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들은 뒷간을 맡는 귀신인 변소각시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지방에 따라 측신(厠神), 칙간조신, 부출각시, 칙시부인, 칙도부인이라고 하며, 젊은 여자귀신이라고 생각했지요. 이수광의《지봉유설》에는 매달 음력 6일, 16일, 26일에 측신이 뒷간을 지키는 날이므로 뒷간 출입을 삼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지키려면 음식도 적게 먹어야 되었겠지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송자대전(宋子大全)》에 보면 자고신(紫姑神)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고라는 여인은 남의 첩이 되었는데 그 정실부인의 시기를 받아 늘 측간 청소하는 일을 하다가 그만 죽게 되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를 측신이라 부르며 그 신이 영험하다 하여 그가 죽은 1월 15일 날 측간에 제사하고 모든 일을 점쳤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 측신각시는 머리카락이 길어서 그것을 자기 발에 걸어놓고 세는 것이 일인데 그러다가 사람이 뒷간에 올 때 자기를 놀라게 하면 그 머리카락을 뒤집어씌우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병이 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밤에 뒷간에 갈 때는 헛기침을 한다고 하지요. 강원도에서는 뒷간을 지으면 길일 밤을 택해서 뒷간에 불을 켜고, 그 앞에 음식을 차린 다음, 측신부적을 써
나물은 푸성귀(채소)나 산나물 ·들나물 ·뿌리 등을 데친 다음 갖은양념에 무쳐서 만든 반찬을 말하지요. 그 종류를 들어보면 애호박나물·오이나물·도라지나물·숙주나물·시금치·쑥갓·미나리·고춧잎·깻잎·무나물·콩나물·고사리·고비·취나물·시래기나물·가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건강식으로 인기를 끄는 이 나물이 조선시대에는 가난한 백성이 끼니를 때우는 구황식품이었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가운데 가장 태평성대였다는 세종 때인 1444년 4월 23일 자 세종실록을 보면 병조 판서 정연(鄭淵)이 임금께 보고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곧 청안(淸安, 현재 충북 괴산 부근) 지방에 갔을 때 남녀 30여 명이 모두 나물을 캐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나물만 먹은 얼굴빛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나물을 캐는 백성이 들판을 덮고 있었다며 백성들의 배고픔을 걱정하는 내용이지요. “다북쑥을 캐네 / 다북쑥을 캐네 / 다북쑥이 아니라 새발쑥이네 / 양떼처럼 떼를 지어 저 산등성이를 넘어가네 / 푸른 치마 붉은 머리 허리 굽혀 쑥을 캐네 / 다북쑥을 캐어 무얼 하나 눈물만 쏟아지네” 다산 정약용이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쑥을 캐어 죽을 쑤어 먹는 백성들을 보고 쓴 다북쑥이란
짚신은 볏짚으로 삼은 신발이며, 초혜(草鞋)라고도 합니다. 또 짚신과 같은 모양이지만 삼[麻]이나 노끈으로 만든 것을 ‘미투리’라 하며 이는 짚신보다 훨씬 정교하지요. 짚신의 역사는 약 2천여 년 전 마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중국 송나라 마단림(馬端臨)은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 “마한은 초리(草履)를 신는다.”라고 했는데 이 초리가 바로 짚신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그의 책 ≪성호사설≫에서 “왕골신과 짚신은 가난한 사람이 늘 신는 것인데 옛사람은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선비들은 삼으로 삼은 미투리조차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니, 하물며 짚신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라고 개탄합니다. 이익의 개탄처럼 조선 후기로 오면서 짚신 신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풍조가 생겼지만 그 이전엔 정승을 했던 선비들도 짚신을 예사로 신었습니다. 짚신은 원래 처음 삼을 때는 왼쪽 오른쪽 구분하지 않고 똑 같이 만듭니다. 다만 오래 신으면서 오른쪽 왼쪽으로 나눠지는 것이지요. 또한 조선 초기엔 양반과 평민 사이에서 옷은 분명이 구분이 되었지만 짚신은 양쪽이 같이 신는 평등의 신이었습니다.
