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세종큰임금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세종임금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요.또 위대한 성군이 태어난 곳 치고는 너무 초라한 표지석만 있을 뿐입니다. 이에 서울시는 세종대로 일대 47만㎡에 ‘한글 마루지(랜드마크)’로 만들어 ‘한글 문화관광 중심지’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먼저 서울시는 세종문화회관 옆에 위치한 세종로공원에 8, 868㎡규모 ‘한글 11, 172 마당’을 올 상반기 중 만듭니다. ‘한글 11, 172 마당’이란 한글자모 24자로 만들 수 있는 모두 11, 172 글자를 나타내는 것으로 가로, 세로 10cm×10cm 돌포장석에 11, 172명의 국민이 한자씩 써서 공원 바닥에 설치할 계획입니다. 또 서울시는 ‘한글학회~주시경집터~사직로’를 잇는 총 길이 900m엔 주시경 시범길을 올해 만듭니다. 국어학자인 주시경 선생은 일제강점기 탄압에도 끊임없이 한글에 대한 연구와 보급을 하고 후진을 양성해 오늘날 우리가 한글을 사용할 수 있도록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이 시범길에는 픽토그램(상징화된 그림문자)을 활용한 길 표지판, 안내표지판과 한글 긴의자, 한글 관련 야외 전시와 각종 퍼
미국 북서부 태평양 연안 오리건주(Oregon) 유진(Eugene)에 자리 잡은 오리건대학교 박물관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십장생병풍이 있습니다. 이 병풍은 1924년 거트루드 베스 워너 부인이 조선에서 사들인 것으로 1880년 비단에 색을 칠해 그린 것인데, 크기는 201.9×52.1cm이지요. 모두 10폭으로 8폭은 십장생 그림이며, 나머지 두 폭에는 그림 제작에 관련된 관직과 이름을 기록한 좌목(座目)이 있습니다. 이 십장생병풍은 순종임금이 세자시절 걸렸던 병 천연두의 회복을 기뻐해 그린 것입니다. 천연두는 세상에서 사라진 1977년 이전의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전염병의 하나였습니다. 특히 명성황후는 4남 1녀를 낳았지만 세자 "척(순종의 세자 시절 이름)"만 남고 모두 죽었기에 척에게 온갖 정성을 쏟았지요. 그래서 척이 천연두를 회복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종은 척의 회복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상을 주었고, 사형수를 뺀 죄수들을 석방하기도 했습니다. 십장생(十長生)은 예로부터 오래 산다고 믿어왔던 열 가지를 한데 모아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상징물로 삼은 것이지요. 해 ·산 ·물 ·돌 ·소나무 ·달 또는 구름 ·불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얼굴이 풍만한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이 있습니다. 이 미륵상은 구리로 만들어 도금(鍍金)한 삼국시대 말기 불상으로 높이 93.5cm입니다. 그런데 일본 교토 광륭사에는 삼국시대 한국에서 건너간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일본 국보 제1호)이 있지요. 이 미륵상을 본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는 크게 감동한 나머지 “고대 그리스 신들의 조각과 로마 시대의 수많은 조각품은 아직 완전히 인간적인 냄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불상은 지상에서 모든 시간적인 것의 속박을 초월해서 이루어 낸 인간 존재의 가장 맑고 원만하고 영원한 모습의 표상이다."라며 극찬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러옵니다. 물론 그 관광객 속에는 한국인도 참 많지요. 문제는 한국의 학자, 언론들이 모두 ”한국 국보 제83와 일본 국보 제 1호와 꼭 닮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두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한국 미륵상은 얼굴이 풍만한 반면 일본 미륵상은 얼굴이 날렵합니다. 삼국시대 같은 한반도 작품이면서도 두 미륵상의 얼굴은 완연히 다른 모습이지요. 그것은 일본이 명치시대에 얼굴을 개조한 때문입니다
