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어제(29)는 국치일(國恥日)이었다. 국치일이란 “나라가 수치를 당한 날 곧,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날인 1910년 8월 29일을 이른다.”라고 《표준국어대사전》은 정의하고 있다. 국권을 강탈당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던 ‘모든 것’을 강탈당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에게 있던 모든 것이란 ‘숨 쉬는 것’만 빼고 모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 숨 쉬는 것조차 편하지 않았으니 생사여탈권을 모두 빼앗긴 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의식주 가운데 의생활을 담당했던 면화도 그 ‘강탈’ 가운데 하나다. <목포근대역사관1관> 2층에는 일제의 면화 침탈의 시작을 알리는 ‘조선육지면발상지지(朝鮮陸地綿發祥之地)’라는 비석이 있다. 비석 글씨는 조선제 6대 총독인 우가키 가즈시게(宇垣 一成, 재임 1931~1936)의 글씨다. 이 비석 뒷면은 '明治37年(1904년)에 목포주재 대일본제국 영사 와카마츠 도사브로(若松兎三郞)가 고하도에서 처음으로 육지면 재배를 시작했다'라는 내용이 쓰여 있다. 이 비석의 원본은 전라남도 목포시 달동, 고하도 선착장에서 원마을로 가는 들머리 오른쪽 언덕에 있으며(2012. 5. 21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돌아서 새해가 되었다. 젊었을 때부터, 아니다, 아마도 초등학교 시절부터 새해에는 항상 올해의 계획을 세웠다. 책을 1주일에 1권 이상 읽겠다. 매일 아침 5시에 일찍 일어나서 새벽 공부를 하겠다. 자격증을 하나 따겠다. 일본어를 배우겠다. 아들과 하루에 한 번 이상 사랑의 대화를 나누겠다. 교과서로 쓸 책을 한 권 쓰겠다 등등. 그러나 그러한 새해 결심은 항상 지켜지지 않는 법이다. 작심삼일에 그만 무너지는 결심도 있고 두세 달 가는 결심도 있다. 그러다가 연말에 돌이켜 보면 새해 결심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그때는 방학 숙제가 많았다. 매일 일기를 쓰고, 곤충 채집을 하고, 명승고적 방문기를 기록하고 등등... 방학이 끝날 무렵이 되면 ‘방학숙제를 해야 하는데...’라며 걱정만 했다. 그러다가 개학 날짜가 내일모레로 다가오면 그때야 방학숙제를 한다고 온 야단법석을 치르고도 언제나 한두 가지 숙제는 하지 못했던 기억이 아직 새롭다. “다음 방학 때에는 꼭 방학숙제를 먼저 하고 놀아야지”라고 결심하지만, 그러한 결심은 초등학교 6년 동안 한 번도 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1910년 8월 29일은 일제의 한국 병탄이 이루어진 경술국치일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국내는 물론 중국 연해주 미주 일본 등지의 해외동포 사회에서도 망국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해마다 국치일 추념식을 거행하였다. 국내에서는 곳곳에 ‘국치일을 잊지 말자’는 격문이 나붙었으며, 감옥의 독립투사들은 집단 단식으로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해외의 동포들은 대대적인 항일행사를 열고 이날 하루 단식으로 독립의 결의를 다졌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국치일을 추념하는 국가행사는 열리지 않았다. 다만 달력에 ‘국치일’이 표시되는 정도였다. 부끄러운 역사인 ‘국치’를 기억하기보다 순국선열을 추도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일을 잊지 않아야 훗날의 가르침이 된다’(前事不忘 後事之師)는 의미에서 을사늑약 체결지인 중명전 복원 추진(2004년), 강제병합조약 체결지인 남산 옛 통감관저 터에 표석 건립(2010년), 국치일에 조기 게양 조례 제정 추진(2013년), 국치 관련 항일음악 발굴(2017년),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2018년) 등의 사업을 진행해 왔다. 경술국치 114년을 맞아 민족문제연구소는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국가유산청(청장 최응천)은 「포항 용계정(浦項 龍溪亭)」과 「포항 분옥정(浦項 噴玉亭)」을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로 지정하였다. 「포항 용계정」과 「포항 분옥정」은 자연경관과 조화된 조선 후기 누정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경상북도 포항 지역의 문화유산으로, 1696년(용계정), 1820년(분옥정)에 각각 건립되었다. 「포항 용계정」은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조성된 2층의 누마루를 가진 정면 5칸, 측면 2칸의 ‘ㅡ’자형 팔작지붕 건축물로, 앞쪽에는 기계천이 흐르고 있다. 