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4절기의 시작 입춘(立春)입니다. 입춘이 되면 새봄을 맞이하는 뜻으로 손수 새로운 글귀를 짓거나, 옛사람의 아름다운 글귀를 써서 봄을 축하하는데 이를 '춘련(春聯)' '입춘방' '입춘첩'이라 합니다. 이 춘련들은 집안의 기둥이나 대문, 문설주 등에 두루 붙입니다. 또 한지를 마름모꼴로 세워 ‘용(龍)’자와 ‘호(虎)’자를 크게 써서 대문에 붙이기도 하지요. 춘련에 흔히 쓰이는 글귀 가운데 가장 많이 쓰이는 '입춘대길 (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은 “입춘에는 크게 좋은 일이 있고, 새해가 시작됨에 경사스러운 일이 많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입니다. 또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 개문백복래(開門百福來)'는 “땅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온갖 복이 들어오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이렇게 춘련은 그 해의 복을 비손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입춘 세시풍속 가운데는 적선공덕행도 있습니다.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이란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일을 꼭 해야 한 해 동안 액(厄)을 면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밤중에 몰래 냇물에 징검다리를 놓거나, 거친 길을 곱게 다듬거나, 다리 밑 거지 움막 앞에 밥 한 솥 지어 갖
섣달 그믐날, 곧 까치설날에는 어린아이들에게 까치두루마기를 입혔습니다. 까치두루마기의 기본은 일반 두루마기와 같지만 각 부분의 색을 달리한 것이 특징입니다. 노란색을 앞 가운데의 겉섶에 썼으며, 길(몸판)은 연두색으로, 소매는 연두색이나 색동으로 했고, 안은 분홍색으로 댔습니다. 남자아이는 깃, 고름, 돌띠를 남색으로 하고, 무(양쪽 겨드랑이 아래에 대는 딴 폭)는 자주색으로 하였으며, 여자아이는 깃, 고름, 돌띠를 붉은색이나 자주색으로 하고, 무는 남색으로 했습니다. 이렇게 색동으로 아름답게 지은 까치두루마기는 까치설날 뿐 아니라 설빔으로도 입었으며, 요즘은 돌옷으로도 입힙니다. 까치두루마기는 다섯 가지 색으로 지었다고 해서 ‘오방장두루마기’라고도 불립니다. 길과 소매를 검정 이외의 밝고 고운 색으로 만들어 어린아이들이 입는 길이가 긴 웃옷.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이 가진 모든 아름다운 색을 모아 좋은 운수의 기(氣)를 받고, 인간이 염원하는 장수(長壽), 부귀권세(富貴權勢), 영화(榮華)를 염원하면서 아기들에게 만들어 입혔지요. 사진은 덕혜옹주의 까치두루마기입니다. 덕혜옹주는 고종황제의 막내딸로 1912년 태어났지만 12살 어린나이로 일본에 볼모로 잡혀
예전엔 섣달그믐 자정이 지나면 복조리 장수들이 집집이 누비며 복조리를 팔았고 아낙네들은 다투어 복조리를 사는 풍경이 있었지요. 복조리 값은 깎지도 무르지도 않았습니다. 복을 깎고 복을 찬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복조리에는 동전이나 엿을 담아 문이나 벽에 걸어 놓아 복을 비손했습니다. 쌀을 일어 돌을 골라낼 일이 없는 요즘 복조리는 이미 부엌에서 사라진 지 오래지만 예전엔 부엌살림의 필수품이었지요. 조리는 주로 대오리, 버들가지, 산죽, 싸리 등으로 엮어 만들어 썼습니다. 조선후기의 농업 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대를 가늘게 쪼개 국자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조리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1925년에 펴낸 최영년(崔永年, 1856~1935)의 시집 ≪해동죽지(海東竹枝)≫에는 ‘예로부터 섣달 그믐날의 해가 저물면 복조리 파는 소리가 성 안에 가득하다. 집집마다 사들여서 붉은 실로 매어 벽에 걸어 둔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조리질하는 방향은 복이 집안으로 들어오라는 뜻으로 집 안쪽을 향했고 한 해의 복이 쌀알처럼 일어나라는 뜻을 담아 한 해 동안 쓸 조리를 새해 첫 날에 샀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정네들은 복을 갈퀴처
