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마자잎 무말랭이 호박오가리 / 갓 짠 들기름 향 머금은 나물 / 거친 기침 몰아쉬는 할배 저녁 밥상에 오르면 / 싸리울 마당 안 / 삽사리 살며시 코를 내밀고 / 작은 오두막은 금새 고소함이라 / 초승달 밤하늘 뭇별들 /이슬처럼 마당에 내려 앉는 밤/ 나주소반 위 나물 한 접시 /할배 기침 걷어주는 막걸리 한잔” - 이영옥 “나물 ” - 해소 기침 해대는 할아버지가 들기름 고소한 나물 한 접시 앞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정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고기 안주가 아니라도 한 겨울 어머니 손끝에서 무쳐 나오는 갖은 나물은 밥반찬으로도 그만이고 할아버지 막걸리 안주로도 으뜸이지요. 지금처럼 사계절 채소가 넘쳐나지 않던 시절 나물은 한겨울 밥상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김장을 마치고나면 무청을 짚으로 엮어 담장 옆에 나란히 걸고 단물 오른 무는 얇게 썰어 채반에 펼쳐 말리지요. 그 밖에도 호박, 가지, 피마자잎사귀, 고구마순, 취나물, 고사리 따위의 나물들을 깨끗이 손질하여 햇볕에 말려두면 겨울 한철 훌륭한 밥상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갖은 나물에 오곡밥을 먹는 보름입니다. 가을 내내 갈무리 해두었던 나물을 꺼내어 고소한 들기름에 갖은 양념을 넣
“바람 따라 살랑살랑 흔들리는 바람방울 / 하늬바람 솔바람 산들바람 가리지 않고 / 딸랑딸랑 딸그르르르 몸 떨어 울어준다네 / 석수장이 맘씨 고운 아내 / 첫아이 낳다 저승길 갈 때 / 외롭지 말라고 바람 방울 달아 두었네 / 보현사 부처님도 빌어 주는 극락왕생 길 / 딸랑딸랑딸랑 나무아미타불” 위 시는 이고야 시인의 '보현사 석탑 바람방울'입니다. 북한에는 겨레의 영산인 백두산과 빼어난 절경의 금강산 그리고 아름다운 묘향산(妙香山)이 있지요. 그 가운데 묘향산은 높이 1,909m로 11세기 초부터 산세가 기묘하고 향기를 풍기는 산이라 하여 묘향산이라 불렀으며 예부터 조선8경의 하나로 알려져 왔습니다. 묘향산의 보현사 대웅전 앞에는 고려시대 석탑을 대표하는 8각 13층 석탑이 있는데 이 석탑은 고구려식 탑으로 석탑 각 층 지붕 모서리에는 모두 104개의 바람방울이 달렸습니다. 여성들이 귀걸이 하듯 모서리마다 달린 방울은 보기에도 아름다운데 바람이 산들산들 불면 제 각각의 소리를 내 묘향산을 울려주는 운치가 그만이지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서산대사가 입적한 이곳의 바람방울을 울려줄 통일의 바람은 언제 불는지요?
한자말에 “어부지리(漁夫之利)”가 있습니다. 이 말은 양 쪽이 다투는 틈을 타서 제삼자가 애쓰지 않고 이익을 가로 챌 때 쓰는 말입니다. 이 “어부지리”는 우리말로 바꿔 말할 수 있지요. 바로 “시앗 싸움에 요강장수”가 그것입니다. 시앗은 “남편의 첩”을 본처의 처지에서 하는 말입니다. 또 그렇게 된 상황을 “시앗보다”라고 하지요. 이때 본처와 시앗 사이에 싸움이 생겨 요강이 깨질 수도 있는데 이때에는 요강장수만 덕 본다는 뜻입니다. “돈 한 푼도 못 벌어오는 주제에 심심하면 제 아내에게 손찌검을 해대는 위인이 급기야는 시앗까지 보았다.”라고 쓸 수 있습니다. 시앗이 들어간 우리말 속담을 보면 “시앗을 보면 길가의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부처같이 어진 부인도 시앗을 보면 마음이 변하여 시기하고 증오한다.”는 말입니다. 또 ‘시앗이 시앗 꼴을 못 본다.”는 “시앗이 제 시앗을 더 못 본다.”는 말이지요. 그밖에 “시앗 죽은 눈물만큼”은 몹시 적은 것을 이릅니다. 이제 첩이란 말도 잘 쓸 일이 없지만 그런 한자말도 “시앗”이란 말로 바꿔 쓰는 게 좋지 않을까요?