오늘은 24절기 마지막 대한입니다. 대한은 음력으로 섣달에 들어 있어 한 해를 매듭짓는 절기인데 대한 기간의 마지막 날은 절분(節分)이라 하여 계절적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절분날 밤을 해넘이라 하고, 콩을 방이나 마루에 뿌려 악귀를 쫓고 새해를 맞는 풍습이어서 절기상으로는 진짜 새해가 되는 것이지요. 이때 세끼 가운데 한 끼는 꼭 죽을 먹었습니다. 나무나 한두 짐씩 하는 것 말고는 크게 힘쓸 일이 없는 농한기이므로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는 정신도 그 속에 숨어있을 것입니다. 제주도에서는 이사나 집수리 따위를 비롯한 집안 손질은 언제나 신구(新舊)간에 하지요. 이때 신구간이란 말은 대한(大寒) 후 5일에서 입춘(立春) 전 3일 사이(1월 25일∼2월 1일)입니다. 이때에는 사람들 일상에 관여하는 신들이 모두 옥황상제한테 가있는 날이라 무엇을 해도 탈이 없다는 재미난 속설이 있습니다. 소한부터 대한까지는 한해에 가장 추운 때인데 예전엔 세수하고 잡은 방문 고리에 손가락이 "쩍쩍" 달라붙었습니다. 또 눈 덮여 황량한 겨울 들판엔 칼바람 추위 속에 먹거리도 부족하니 사람도 뭇 짐승도 배곯고 움츠리기는 마찬가지였지요. 그러나 이 만물이 얼어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시인의 생각이 한이 없어라 / 먼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받아 붉구나 /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는다 /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처량한 울음소리 저녁구름 속에 그치네.” 위는 경기도 파주 화석정에 걸린 율곡 이이의 8살 때 시로 알려진 <팔세부시(八歲賦詩)>입니다. 화석정은 임진강가 벼랑 위에 자리 잡은 경치가 빼어난 곳이지만 최근에 이 앞쪽으로 새로이 길이 생겨 예전의 절경은 구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곡 이이가 즐겨 찾던 발자취를 찾아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이 요즈음도 많습니다. 이러한 유서 깊은 곳이 선조임금과 관련이 있는데 선조임금이 율곡 이이처럼 자연경치를 벗하며 여생을 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물밀듯이 쳐들어오는 왜놈들을 피해 피신하다 다다른 곳이 바로 여기 화석정지요. 왜구의 침공에 대비해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이이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은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가던 중 칠흑같이 어두운 한밤중에 다다른 곳인데 앞에는 천길 벼랑 물길이요 뒤에는 벌떼 같은 왜놈 병사들입니다. 그때 한 신하의 기지로 화석정에 불을 질러 불빛을 환하게
신라 진흥왕(540∼576)이 새로이 넓힌 지역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닌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가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입니다. 이 진흥왕순수비는 현재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국보 33)·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국보 3)·마운령 진흥왕순수비(북한 국보 111)·황초령 진흥왕순수비(북한 국보 110) 등 모두 4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진흥왕순수비는 신라가 대외적으로 영역을 확대하던 진흥왕 때의 영토 개척사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요. 진흥왕 때는 신라가 종전의 미약했던 국가체제를 벗 어나 영토를 크게 넓히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때입니다. 진흥왕은 재위 37년 동안 낙동강 서쪽의 가야세력을 완전히 병합하였고, 한강 하류 유역으로 진출하여 서해안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동북으로는 함경남도 이원지방에까지 이르렀는데 이 순수비는 그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순수비는 진흥왕 때 신라 동복쪽 국경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비열홀주(比列忽州, 安邊)를 훨씬 넘어 함흥지역까지 이르렀음을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조선의 대학자 추사 김정희는 7월 무더위 속을 뚫고 북한산에 올라 그곳에 있던 진흥왕순수비의 탁본을 했습니다. 그 뒤 그는 침식을 잊은