≪송남잡지(松南雜識)≫는 조선후기 학자 조재삼이 쓴 책입니다. 이 책은 국어학·역사학·철학·동물학·복식사·음악사 같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담고 있어 백과사전이라 불릴 만합니다. 하지만 조재삼에게도 한계가 있었던 듯 잘못된 기록도 종종 보입니다. 그 예 가운데 훈민정음 창제한 관한 것도 있지요. “살펴보건대, 세종이 병인년(1446) 측간(뒷간)에 갔다가 똥을 눈 다음 뒤처리를 할 때 쓰는 나무막대 곧 측주(厠籌)가 가로세로로 된 것을 보고 반절(反切,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위는 ≪송남잡지≫ 제3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 가운데 훈민정음을 1443년이 아닌 반포한 해인 1446년에 창제했다고 한 것과 나무막대를 보고 만들었다는 것은 분명히 잘못말한 것이지요. 현대 언어학자들은 한결같이 훈민정음이 과학적인 글자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닿소리(자음)를 목구멍·혀·이·입술 같은 발음기관을 본떠 만들었다는데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무려 11,172자까지 글자로 표현하여 세상 웬만한 소리는 거의 기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찌아찌아족 같은 글자 없는 겨레에게 도움을 줄 수가 있는 것이지요. 들리는 바로는 일부 여행사 관광안내원은
"고만고만한 아이들 / 화롯가에 모여 / 부엌 나간 할머니 기다리네 / 찬바람 묻어 온 날감자 / 장밋빛 불꽃 먹고 / 익어 가는 밤 / 곰방대 길게 늘어뜨린 / 주름진 손마디로 / 잘 익은 놈 골라 / 호호 불어 손자 입에 넣어 주던 할머니" 위는 고야 시인의 <화롯가 풍경> 입니다. 깊어 가는 겨울 밤 화로에서 밤이나 감자를 굽던 기억이 아련합니다. 오지·무쇠·놋쇠·곱돌 따위로 만들었으며 형태도 다양했던 화로는 예전 우리 겨레의 훌륭한 난방기구였지요. 화로(火爐)는 난방용으로 쓰던 것 말고 평상시에는 음식을 데우거나 끓이는 용도와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사용하는 불씨를 보관하는 용도로도 쓰였습니다. 또 옷을 지을 때 마무리에 쓰이는 인두를 꽂아 쓰기도 했구요. 화로는 상하 계층, 빈부 차이를 가리지 않고 두루 쓰이던 살림살이 중 하나로 옛날에는 불씨가 집안의 재산 운을 좌우한다고 믿어 살림을 맡아 하는 여인네들이 불씨를 보존하는 데 정성을 쏟았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보온력이 강한 은행나무나 목화 태운 재로 불씨화로를 따로 만들 정도였으며 집에 따라서는 불씨가 담긴 화로를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물려주기도 하였지요. 종가에서 분가할 때에는 그 집의
“제가 벼슬자리에 있어서 잘못된 것은 비단 신의 집 명예에 아름답지 못할 뿐 아니라, 선비의 기풍에 흠이 되게 한 것이니, 신이 무슨 마음으로 감히 벼슬을 생각하여 만인이 함께 바라보는 영상의 지위에 뻔뻔스러운 얼굴로 있겠나이까. 저를 파면하시어, 문을 닫고 죽음을 기다림으로써 물의를 일으킴에 사과하는 것이 신하의 직분이라 생각하옵니다.” 위는 세종 22년(1440) 12월 21일 영의정 황희가 자기 아들이 도둑질한 것이 드러난데 대해 스스로 파면을 원하는 상소를 올린 내용입니다. 황정승의 아들 황중생은 내탕(內帑, 임금의 재물을 넣어두는 창고)의 금술잔과 광평대군(廣平大君)의 금으로 된 띠 그리고 동궁이 쓰던 이엄(耳掩, 모피로 된 방한모)들을 훔쳐 발각된 것입니다. 이에 명재상 황정승은 부끄러워하며, 만인지상 영의정 자리에서 내쳐주기를 바랐지요. 그런가 하면 세종 7년(1425) 6월 24일에는 영돈녕 유정현이 늙어서 나랏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며 사직하고자 청했습니다. 또 세종 20년(1438) 12월 25일에는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이 늙은 어머니의 모심을 들어 사직을 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임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한번 자리에 앉으면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지금은 별 것 아닌 홍역 같은 전염병에도 쩔쩔 매곤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홍역이 마을을 한바탕 쓸고 지나가면 한 집에 여러 아이가 죽어나갔기 때문입니다. 