요즘 서울시내 길을 돌아다니다 보면 마치 미국 뉴욕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킵니다. 온통 가게 간판과 홍보판이 영어 일색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반가운 마음이 든 한글 홍보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서울도시철도공사의 지하철 5678호선 역에서 만난 이야기 광 고“5678호선에는 뭔가 특별한 역 이름이 있다.”입니다. 홍보판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과 글, 바로 우리말과 우리글입니다. 국어만큼 풍부한 어휘로 맛깔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또 있을까요? 특히 한글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라는 창제원리를 바탕으로 우리말이 가진 뜻을 충분히 나타내주는 과학적인 문자지요.”라고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애오개·굽은다리·돌곶이·버티고개·새절·독바위·연신내·마들·먹골·장승배기같은 토박이말 역 이름들을 소개합니다. 2008년 말부터 시작된 서울도시철도공사의 ‘스토리홍보’는 역사, 전동차, 화장실 등에 이야기 형식의 홍보물을 붙여 고객과 소통하려는 노력으로, 이번 특별한 역 이름 이야기도 ‘스토리홍보’ 중 하나라고 하지요. 이렇게 한글을 가꾸고 빛내는 일은 5678서울도시철도의 의무이기에 한글 역 이름을 알리고 이에 대한 시민 고객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이번 스토리홍보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는 흔히 UCLA로 알려진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캠퍼스(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가 있습니다. 이 대학은 미국 50개 주와 100개의 다른 나라 출신들이 모여 있는 연구 중심 대학으로 미국대학 순위에서 상위에 올라 있지요. 이 학교에 한국음악과가 있는데, 이 대학 민족음악대학 안에서 매 학기당 250여 명이 수강하는 가장 인기 있는 과로 꼽힌다고 합니다. 그런데 1970년대 초 시작한 이 한국음악과는 지난 2004년 UCLA 대학 당국으로부터 주정부 예산이 삭감되었다는 이유로 없앨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에 한국음악과 김동석 교수와 한국전통음악학회(회장 단국대 서한범 교수)는 폐과를 막고자 온 힘을 기울여 왔지요. 이 대학의 한국음악과 보존을 위해 학술강연과 심포지엄, 한국음악 공연을 지난 2001년부터 지속해왔는데 올 2월 11일로 벌써 10번째를 맞았습니다. 이 행사에 드는 경비는 한국전통음악학회 회원들의 호주머니를 털고 약간의 정부 지원금과 기업 후원금으로 어렵사리 이어오고 있습니다. 제아무리 휼륭한 문화를 가지고 있더라도 널리 알리지 않으면 그 진가를 알기 어렵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아내는 중국 땅에서 폐렴으로 고생하다가 삶을 마쳤습니다. 남편 백범은 그런 아내의 마지막 가는 길조차 지켜주지도 못했습니다. 당시 임시정부 내무총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백범은 아내가 입원한 병원이 일본 조계지(점령지) 안에 있었기 때문에 임종조차 할 수가 없었지요. 장례식은 1924년 1월 4일 프랑스 조계 숭산로 경찰서 뒤쪽의 공동묘지에서 열렸습니다. 백범의 동지들은 최준례가 겪은 고난이야말로 나랏일에 공헌한 것이라며 의연금을 모아 장례를 치르고 묘비까지 세워주었지요. 이때 세운 묘비는 한글학자 김두봉이 오로지 한글로만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단기 4222년 3월19일) 대한민국 ㅂ해 ㄱ달 죽음(대한민국 6년1월) 최준례 묻엄(무덤) 남편 김구 세움“이라고 썼습니다. 'ㄱ, ㄴ, ㄷ.......ㅈ, ㅊ'은 차례대로 '1, 2, 3,....9, 10'을 의미하기에 출생일은 단기 4222년(서기 1889년) 3월 19일이며, 사망일은 ‘대한민국 6년(원년은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곧 1924년 1월 1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비는 광복 직후 고국에 돌아온 김구 선생이 상하이에서 아내의 주검을 옮겨 올 때 함께 가져
