라 정부에 야만스러운 보신탕을 금지하라는 편지를 보내었다고 한다. 똑같이 보신탕주의자인 박 교수는 브리지트가 편지를 보내었다는 김 교수의 이야기를 듣고 술김에 분개하였다. “웃기는 x이네, 프랑스 인들은 혐오스레 개구리를 먹는다는데, 우리가 개구리를 금지하라고 프랑스 정부에 편지하면 뭐라고 대답할까? 브리지트가 한국에 항의 방문차 한 번 온다고? 오기만 하면 내가 꼭 만나서 데리고 갈 데가 있지. 거기 말이야, 강남의 보신탕 뷔페 집에 데려가서 대접을 한 번 해야지!”라고 기염을 토하였다. 박 교수의 말에 의하면 강남구청 근처 어딘가에 보신탕 뷔페 집이 있다는데, 꼭 한번 가 보자는 것이다. 보신탕 뷔페 집에는 개고기의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단다. 김 교수가 아직 한 번도 못 먹어본 개의 거시기도 있다는데 값도 일반 호텔 뷔페에 비하여 별로 비싸지 않다고 한다. 술은 보통 사람을 용감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두 사람이 술의 힘을 빌려 프랑스 여배우를 욕하고 또한 사대주의적인 우리나라 정부를 욕하다 보니 시간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해마다 가을이 되면 관에서 대장을 가지고 나와 그 과일 개수를 세고 나무둥치에 표시해 두고 갔다가 그것이 누렇게 익으면 비로소 와서 따 가는데, 혹 바람에 몇 개 떨어진 것이 있으면 곧 추궁하여 보충하게 하고,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으면 그 값을 징수한다. 광주리째 가지고 가면서 돈 한 푼 주지 않는다. 또 그들을 대접하느라 닭을 삶고 돼지를 잡는다.”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이 펴낸 《한국인이 알아야 할 한국문화 이야기》에서 인용하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무슨 과일이기에 관리가 이렇게 백성을 닦달하는 것일까요? 바로 제주도 귤과 유자입니다. 지금이야 흔한 귤이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귤은 정말 귀한 과일이지요. 그렇기에 제주도에서 귤이 진상되면 임금은 ‘황감제(黃柑製)’라는 임시과거까지 열었다는군요. 그런데 이런 귀한 귤을 가져 가면서 돈 한 푼 주지 않는군요. 귤을 거저 가져가는 것은 세금의 일종인 공납이라고 하더라도, 공납 징수하러 와서는 백성이 대접하느라 내놓는 닭고기와 돼지고기를 날름날름 거저먹어요? 에라이! 그리고 귤이 바람에 떨어지면 그건 징수 대상에서 제외하여야 하는데 오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등대 옆에서 배를 기다렸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하품을 참으면 기다렸는데도 등대도 나도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등대는 나보고 '등대' 같은 놈이라고 했을 거다 ... <외로운 사람이 등대를 찾는다> 이생진 이생진 시인은 말한다. 등대는 외로운 사람의 우체통이라고. 등대는 별에서 오는 편지와 별에게 보내는 편지를 넣어두는 우체통이라고. 그래서 사람들은 혹시나 하고 등대를 찾아가고 별에게 보낼 편지를 넣으려고 등대를 찾아간다고. 어느 날 아침 등대를 가까이서 만났다. 건너편 바다 끝에서 지진이 일어났다고, 높이 60센티가 넘는 해일이 밀려 온 동해 묵호항에서였다. 바다가 보이는 숙소에서 캄캄한 밤을 지나고 보니 나도 등대가 그리웠던 모양이다. 가까이에서 보는 등대가 반갑다. 이생진 시인의 말처럼 묵호항 등대 앞에는 별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우체통이 있었다. 그 앞에 끝없는 바다가 있고 그 바다를 가르고 해가 뜬다. 그 해를 위해 어두운 밤을 밝혀준 것이 등대다. 우리 현대인들은 모두 캄캄한 밤을 사는 듯 점점 외로워지고 있다. 서로 이웃을 못 보고 외롭게 살다 보니 점점 더 외로워진다. 근래에 많은 분이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민속학자] 민속학자 양종승 박사가 공연참관과 면담조사를 통해 기록한 한국 무형유산 전승자들의 예술 생애를 <명인ㆍ명무 열전>으로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평생 남북분단의 아픔을 안고서 세기의 무용가 최승희(1911-1967) 춤 정신을 이어왔던 한순옥 명무가 지난 2022년 2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속세에 젖은 현대인의 멍든 심신을 정화하고 흐릿한 정신을 달래주었던 예술가, 공허하고 허무한 내면세계를 자신의 기법으로 미적 세계를 기름지도록 극대화하며 윤택한 삶을 부추겼던 무용가 한순옥의 이름 석 자를 되새겨 본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며 서울특별시 무형유산 한량무 보유자 조흥동은 한순옥을 “평생 올곧은 예술가의 자세로서 예술뿐만 아니라 삶 모두를 깨끗함의 상징처럼 사셨던 무용가”라고 회상하였다. 국가무형유산 승무 보유자 채상묵 또한 한순옥은 “권위적이지 않은 진실한 무용가로서,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늘 해맑은 춤새로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만들어줬던 깊이 있는 예술가”였다고 회고하였다. 한순옥의 담백한 춤 세계와 올곧았던 삶의 속내를 알 수 있게 하는 기억들이다. 미학적 자세를 앞세워 반듯한 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