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들강변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가 / 무정세월 한허리를 칭칭 동여매어나 볼까 / 에헤야 봄버들도 못 믿으리로다 /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이것은 1930년 신불출이 작사한 ‘노들강변’인데 문호월 작곡, 박부용 노래로 서민들의 사랑을 받아 우리 음악사에 불멸의 민요곡으로 자리 잡은 노래입니다. ‘노들강변’은 오케(OK)레코드사에서 음반으로도 제작됐는데 1930년대 작곡가 이면상과 음악 전문가들은 협의를 거쳐 ‘노들강변’을 ‘신민요’의 첫 작품으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신불출(申不出, 1905~?)은 만담가로 더욱 유명합니다. 일제강점기에 풍자와 해학으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얻었던 사람이지요. 신불출은 특유한 화술로 대중의 인기를 끌었지만, 일제에 노골적으로 저항하면서 툭하면 경찰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인기 높던 그의 음반은 자주 불온작품으로 걸려 판매금지를 당했습니다. 그의 만담작품 ‘말씀 아닌 말씀’에는 “사람이 왜 사느냐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지가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자(字)라는 것을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일본을 뜻하는 ‘왜(倭)’자와 중의법을 써서 ‘왜놈을 없애야 한다’는 뜻을
태풍이나 큰비 등은 물론 큰 화재가 났을 때 조정에서는 백성에게 휼전을 내리고 있습니다. 순조 6권(1804) 3월 4일에 보면 “한성부(漢城府)에서 ‘마포(麻浦) 옹리(甕里) 등의 민가(民家) 3백 26호가 불탔다.’라고 아뢰니, 특별히 따로 휼전(恤典)을 거행해 주라 명하고, 선전관(宣傳官)을 보내 적간(摘奸)하게 하였다.”라는 조치가 따릅니다. 부족한 식량을 주고 노역을 면해주며 세금을 감해주고 관리가 가서 위로해주는 일은 백성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행하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영조대왕실록 제30권 7년 12월 13일 기록에 “고양에서 북한산성의 적곡(積穀)을 먹은 이가 독촉에 몰려 자살하자 휼전을 베풀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고양에 사는 장(張)가 성을 가진 한 백성이 북한산성에 쌓아둔 정부의 곡식을 먹었는데, 현관(縣官)의 독촉에 몰려 결국은 스스로 목매달아 죽는 데 따른 것입니다. 이 일이 알려지자 임금이 이재민을 구제하기 위한 특전인 휼전(恤典)을 베풀라고 명합니다. 임금은 “죽은 뒤에 휼전을 베푸는 것은 애당초 죽음이 없도록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여러 도(道)에 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하여 적곡을 받아들임에 있어 너무 독촉을 하지
“구름 사이로 학이 날아올랐다. 한 마리가 아니라 열 마리, 스무 마리, 백 마리……. 구름을 뚫고 옥빛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갯짓을 한다. 불교의 나라 고려가 꿈꾸던 하늘은 이렇게도 청초한 옥색이었단 말인가. 이 색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영원의 색이고 무아의 색이란 말인가. 세속 번뇌와 망상이 모두 사라진 서방정토(西方淨土)란 이렇게도 평화로운 곳인가.” 위는 ≪간송 전형필, 이충열, 김영사≫에 나오는 글로 간송이 매병을 보고 중얼거렸다는 말입니다.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紋梅甁)”은 원래 전문도굴꾼 야마모토가 강화도 한 고분을 도굴하여 고려청자 흥정꾼 스즈끼에게 1천 원에 팔아넘긴 뒤 마에다 손에 왔을 때는 2만 원으로 뻥 튀겨져 있던 것을 간송 전형필 선생은 흥정 한 번 없이 한 푼도 깎지 않고 샀습니다. 당시 2만 원은 기와집 스무 채 값이었지요. “여자는 값이 싸면 필요 없는 물건도 사두지만, 남자는 꼭 필요한 물건은 바가지를 쓰더라도 산다.”라는 말을 생각게 해주는 장면입니다. 간송은 이 귀한 매병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걸 걱정했던 것입니다. 높이 42.1㎝, 입지름 6.2㎝, 배지름 24.5㎝, 밑지름 17㎝의 “청자상감운학문매
월남 이상재선생은 일본의 거물 정치인 오자키가 찾아왔을 때, 뒷산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편 뒤 '우리 응접실'에 앉을 것을 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오자키는 일본으로 돌아가 “조선에 가서 무서운 영감을 만났다. 그는 세속적인 인간이 아니라 몇 백 년 된 소나무와 한 몸인 것처럼 느껴졌다.”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저 서구열강을 보라. 학술의 발달이 저 같으며 도덕의 진보가 저 같으되 그 나라가 기운차게 일어나 날로 강성해가니 이는 그 문화가 동양 고대처럼 인민을 몰아서 전제하(專制下)에 굴복하게 하던 문화가 아니라 자유를 구가하며 모험을 숭상하는 문화인 까닭이니 한국의 뜻있는 군자여! 자국 고유의 장점을 보존하며, 외래 문명의 정화(精華)를 채취해서 신국민을 양성할만한 문화를 진흥할 지어다.” 위는 이상재 선생이 ‘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19일자에 쓴 ‘문화와 무력’이란 제목의 논설 일부입니다. 내용을 보면 국수주의나 사대주의가 아닌 우리 고유문화의 장점 위에 다른 문명의 우수한 것을 더하여 국민을 이끌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자고 주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닐까요?