세종임금 때 청백리 영의정으로 유명한 황희정승과 관련된 얘기는 참 많습니다. 거기엔 속담도 있는데 “황희 정승네 치마 하나 가지고 세 어이딸이 입듯”이 그것이지요. 황희가 얼마나 청빈했던지 황희의 아내와 두 딸이 치마가 없어 치마 하나를 번갈아 입고 손님 앞에 인사했다는 데서 유래한 말인데 여기서 “어이딸”은 어미와 딸이란 말로 한자말 “모녀(母女)”와 같은 뜻의 말입니다. 바로 이 “어이딸”은 한자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모녀에게 안방을 내줬습니다. 지난 주 MBC뉴스에서 “AI, 한파 여파 어디까지‥계란 파동 우려”라는 제목의 뉴스가 나왔습니다. 여기서 “계란”은 “鷄卵”이라고 쓰는 한자말임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런데 "닭이 낳은 알"은 '달걀'입니다. '닭의 알→달긔알→달걀'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말이지요. 물론 계란이라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되도록 쉽고 아름다운 토박이말을 쓰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한문에 익숙했던 양반들이야 한자말이 더 편했을지 모르지만, 일반 백성은 토박이말 위주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서서히 토박이말이 한자말에게 안방을 내준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바로 이 “달걀”도 “계란”에게 주인 자리를 내준
“언제부터 걸려 있었나 잿간 흙벽에 외로이 매달린 작은 꼴망태기 하나 / 그 옛날 낫질 솜씨 뽐내셨을 할아버지의 거친 숨결이 아버지의 굵은 땀방울이 / 찐득찐득 배어들어 누렇게누렇게 삭아버린 꼴망태기 하나 /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나무지겟짐 세워 놓고 떡갈잎 물주걱 만들어 / 시원하게 목축이다 흘리신 바윗골 약수랑 싱그러운 들꽃 향기랑 / 소릇이 배어들어 바작바작 삭어버린 꼴망태기 하나” 위 노래는 최병엽 작사, 한동찬 작곡의 동요 꼴망태기의 일부입니다. “망태기”는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써왔던 것인데 새끼 등으로 꼬아 만든 주머니로 씨앗 따위를 담아 매달아 두기도 했으며 망탁·망태라고도 하고, 지역에 따라 구럭·깔망태·망탱이라고도 하지요. 어깨에 멜 수 있도록 양끝에 길게 고리를 달기도 했습니다. 망태기는 쓰임새와 모양에 따라 이름도 달라집니다. 말과 소에 먹이는 풀을 담는 꼴망태가 있고, 장기짝을 넣어 두는 조그마한 망태기 장기망태기도 있습니다. 망태기와는 모양이나 쓰임새가 다른 “삼태기”도 있는데 쓰레기·거름·흙·곡식 등을 담아 나르는 그릇이지요. 그밖에 또한 망태기와 관련된 재미난 말도 있는데 갓난아기들을 망태기에 넣어서 데려간다는 “망태할아버지”도 있
나무로 된 가구를 오랫동안 쓰려면 각 모서리와 여닫이문 손잡이에 쇠붙이로 덧대야 했습니다. 그래서 경첩, 들쇠(서랍이나 문짝에 다는 반달 모양의 손잡이), 고리, 귀장식(가구의 모서리에 대는 쇠붙이 장식), 자물쇠 같은 것들을 만들어 붙였지요. 이런 것들을 통틀어 장식(裝飾)이라고 부르는데 보기 흉한 못자국을 가려주고 옷장의 품위를 지켜주지요. 이 가운데 경첩은 여닫이문을 달 때 한쪽은 문틀에, 다른 한쪽은 문짝에 고정하여 문짝이나 창문을 다는 데 쓰는 철물을 이릅니다. 잘 깨지지 않도록 대개 구리에 주석과 아연을 섞어 만들었는데 쓰임새와 가구 종류에 따라 모양이 매우 다채롭습니다. 경첩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드러날 때는 섬세한 무늬가 바라다보기만 해도 신기하고 아름답습니다. 경첩 이름은 모양새에 따라 동그레, 이중병풍, 제비추리, 구름, 난초, 나비, 호리병, 박쥐 따위로 불렀습니다. 지금은 고가구를 보기 어렵지만 아름다운 경첩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자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기후는 매우 온화하여 더위와 추위가 없으므로 각인의 기질에 합당함. 월급은 미국 금전으로 매일 십오 원(대한 돈으로 오십칠 원 가량)씩이고 일하는 시간은 매일 십시간 동안이며 일요일에는 휴식함.” 이는 1903년 온 나라에 나붙은 하와이 이민 모집공고입니다. 하와이 설탕 재배업자들은 대한제국과 이민협정을 맺었지요. 이에 따라 그해 12월 제물포항에서 일본우편선을 타고 맨 처음 하와이로 이민 간 사람은 102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간 하와이는 꿈의 땅은 아니었습니다. 뙤약볕 속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며 백인 감독이 휘두르는 채찍 아래 고통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고통 속에서도 이민 3년 만에 한인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에게 한글과 예의범절을 가르쳤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월급의 절반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낼 정도로 누구보다도 독립에 대한 열정이 컸습니다. 특히 ‘사진 신부’로 이민 온 여성들은 1913년 대한부인회를 세우고 삯바느질과 양복수선을 하며 모은 돈으로 활동비와 독립 자금을 마련했기도 했습니다. 1919년 3월15일 창립된 대한부인구제회도 ‘독립운동하다 다친 사람과 죽은 사람(가족)에게 구제비를 송금한다’, ‘조국 독립을 위해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