애들은 날씨가 추워지면 톡톡한 ‘기모바지’ 하나 입혀 놓으면 겨울 걱정 안 해도 되지요. 바지는 고무줄 바지가 편하더라고요. 기모바지는 조금 싼 것도 있던데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거라서 가격에 조금 신경써야합니다. 우리 딸은 4살인데 9호 입힙니다. -다음- 날씨가 추워지니까 엄마들이 아이들 옷에 신경을 쓰게 된다. 예전에 어머니는 올망졸망한 자식들이 행여 추울세라 초가을만 들어서면 손수 스웨터 짜기에 바쁘셨던 기억이 새롭다. ‘기모바지’라는 말처럼 요즈음 부쩍 기모를 이용한 제품이 눈에 많이 띈다. 등산복에서부터 스타킹, 양말, 목도리 등 기모의 쓰임새가 날로 개발되고 있는 느낌이다. 표준국어사전에 보면 ‘기모 (起毛) :모직물이나 면직물의 표면을 긁어서 보풀이 일게 하는 일’이라고만 나와 있다. 어린 학생들이 이 설명을 읽는다면 ‘왜, 옷감의 표면을 보풀게 하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 것만 같다. 나 같은 어른도 그런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물론 일본말이라는 말은 없다. 다음 백과사전을 보면 국어사전보다 훨씬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다. ‘모직물(毛織物)ㆍ면직물(綿織物)에서 피륙의 날 또는 씨에 보풀을 일으키게 하는 일. 이것은 피륙을 부드럽게 만들어 그
조그마한 밥상을 ‘소반’이라고 하는데 겸상이 아닌 외상 또는 독상으로 혼자 받는 작은 것입니다. 소반은 만드는 곳의 지명에 따라 나주반, 통영반, 해주반, 충주반 따위가 있습니다. 또 쓰임에 따라 식반(食盤:음식을 차려 놓는 상), 주안상(酒案床:술상), 공고상(公故床:번을 들 때에 자기 집에서 차려 내오던 밥상인 ‘번상’을 높인 이름), 돌상, 교자상(사각형의 큰 상)이 있습니다. 1928년 별건곤 12호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횡(橫)으로 본 조선의 미’ 라는 글에 보면 “전주로 가서 망경대를 구경한 후 김제 만경의 대 평야를 건너 정읍 내장산에 오면 호남의 별풍경이라, 장성을 지나 나주소반에 점심 먹고 광주 무등산에 오르면….” 이란 구절 속에 ‘나주소반’에 차린 밥상 이야기가 나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아담한 나주소반 위에 농익은 술 한 잔을 곁들이면 조선 팔도 아름답지 않은 곳도 없을 것입니다. 조선의 상은 다리 모양이나 개수로도 나누는데 다리가 하나인 상은 '외다리 소반(독각반:獨脚盤)', 다리가 셋인 것은 '삼각반', 다리 모양이 개의 발 같은 것은 '개다리소반(구족반:狗足盤)', 범의 발 같은 것은 '호족반(虎足盤)', 대나무 마디같은 것
요즘 직업별 수입은 얼마나 될까요? 한 통계에 따르면 도선사의 연봉은 무려 9,147만 원으로 1억 원에 가깝습니다. 안과의사, 대학 총장, 변호사가 그 뒤를 잇습니다. 일반 의사는 저 뒤 65위에 있으며, 검사는 92위, 비행기 승무원은 96위인 3,380만 원으로 사람들의 생각보다는 적습니다. 그러면 1930년대는 어땠을까요? 1936년 1월 1일에 발행된 잡지 ≪삼천리≫ 제8권 제1호에는 “현대 쌀라리맨의 수입조”라는 항목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이는데 요즘 말로 표기를 고쳐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수: 전속가수나 되면 월급 60원 이외에 인세와 특별출연에서 수입되는 것을 합하면 100 원 정도는 됩니다만 옷을 해 입고 사교에 써야 하니 밑지고 다닙니다. / *뻐스껄: 1일 수입은 75전이고 노동시간은 10시간인데 어머니와 동생과 세 식구가 살아가기에는 부족합니다. / *여직공: 하루 수입 45전 노동시간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1개월 기숙사비 9원 주고 그 나머지는 옷을 해 입습니다. / *의사: 월급의사면 100원은 보통이고 개업하면 현금수입 300원 이상은 됩니다. / *인력거부: 잘해야 하로 50전 벌지요. 비나 오면 돈 1원(圓)씩이나
한옥 지붕에 얹는 기와에는 암키와와 수키와가 있으며 처마 끝에는 끝막음을 하는데 암키와 로 막은 것은 암막새, 수키와로 막은 것은 수막새라고 하지요. 막새에서 무늬가 있는 부분은 와당이라고 하구요. 우리나라는 예부터 기와가 발달해서 이 수막새도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수막새 중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된 “신라인의 미소”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반하지요. 마치 두터운 얼음장마저 녹일 듯한 따스한 미소를 띠면서도, 꼭 다문 입이 오뚝한 콧날과 함께 외유내강한 신라 여인의 모습을 잘 전해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제주도에 “탐라인의 미소”라 불리는 수막새도 있습니다. 여인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는 이 수막새는 1960년대 초기에 절터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이 수막새는 척박한 땅, 바람 많은 고장에서 시달리며 살아온 제주여인의 얼굴이 기와 와당으로 들어간 모습입니다. 풍요로운 얼굴에서 원만하고 너그러운 그리고 포근한 제주 여인의 심성을 엿볼 수 있게 하며, 빼어난 예술성을 드러내 줍니다. 어쩌면 요즘 아이들이 그려 놓은 햇님의 모습일 수도 있지요. 제주민속박물관에 전시된 이 “탐라인의 미소”는 제주도 돌하르방과 함께 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