당시엔 아이가 홍역을 앓게 되면 정성을 들여야 병이 쉽게 낫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사람들은 “벼슬떡"을 해서 마마신이 잘 가시라고 ”마마배송“을 했습니다. 아이들 얼굴에 “꽃(흉)”이 어느 정도 아물면 떡을 조금 짚에 싸서 밖에 내놓습니다. 또 세 갈래 길에 짚을 십자 모양으로 깔아놓고 떡을 올려놓습니다. 이를 “벼슬떡”이라 불렀고, 마마신이 가기 전에 떡을 잘 먹고 가시라고 비손하는 이 행위를 사람들은 “마마배송”이라 했지요. 그런데 홍역에 걸리지 않은 아이가 이 떡을 주워 먹으면 이상하게도 곧바로 홍역을 치릅니다. 또 아이가 홍역에 걸리면 하자는 대로 해야 탈이 없다고 믿어서 초상집에 가자고 하면 초상집에 데리고 가야했습니다. 그렇게 까다롭던 홍역이었지만 요즈음 홍역을 마마신 들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질병에 대한 과학적 규명이 아직 안되던 시절이야기는 전설같긴 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의 문화와 정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이야기거리임에는 틀
텔레비전 사극에서는 가끔 오열하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옵니다.그것이 아쟁이라는 악기에서 나오는 것임을 아시나요? 격정적인 슬픔이 이어질 때 시청자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은 바로 그 아쟁산조인 것이죠. 아쟁은 연주자의 앞쪽에 수평으로 뉘어 놓고 '활대'를 수직방향으로 써서 연주하거나, 가끔씩 손가락으로 가야금처럼 뜯기도 하면서 연주하는 악기입니다. 아쟁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는데 정악아쟁은 7현∼10현이며, 산조아쟁은 정악아쟁보다 조금 작고 주로 8현입니다. 아쟁은 아시아 여러 나라에 퍼져있는 악기 '쟁(爭)'의 하나이지만, 우리의 아쟁(牙箏)은 연주방법이 독특합니다. 일본의 '고토(爭, koto)'나 중국의 '(爭, zheng)'은 손가락으로 줄을 뜯거나 퉁겨서 연주하는데 견주어 우리 아쟁은 '쟁(爭)' 종류 가운데 유일하게 활대를 이용하여 줄과의 마찰로 소리를 내는 악기입니다. 오열하는 듯한 아쟁산조 소리는 아녀자의 슬픔이 아닌 남정네의 눈물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것은 가볍고 높은 소리가 아닌 무겁고 장중한 소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느린 진양조 가락에서는 격정적으로 흐느끼다가 중모리-중중모리로 이어지고 빠른 자진모리와 휘모리로 넘어가면서 차츰 한을 풀어
“궁중에서 왕자가 태어나면 ‘권초의 예(捲草之禮)’라는 것이 있다. 태어난 날 다북쑥으로 꼰 새끼를 문짝 위에 걸고, 자식이 많고 재화가 없는 대신에게 명하여 3일 동안 소격전(昭格殿)에서 재(齋)를 올리고 초제(醮祭, 별에 지내는 제사)를 베풀게 하는데, 상의원(尙衣院)에서는 5색 채단을 각각 한 필씩 바쳤고, 남자면 복건(頭)ㆍ도포ㆍ홀(笏)ㆍ오화(烏靴)ㆍ금대(金帶)요, 여자면 비녀ㆍ배자(背子 ; 덧옷)ㆍ혜구(신의 하나) 등의 물건을 노군(老君, 물러난 임금) 앞에 진열하여 장래의 복을 빌었다.” 위 글은 조선 전기 학자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 나오는 것으로 여기에 보면 왕자가 태어났을 때 바치는 예물로 덧옷의 하나인 배자가 등장합니다. 이처럼 배자는 이미 조선 전기부터 입었던 옷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견주어 대원군이 청나라에서 들여 온 만주족 옷인 “마괘”의 변형인 마고자와 양복의 조끼를 변형하여 입은 조끼는 배자보다 역사가 짧습니다. 조끼와 마고자는 단추가 있고 이 보다 오랜세월 입어 온 배자는 저고리 위에 덧입는 것으로 단추와 소매가 없는 조끼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배자 속에는 토끼 ·너구리 ·양 따위의 털을 넣어 가장자리 부분에서 밖으로 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