창건 당시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여강이씨 후손들의 수양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1778년(정조 2년)에는 정면 5칸으로 증축하였고, 1779년(정조 3년)에는 용계정 뒤편에 서원의 사당인 ‘세덕사’를 세우면서 용계정에는 ‘연연루’라는 현판을 달아 서원의 문루 역할을 하였다. 1871년(고종 8년) 서원 철폐령 당시에는 훼철을 막고자 주변에 담장을 쌓고 다시 옛 현판을 달아 화를 면했다고 하며, 이후 여강이씨의 문중 회의 및 행사 장소로 활용되며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 문루(門樓): 아래에는 출입하는 문을 내고 위에는 누를 지은 건물 *
[우리문화신문=정석현 기자] 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 심청가 보유자인 송재영 명창이 장장 5시간에 걸쳐 동초제 ‘심청가’를 선보인다. 전북 임실에서 태어난 송 명창은 어린 시절 장터에서 우연히 국악 공연을 보고 소리에 매료됐다. 화가를 꿈꾸며 비사벌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우리 소리의 전율을 잊지 못해 창악부로 진로를 변경해 소리에 입문했다. 소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는 2000년 남원춘향제 전국명창대회 명창부 최우수상, 2003년 전주대사습놀이 명창부 장원(대통령상)을 차지하며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나라 안팎 무대에서 꾸준히 소리를 선보여 판소리뿐만 아니라 연기ㆍ연출 등 여러 방면에서 대중과 활발하게 소통하고 있으며 2021년 전북특별자치도 무형유산 ‘심청가’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현재는 전주대사습놀이 보존회 이사장 및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 출강하는 등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송재영 명창이 9월 <완창판소리> 무대에서 들려줄 소리는 동초제 ‘심청가’다. 판소리 ‘심청가’는 효녀 심청이 눈먼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바쳤다가 지극한 효심에 감복한 용왕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다는 내용
[우리문화신문= 금나래 기자] 미래엔교과서박물관은 교과서 변천사를 통해 우리 교육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국내 유일의 ‘교과서박물관’이다. 서당에서 사용하던 서적부터 개화기, 일제강점기, 미 군정기, 1~7차 교육과정기까지의 교과서를 두루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을 찾는 누구나 학창 시절 손때 묻은 ‘우리 세대 교과서’를 발견하고는 반가움을 표한다. 박물관 내부는 교과서전시관을 비롯한 4개의 관으로 구성됐다. 교과서전시관은 한글관, 교과서의 어제와 내일, 교과서 제작과정 등 다양한 주제의 자료를 상설 전시한다. 월인천강지곡(국보)>영인본, <동몽선습>, <소학언해>부터 세계 각국의 교과서와 북한 교과서까지 교과서와 관련된 것이라면 모두 다 있다는 표현이 꼭 맞다. 인쇄 기계 전시실에선 근대 인쇄 기계의 발달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시간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추억의 교실이다. 1960년대의 교실 풍경을 재현했는데, 요즘 말로 “라떼는 그랬지”라는 이야기가 관람객 사이에 자주 등장한다. 오는 9월 30일까지 2층 기획전시실에서 ‘학교종이 땡땡땡’, ‘삽화여행, 교과서를 그리다’ 등 세 가지 주제의 전시가 열리니 함께 추억 여행을 떠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답사 날짜: 2024년 6월 24일(월) 답사 참가자: 김수용 김혜정 송향섭 윤석윤 윤희태 이상훈 전선숙 황병무 (8명) 답사기 쓴 날자: 2024년 6월 29일 효석문학100리길의 제5구간은 평창 용항리 경로당 ~ 평창바위공원 ~ 평창 전통장(평창초교)까지 걷는 길로서 소책자에서는 ‘마을길 따라 노산가는 길’이라고 이름붙이고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강, 들, 숲과 역사 그리고 옛 정취가 남아있는 평창 전통장 등 다양한 테마를 가진 그림처럼 아름다운 평창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구간이다. 5-1구간은 용항리 경로당에서 평창바위공원까지의 거리 7.5km 구간이다. 5-1구간은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숲길을 따라 작은 고개를 넘고 마을길을 걸으며 시골의 정취를 느끼고 평창강과 기암절벽, 임진왜란 때 격전지였던 노산성을 둘러보고 평창강변에 위치한 평창바위공원에 이르는 길이다. 