'빗장수비'라고 들어보셨나요? 이탈리아 축구 대표 팀 ‘아주리 군단’은 ‘빗장 수비’로 유명하지요. 아무리 뚫으려 해도 빗장을 지른 것처럼 뚫리지 않는 수비덕분에 붙은 별명입니다. 한옥 문에는 이 빗장이 또다른 자물쇠 구실을 합니다. 한옥을 짓는 마지막 매듭이 빗장이라고 할 정도로 한국 전통건축은 빗장에 공을 들였습니다. 빗장은 문을 굳게 닫기 위하여 판문(板門) 안쪽에 가로지른 두터운 나무를 말하며 구멍을 파 빗장을 질러 넣어 걸리도록 덧대어 놓은 나무를 둔테(빗장걸이)라고 하지요. 빗장은 주로 거북무늬가 많이 쓰이는데 그 까닭은 거북이 십장생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거북머리인 귀 두(龜頭)는 남성의 생식기를 닮아 생명과 다산(多産), 번창의 기원을 담고 있으며 특히 암수 거북 중 수컷 머리가 좀 더 크고 울퉁불퉁 하지요. 요즘 흔히 쓰는 도어록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해학과 예술성이 빗장 하나에도 곁들여 있음을 새삼 다시보게 됩니다.
“시오리 장터 / 장리쌀 한 말 이고 / 등 업힌 어린 손자 / 삽사리도 따라 나선 길 / 싸전 옆 똬리 풀고 / 국밥 먹는 할매 / 지난겨울 깨진 고추장독 / 새로 실한 옹기 골라 / 똬리 받혀 이고 돌아가는 길 / 어린 손자 코 흘리다 등잠 들고 / 초저녁 샛별 아래 / 삽사리 저만치 혼자서 가네 " 이 시는 김옥영 님의 똬리입니다. 똬리는 물동이나 짐을 일 때 머리 위에 얹어서 짐을 괴는 고리 모양의 물건으로 지방에 따라 또아리·또가리·또야리·또바리 등으로도 불립니다. 똬리는 짚이나 왕골, 골풀, 헝겊, 죽순껍질 따위로 만들지요. 똬리에는 끈이 달려 있는데 짐을 들어 올릴 때 입으로 끈을 물면 똬리가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지요. 똬리는 머리에 짐을 일 때 짐이 무거워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줄여주며 물항아리 등의 균형을 잡아줍니다. 이러한 똬리가 없었다면 여성들이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인다는 생각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광주시 광산구 신창동 유적(사적 375호)에서 싸리비와 함께 똬리가 발굴돼 우리 겨레는 2천 년 전에도 똬리를 썼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예전 남성들이 지게로 짐을 날랐다면 여성은 이 똬리로 무거운 짐을 날랐습니다. 프랑스 민속학자 샤를르 바
“기교를 다 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 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 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 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 위 글은 추사 김정희가 제자인 남병길에게 써준 유재(留齋) 라는 현판 글을 푼 것입니다. 이 유재 현판은 예서체로 글씨와 내용풀이가 아름다워 모각본(模刻本, 조각 작품을 그대로 본떠 새김 작품)이 여럿 있다고 하지요. 남병길은 훗날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그는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선생의 유고를 모아 《완당척독(阮堂尺牘)》과 《담연재시고》를 펴내 오늘날 완당선생전집이 나올 수 있는 바탕을 만들었습니다. 제주도 유배 당시 만든 이 현판은 육지로 가져가는 도중 바다에 떨어져 떠내려갔는데 뒤에 소치 허련이 일본에 가서 찾아왔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욕심에 눈이 어두워 온갖 무리한 일을 저지릅니다. 하지만, 추사는 조용히 타이릅니다. 남김을 두는 것이 세상을 올바로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추사가 전하는 남김의 철학 곰곰이 새겨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렸을 때 솥 위에 시루를 얹어놓고 떡을 찌던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시루는 떡이나 쌀 등을 찔 때 쓰는 한국 고유의 찜기인데 떡시루 말고도 집에서 콩나물을 길러 먹던 콩나물시루도 있지요.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시루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나진 초도 조개무지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상고시대의 시루 모양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데 바닥 구멍은 꽃잎 모양으로 뚫려 있고 쇠뿔 모양의 손잡이가 달렸습니다. 1935년 3월<개벽 신간 제4호>에는 김유정의 ‘소설 금따는 콩밧’이란 제목의 소설이 실려있는데 떡을 하는 부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부는 떡을 하러 나왓다. 남편은 절구에 쿵쿵 빠앗다. 그러나 체가 없다. 동내로 돌아다니며 빌려 오느라고 안해는 다리에 불풍이 낫다. 떡을 찌다가 얼이 빠저서 멍허니 앉엇는 남편이 밉쌀스럽다. (중략) 닭이 두홰를 치고 나서야 떡은 되엇다. 안해는 시루를 이고 남편은 겨드랑에 자리때기를 꼇다. 그리고 캄캄한 산길을 올라간다.” 그들이 시루떡을 해서 올라가는 곳은 산 중턱의 콩밭으로 그들은 콩밭에 시루를 놓고 산신께 빕니다. 산신 제사 때도 시루떡이 쓰이고, 외동딸 혼례식 때 함 들어오는 날에도 시루떡이 쓰입니
