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4절기의 네 번째 춘분(春分)입니다. 춘분을 즈음하여 농가에서는 농사준비에 바쁜데 농사의 시작인 애벌갈이(논밭을 첫 번째 가는 일)을 엄숙하게 행하여야만 한 해 동안 걱정 없이 풍족하게 지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고려사≫ 사한조(司寒條)에 “고려 의종 때 의식으로 맹동과 입춘에 얼음을 저장하거나 춘분에 얼음을 꺼낼 때 사한단(司寒壇)에서 제사한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날부터 얼음을 꺼내 썼던 것 같습니다. 춘분날은 농사가 시작되는 시기로 "하루 밭 갈지 않으면 한해 내내 배고프다"라고 했습니다. 이때는 겨울철에 얼었다 땅이 풀리면서 연약해진 논두렁과 밭두렁이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고 말뚝을 박기도하고 하늘바라기논(천수답)처럼 물이 귀한 논에서는 물받이 준비도 했지요. 또 춘분 때 날씨를 보아 그 해 농사의 풍흉, 가뭄과 홍수를 점치기도 했습니다. ≪증보산림경제≫ 권15에 보면 춘분에 비가 오면 병자가 드물다고 하고, 해가 뜰 때 정동(正東)쪽에 푸른 구름 기운이 있으면 보리에 적당하여 보리 풍년이 들고, 만약 청명하고 구름이 없으면 만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열병이 많다고 믿었지요. 이날 동풍이 불면 보리 풍년이 들며, 서풍이 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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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김영조 사룀
우리 겨레는 뛰어난 문화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임진왜란 등 전란에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문화재가 나라밖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빠져나간 문화재가 거의 도둑맞거나 빼앗긴 것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빠져나간 문화재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꾸준히 확인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동안 확인되었던 나라밖 문화재는 116,896점이었는데 지난해만 2만3천여 점이 늘어나 이제 모두 140,560점(20개국 549개 기관과 개인)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특히 그 가운데는 일본이 65,000여 점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미국으로 38,000여 점, 독일 10,000여 점 순으로 나타났지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국외에 흩어져있는 한국문화재의 현황파악을 위해 각국 소재 한국문화재 목록화 작업과 학술조사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지난해 미국 98개, 독일 지역 16개 박물관 및 도서관 등 한국문화재 소장기관의 협조를 받아 그동안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문화재에 대한 목록 작업을 했습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앞으로도 알려지지 않은 나라밖에 있는 한국문화재에 대한 조사를 계속해 나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나라밖에 있는 우리
자격루(自擊漏)를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면 “자동으로 시보를 알려주는 장치가 되어 있는 물시계”라고 나옵니다. 요즘말로 하면 바로 자명종물시계가 되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자격루는 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만든 것인데 자동시보장치까지 갖춘 물시계로 세종 16년(1434년)에 장영실 등이 주관하여 만든 것입니다. 이 자격루는 세종임금이 펼친 천문기구와 시계를 만드는 사업 곧 “간의대사업(簡儀臺事業)”의 중요 품목이지요. 자격루는 대파수호에서 중파수호로 중파수호에서 소파수호로 물을 흘려보내 시간을 가늠케 합니다. 그런 다음 24시간 동안 두 시간에 한번 종을 치게 하고, 해가 진 다음 부터 해가 뜰 때까지는 20분마다 북과 징도 치게 했습니다. 동시에 시간마다 子, 丑, 寅, 卯 등 12지신 글씨 팻말을 쥔 인형들이 나와 시간을 알려주기도 하지요. 파루를 치는 군사가 격무에 시달려 깜빡 조는 바람에 파루 치는 시간을 놓쳐 매 맞는 것을 본 세종이 자격루를 만들라고 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명종시계를 만들면 군사가 꼬박 시계만 들여다보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한 세종의 백성 사랑이 자격루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자격루 발명 의미는 당시 중국도 만들지
치욕의 역사입니다만 명성황후는 일제의 흉계에 의해 무참히 죽어간 조선의 국모입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일제는 조선을 강제병합했고 식민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명성황후 유물은 남은 게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펴낸 ≪명성황후 한글편지와 조선왕실의 시전지≫를 보면 명성황가 쓴 많은 한글편지와 아름다운 시전지(시나 편지를 쓰는 종이)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기 실린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이기대 학술연구 교수 글에 따르면 현재까지 찾아진 명성황후 편지는 모두 134점 정도이며 이 편지글은 오늘날 귀한 유물입니다. 그동안 실물이 확인된 황실 여성 최초의 한글편지는 인목대비 김씨(선조) 것이있으며, 이밖에 남아있는 것은 장렬왕후 조씨(인조), 인현왕후 민씨(숙종), 인선왕후 장씨(효종), 혜경궁 홍씨, 순명효황후 민씨(순종) 등이 쓴 편지가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당시 천대 받던 언문을 살려 편지를 썼고, 교지 글도 한글로 쓰는 등 글줄께나 하던 학자들 대신 우리글을 사랑하였으며 이것은 그동안 한글 연구와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명성황후 한글편지와 조선왕실의 시전지≫에 소개된 편지를 보면 명성황후의 심정이 잘 드러나며,
