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능력없고 게으른 흥보가 운이 좋아서 갑자기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푼 선행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이야기, 사람이나 미물을 대할 때, 정성을 다 하는 착한 마음이 밑바탕에 깔려있지 않으면 이러한 결과는 기대하기 어려운 법인데, 인간사에는 정성을 다해 베풀고 이의 댓가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 은혜를 입고도 이를 까맣게 잊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 늘 시끄럽기 마련이라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박타령에 관한 이야기이다. 글자 그대로 박을 타며 부르는 노래가 바로 박타령이다.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를 처마 밑에 심었더니 수십 일 만에 지붕위에 세통의 박이 달렸는데, 팔월 추석임에도 먹을 것이 없는 흥보 부인이 자식들을 데리고 가난 타령으로 울다가 흥보와 함께 박을 타기 시작한다.
판소리 <흥보가>의 또 다른 별칭이 바로 <박타령>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이 대목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목은 한가하면서도 여유있고, 가락적이면서도 흥겨운 분위기가 느짓한 진양장단에 맞추어 마치 배를 타고 노를 저어가는 듯한 유려한 멋을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대목은 발림을 멋스럽게 처리해야 실감이 더욱 난다.
누구나 알다시피 판소리는 소리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소리 이외에 말로 대사를 읊는 아니리가 있고, 춤이나 동작으로 실감나게 연기하는 발림이 주요 구성요소이다. 사설의 의미를 더욱 실감나게 표출하기 위해 소리꾼들은 한손에 부채를 들고 나오는데, 바로 그 유일한 소도구인 부채의 활용으로 사설의 실제 상황을 실감나도록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발림의 역할이 중요하다 하겠다.
창(唱)이 음악적 요소이고, 사설은 문학적 요소, 아니리와 발림은 춤이나 연극적 요소로 볼 수 있다. 명창들이 벌이는 소리판에 가보면 세 가지 요소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재미와 감동의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박타령 대목>은 누가 불러도 재미가 있지만, 나는 경북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인 정순임 명창의 박타령을 즐겨한다. 그 이유는 마치 톱을 들고 박을 타는 듯, 부채로 톱질하는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실제의 상황을 방불케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지난해, 중국의 연변예술대학 대극장에서 <한중 교류음악회>를 진행할 때의 일이다. 대극장에 대학의 간부, 지역의 음악인, 학생들이 꽉 들어찼는데, 정순임 명창이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하면서 마치 톱질을 하듯 흥보가 중에서 이 대목을 불러주어 극장을 꽉 메운 청중들로부터 대단한 호흥을 받던 그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가 이어졌는데, 내 옆에 앉았던 연변의 교수들은 한결같이 “소리도 좋았지만, 부채를 들고 마치 톱질을 하는 듯한 정명창의 연기는 너무도 멋있었다.”고 소감을 진솔하게 전해 주는 것이었다.
발림이란 너름새, 또는 사체(四體)라고도 부른다. 사설의 내용에 맞게 높은 것은 높게 느껴지고, 먼 곳은 멀게 생각되도록 부채를 활용하여 발림을 사실적으로 잘 표현해 주어야 판소리 감상의 효과가 배가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참고로 박타령의 사설을 읽어보도록 한다.
“시르르르렁 실건 당거 주소. 헤이 여루 당거주소. 이 박을 타거들랑은 아무것도 나오지를 말고 밥 한통만 나오너라. 평생의 포한(抱恨)이로구나. 헤이 여루 당기어라, 톱질이야.” (줄임) 우리가 이 박을 타서 박속을랑 끓여먹고 바가지일랑은 부잣집에다가 팔어다가 목숨 보명(保命) 살아나세, 당겨주소. 강상의 떠난 배가 수천 석을 지가 실고 간들, 저희만 좋았지, 내 박 한통을 당헐 수가 있느냐. 시르르르렁 실건 시르르르렁 실건 시르렁 실건, 당기어라, 톱질이야”
이렇게 여유있게 진양 장단을 타며 느짓하게 박을 타다가 이제 박이 벌어질 시점에 다다르면 진양조 장단으로는 분위기가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신이 나고, 흥이 오른 흥보 내외가 빠른 휘모리 장단에 맞추어 거침없이 톱질을 한다. “시르렁, 시르렁, 시르렁, 시르렁, 시르렁, 시르렁, 식삭, 톡게” 창은 멎었고, 벌어진 상황은 이렇게 아니리로 설명되고 있다.
“딱 쪼개놓으니 박속이 횡하니 비었제, 무복자(無福者)는 계란에도 유골이라더니 박속은 어느 도적놈이 다 가져가고, 난데없는 웬 조상궤를 갖다 놨네요. 흥보 마누라가 “여보 영감 한번 열어나 봅시다. “글쎄 이걸 열어봐서 좋은 것이 나오며는 좋지만은 아, 궂은 것이 나오면 어떡허제?” “하여튼 한번 열어나 봅시다. 흥보가 자기 마누라 말을 듣고 열고 보니, 쌀이 하나 수북, 또 한 궤를 열고 보니 돈이 하나 가뜩, 두 양주가 어찌나 좋아났던지 각기 한 궤씩을 들고 한번 떨어 부서 보는 디,
“흥보가 좋아라고, 흥보가 좋아라고, 궤 두 짝을 떨어 붓고 나면 도로 수북, 톡톡 털고 돌아섰다 돌아보면 도로 하나 가득 허고, 돌아섰다 돌아보면, 쌀과 돈이 가득허고, 돌아섰다 돌아보면, 도로하나 가득허고, 돌아섰다 돌아보면, 도로 하나 가뜩, 아이고 좋아 죽겄다. 일년 삼백 육십일을 그저 꾸역 꾸역 나오너라”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