"종일토록 봄을 찾아 헤매었지만 봄은 없었다네 짚신이 닳도록 산 위의 구름만 밟고 다녔지 지쳐서 돌아와 뜰 안의 매화향기 맡으니 봄은 여기 매화 가지 위에 이미 무르익었거늘“ (어느 비구니의 오도송) 종일토록 봄을 찾아 헤매었지만 뜰 안의 매화 가지 위에 봄은 이미 와 있었다는 시입니다. 매화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무척이나 좋아했던 꽃입니다. 특히 매화에 대한 시 91수를 모아 ‘매화시첩’으로 묶을 정도로 매화 사랑이 각별했던 퇴계 이황이 두향이란 기생과 매화로 맺어진 사랑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기생 두향은 퇴계에게 희면서도 푸른빛이 도는 진귀한 매화를 선물했고 그 매화에 감복한 퇴계는 결국 그녀에게 마음을 주었습니다. 퇴계는 그녀의 매화를 도산서원에 심었고, 69살에 삶을 마감하면서도 “저 매화나무에 물을 주어라”라고 했다지요. 조선 중기 문신 신흠(申欽)은 ≪야언(野言)≫의 "매불매향(梅不賣香, 매화는 향기를 팔지 않는다)”이란 시에서 ‘오동나무는 천 년을 살아도 그 가락을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을 추위 속에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느니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은 남아 있고, 버들은 백 번을 꺾여도 또다시 새 가지가 나온다네'라며 노래했습니다. 눈을
수요일 일본이야기를 써주시는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님이 지난 11월에 펴내신 ≪사쿠라 훈민정음, 인물과사상사≫ 2쇄가 나왔습니다. ≪사쿠라 훈민정음≫은 우리말 속에 숨겨진 일본말 찌꺼기를 말밑(어원)을 살펴 명쾌하게 풀어낸 책입니다. 이윤옥 소장님은 지난 30여 년간 일본어를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일상에서 우리들이 무분별하게 일본말 찌꺼기를 쓰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끝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집필 동기를 밝힙니다. 책에는 간질·발작을 뜻하는 “땡깡부리다”를 자식들에게 무심코 쓰는 것을 지적합니다. 또 일제강점기 조선을 식민지로 통치하려고 썼던 “서정쇄신”을 지금 정치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것을 개탄하기도 하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책을 받은 사람이 책을 준 사람 이름 끝에다 “은혜롭게 주시기에 잘 보존하겠다.”는 뜻으로 쓴 혜존이라는 말을 일본식을 따라 ‘내 책을 잘 받아 간직하여 주십시오.’라는 뜻으로 둔갑한 것을 꼬집습니다. 재일동포 2세이면서 고집스럽게 우리 토박이말로 시조를 쓰시는 재일본한국문인협회 김리박 회장님은 ≪사쿠라 훈민정음≫에 대해 "한꽃(이윤옥) 교수님께서 우리 말과 글을 참으로 잘 아시고 또 닛본(일본) 나라 말과 글, 얼
올해는 신묘년(辛卯年) 토끼해입니다. 그런데 새해 첫 토끼날 곧 묘(卯)가 들어간 날은 상묘일(上卯日)이라고 하고 첫토끼날, 톱날, 톳날, 갯날(제주도)이라고도 부릅니다. 바로 그저께 토요일(5일)이 이날인데 이날은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풍습이 많았지요. ≪동국세시기≫에 “이날 새로 뽑은 실을 토사(兎絲, 톳실)라 한다. 이 실을 차고 다니며 재앙을 물리친다. 남의 식구를 집에 들이지 않고, 나무로 만든 그릇도 들이지 않는다. 특히 여자가 남의 집에 먼저 들어오는 것을 꺼린다.”고 하였습니다. 토끼는 방정스러운 동물이기 때문에 이날 여자들이 남의 집을 방문하면 재수가 없어 그 집에 우환이 잦거나 또는 초상이 난다고 꺼렸지요. 그래서 부득이 남의 집에 갈 사정이 생기더라도 오후에 가거나 또는 남자가 먼저 대문을 들어선 후 여자가 따라 들어갔습니다. 첫 토끼날에는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일찍 일어나 대문을 열어야 그해 집안 운이 좋다고 하지요. 가장(家長)이나 웃어른이 열면 제일 좋으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도 남자가 먼저 열어야 합니다. 만일 여자가 먼저 대문을 열면 한 해 내내 불길하다고 믿었습니다. 경상도에서는 대문뿐만 아니라 부엌의 솥뚜껑도 남자가 먼저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