용항리 경로당에서 아침 9시 30분에 8명이 출발하였다. 이날 날씨는 여름이지만 구름이 끼고 흐려서 덥지 않았다. 기온은 25도 정도로서 답사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용항리 안쪽 마을을 한 바퀴 도는 길은 원래는 4구간에 포함되어 있으나 지난번에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오리나무는 십 리가 떨어져 있어도 오리나무고 고향나무는 타향에 심겨 있어도 고향나무고 할미꽃은 아주 어려도 할미꽃이라고 불립니다. 옛날엔 할미꽃이 참 많았습니다. 밭둑이나 산소 주변에 쉽게 볼 수 있었던 꽃인데 요즘은 기후 변화 탓인지 흔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할미꽃은 나름대로 열심히 성장하고 꽃을 피우고 자라고 번성하는 꽃인데 자신이 할미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을 알면 아마도 서운할 것입니다. 어쩌면 꽃이 시골 할머니의 꼬부라진 허리처럼 휘어져 있기에 붙은 이름이겠지요. 부끄러움의 결과인지 겸손의 미덕을 발휘하기 위함인지는 알 수 없으나 태어나서 내내 고개를 숙이고 살다가 홀씨를 날릴 때가 돼서야 잠시 허리를 펴는 할미꽃은 우리 인생을 닮았습니다. 할미꽃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마도 동강할미꽃이 아닐까 합니다. 동강할미꽃은 생김새는 할미꽃을 닮았지만 보통 할미꽃과는 달리 하늘을 향해 화사한 꽃잎은 벌리고 있거든요. 한약방에서는 할미꽃을 백두옹(白頭翁)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아마도 할미꽃의 홀씨가 흰 머리카락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것입니다. 할미꽃의 뿌리는 매우 강한 독성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한약재로 사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올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열대야는 저녁 6시 1분부터 이튿날 아침 9시까지 기온이 25도 이상을 유지하는 현상을 말한다.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 8월 25일 아침 6시 12분에 서울의 기온이 24.9도까지 내려가 8월 24일 밤은 열대야가 아니었다고 한다. 이로써 34일간 계속된 서울의 최장 열대야는 끝났지만, 올해 여름에 서울에서 열대야가 발생한 날 수는 모두 37일로 이 역시 기상 관측 이래 제1위에 해당한다고 한다. ‘님이 그리워’ 잠 못 이루는 밤이 아니고 ‘날씨가 더워서’ 잠 못 이루는 밤은 해마다 반복되며 해마다 길어질 것으로 염려된다. 이처럼 열대야가 길어지는 것은 지구가 더워지는 지구온난화 현상 때문이다. 환경학자들은 산업 혁명 이후 지구의 평균온도가 빠른 속도로 높아지는 것이 관측되자 지구온난화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었다. 인류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일어난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가능해졌다. 모든 나라에서 경제가 발전하면서 화석연료의 소비가 늘어나고 연쇄적으로 이산화탄소의 발생이 증가하였다. 이산화탄소는 이른바 온실가스로서 태양열을 붙잡아두기 때문에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높아지면 지구의 온도가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국가유산청(청장 최응천)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 항일의병운동을 이끈 의병장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의 옷인 단령(團領)과 머리에 썼던 사모(紗帽), 허리띠인 삽금대(鈒金帶), 목화(木靴), 호패(號牌) 등 총 5건의 유물을 국가민속문화유산 「면암 최익현 관복 일괄」로 지정하였다. * 단령: 관직에 있는 사람이 공복(公服)으로 입었던 옷으로, 둥근 깃이 하나의 특징임. * 사모: 관복 착용 시 머리에 썼던 관모로, 2개의 뿔[角]이 좌우에 달린 것이 특징임. * 삽금대: 관복 착용 시 허리에 두르던 띠의 한 종류로, 무늬를 새긴 판(띠돈)을 띠의 둘레에 붙여 장식함. * 목화: 관복을 착용할 때 신던 목이 긴 형태의 신. * 호패: 조선시대 16세 이상 남자에게 발급한 패로서 오늘날의 주민등록증과 같음. 이번에 지정된 5건의 관복 일괄은 19세기 후반기 복식 연구뿐 아니라 공예 기술과 재료 연구를 위한 실증적 자료로서 값어치가 높다. ▲ 단령은 최익현이 당하관(堂下官)이던 시기(1855~1870)에 착용한 것으로, 조선 후기 전형적인 당하관용 단령(團領)의 형태와 제작 양식을 지니고 있다. ▲ 사모는 양쪽 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