매화보다도 더 일찍 눈을 뚫고 꽃소식을 전하는 얼음새꽃을 아십니까? 얼음새꽃은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우며 숲 속 습기가 많은 그늘에서도 자라는 꽃으로 키는 보통 10~30cm입니다. 쌓인 눈을 뚫고 나와 꽃이 피면 그 주위가 둥그렇게 녹아 구멍이 난다고 하여 눈색이꽃이라고도 하는데 보통은 생명력이 강하다하여 한자말 복수초로 알려졌습니다. 설날에 핀다고 원일초(元日草), 눈 속에 피는 연꽃 같다 하여 설련화(雪蓮花), 꽃이 황금잔처럼 생겼다고 측금잔화(側金盞花)라고 하며 눈송이꽃이라고도 불리는 등 꽃이름도 참 여러 가지입니다. “모진 겨울의 껍질을 뚫고 나온 / 핏기 어린 꽃의 날갯짓을 봐 / 햇살 한 모금에 터지는 神의 웃음을 / (중략) 모두들 봄이 아니라 할 때 / 어둠 속 깨어나지 않는 벽을 넘어 / 나긋나긋 세상을 흔들고 있구나 / 낙엽더미의 굳은 목청을 풀어 / 마른 뼈들 살아 굼틀하는 소리 / 산을 들어 올리는 저 생기를 봐.” 한현수 시인은 얼음새꽃(복수초)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모두들 봄이 아니라 할 때 나긋나긋 세상을 흔들며 꽃을 피는 얼음새꽃에는 산을 들어 올리는 생기가 엿보입니다. 아직 꽃샘추위가 오는 봄을 시샘하고 있지만 얼음새꽃은 그 추
일제강점기와 광복 뒤 최고의 한글학자이셨던 외솔 최현배 선생은 비행기를 “날틀‘이라고 하여 비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지나친 국수주의라는 것이었죠. 정말 그럴까요? 하지만, 조선시대 이미 ”날틀“이란 말이 쓰였음을 아는 이는 적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솜틀, 재봉틀처럼 기계를 ”틀“이라 불러왔지요. 임진왜란의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진주대첩에는 “날틀” 곧 “비거(飛車)”가 활약했었다고 하지요. 일본 쪽 역사서인 ‘왜사기’에 전라도 김제의 정평구라는 사람이 비거를 발명하여 진주성 전투에서 썼는데 왜군들이 큰 곤욕을 치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날틀은 하늘을 나는 차를 말하며, 곧 비행기의 다른 말이라 해도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18세기 후반에 쓴 신경준 문집 ≪여암전서≫와 19세기 중반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이 '비거' 곧 날틀이 등장하지만 정확한 모양이나 어떤 쓰임새였는지는 확실하게 나와 있지 않지요.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말도 많이 수입되었습니다. 이때 대부분 말들은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고, 지식인들은 이를 우리 토박이말로 바꿔보려는 생각은 안 하고 그대로 써버렸습니다. 그 까닭은 지식인들 대부분이 일본에 빌붙어
지금 강도 8.8의 지진이 난 일본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었고, 사람들을 구해내기 위한 사투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볼 때 다행히 그런 큰 지진은 없었지만 세종 때 한성에 큰 불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세종실록 31권, 8년(1426년) 2월 15일 기록에 보면 “한성부에 큰 불이나 행랑 1백 6간과 중부 인가 1천 6백 30호와 남부 3백 50호와 동부 1백 90호가 불에 탔고, 남자 9명, 여자가 23명이 죽었는데, 타죽어 재로 화해버린 사람은 그 수에 포함되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 일 이후 세종임금은 명을 내려 소방관청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는 집 사이에 방화장(防火墻, 불을 막는 담)을 쌓고, 곳곳에 우물을 팠으며, 초가지붕을 기와지붕으로 고쳤지요. 이 금화도감은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이 되었다가 성종 12년에는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로 고쳤습니다.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에는 멸화군(滅火軍)이란 상근소방대원이 있었는데 불을 없애는 군사라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정원은 50명이었고 24시간 대기하고 있다가 불이 나면 곧바로 출동해서 불을 끄는 소방관입니다. 조선에서 방화(放火)는 대부분 사형이었고 대사령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문집인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복암이 일찍이 선중 씨 집에 칠실파려안을 설치하고, 거기에 비친 거꾸로 된 그림자를 취하여 화상을 그리게 했다. 공은 뜰에 놓은 의자에 해를 마주하고 앉았다. 털끝 하나만 움직여도 초상을 그릴 길이 없는데, 흙으로 만든 사람처럼 굳은 채 오래도록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선에 사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정약용 등 실학자들이 현대 사진기의 전신인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 바늘구멍상자)를 ‘칠실파려안’이라 이름 붙이고 연구했던 때로 봅니다. 여기에서 ‘칠실(漆室)'은‘매우 캄캄한 방', ‘파려'는 '유리', '안(眼)'은 '보다'로 '캄캄한 방에서 유리렌즈를 통해서 본다'라는 뜻인데 이 기구는 바늘구멍상자의 유리에 비친 화상에 종이를 대고 그린 것으로 복암 이기양이 선구인 셈입니다. 또 우리나라에 사진관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83년 황철이란 사람이 자신의 서울 집 사랑채를 고쳐 촬영국을 만들고 초상사진과 기록사진을 찍었으며, 같은 해 김용원이란 사람도 일본인 사진사를 불러와 서울에 촬영국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엔 사진관이 아닌 촬영국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