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스물세 번째 절기로 작은 추위라는 뜻의 소한(小寒)입니다. 원래 절기상으로 보면 소한보다는 대한(大寒)이 가장 추운 때지만 실제는 소한이 한해 가운데 가장 춥습니다. 그 까닭은 24절기를 만들 때 절기의 기준을 중국 화북지방에 맞췄기 때문에 조금 다른 것입니다. 실제 이번 소한인 오늘 아침 기온이 영하 10도 아래로 곤두박질친다는 기상예보입니다.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었다."든가 "소한 얼음 대한에 녹는다.", ‘소한 추위는 꿔다가도 한다.’,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라는 말처럼 소한 추위는 예부터 대단했습니다. 물론 매서운 추위가 오면 땔감이 변변치 않던 백성은 견디기 참 어려웠지요. 그래서 동사(凍死) 곧 얼어 죽는다는 말도 있었구요. 그러나 춥고 눈이 많이 와야만 그해 풍년이 들었다는 걸 생각하면 소한 추위라는 것은 꼭 있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또 추위를 겪어야만 따뜻한 봄날의 고마움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송백의 푸름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라고 추사는 자신의 그림 세한도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예전엔 삼한사온이 있어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습니다. 하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찰떡처럼 어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송강 정철과 율곡 이이가 그런 관계이지요. 이 두 선비는 1536년에 태어난 동갑내기지만 성격은 완전 대조적으로 송강이 직선적이며, 다혈질적인 반면 율곡은 차분하고 이성적이었기에 말입니다. 특히 송강은 ≪선조수정실록≫에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하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自招)하였다. 최영경(崔永慶)이 옥에 갇혀 있을 적에, 그가 영경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나라 사람이 다 같이 아는 바이다. 송강이 권력이 있었고 그 주변 사람들도 모두 송강과 알고 지냈는데 최영경이 죽게 되었으니 어찌 송강이 변명하리요”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한 번은 율곡이 성혼과 함께 정철 집안 잔치에 갔을 때 집에 들어서려는데, 기생들이 있었습니다. 고지식한 성혼은 정철에게 “저 기생들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다.”라고 지적했지요. 하지만, 율곡은 “물들어도 검어지지 않으니 이것도 하나의 도리”라고 했습니다. 기생들이 있다 해도 추잡해지지 않으면 선비의 본분을 지키는 것에 누가 되지는 않으니 함께 잔치를 축하해 주자
며칠 전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이러한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매화는 아름답습니다. 조선시대 화가들은 매화 그림을 참 많이 그렸습니다. 특히 매화가 눈송이처럼 보이는 전기(田琦, 1825~1854)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일명 梅花草屋圖)는 정말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눈 덮인 산, 잔뜩 찌푸린 하늘, 눈송이 같은 매화, 다리를 건너오는 붉은빛 옷을 입은 선비가 잘 어울려 가슴 설레게 하는 그림이지요. 이 그림은 전기가 그의 벗 오경석을 위해 그린 것이라는데 매화가 만발한 산속의 집에 앉아 있는 선비는 전기이고, 거문고를 메고 다리를 건너 초가집을 찾아가는 붉은 옷의 선비는 아마도 오경석일 것이라 짐작됩니다. 전기는 조선 후기 화가로 추사 김정희 문하에서 서화를 배웠으며 추사파 중에서도 사물의 형식보다도 그 내용·정신에 치중하여 그린 화가로 유명합니다. 문인화의 경지를 잘 이해하고 구사한 화가로 글씨와 시, 문장에도 뛰어났고 그림은 특히 산수화를 잘 그렸는데 고요하고 쓸쓸하면서도 정답고 담백한 그림을 남겼지요. 이 겨울 전기의 매화서옥도는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줍니다.
“세상 사람은 말하되 새해도 깁부다고 한다. 과거를 거울 삼어 새로운 희망을 말한다 하나 우리 조선인에게는 깁붐의 새해가 아니라 비운의 새해이다. 설상가상으로 갑자년은 더욱히 재앙이 만흔 해이였다. 전 조선을 통한 긔근의 참상은 우리가 날마다 식그럽게 드러왔다. 그러나 당국은 이에 대하야 무관심의 태도이다.” 위 내용은 1924년 12월 31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甲子年은 다가, 새살림 경륜의 방침을 찻자”라는 제목의 기사입니다. 내용을 더 읽어보면 강자에게는 강자의 진리가 있고 또한 약자에게는 약자의 진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갑자년을 보내는 마당에 우리가 약자라는 것을 깨닫고 과거의 삶을 벗어나 자유평등의 새 삶을 꾸려나가려면 어떠한 방법으로 나가야 하는지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924년은 일제의 수탈에 더하여 흉년으로 사람들이 큰 고생을 하던 때입니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약자의 진리를 내세웁니다. 식민지 백성 조선인으로서 고통도 수용하자는 소극적인 태도로 보입니다. 힘이 없는 언론으로써 한계가 있었겠지만 너무 무기력한 태도가 아닌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어두운 시절이지만 희망을 잃지 말자는 말은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