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심소 선생과 교분을 나누었던 지인 및 제자들의 추억담 가운데서 구희서, 김매자, 김은희 등이 보내온 내용 일부를 소개하였다. 구희서의 글에서는 “무보(舞譜)에 의해 재현된 궁중무용은 순서는 찾을 수 있지만, 춤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나 멋은 되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선생의 존재 값어치”를 말했고, 김매자는 「창무회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스승님」이 바로 김천흥 선생이었다고 전제하면서 1975년 서울(명동극장)에서 창작공연을 했을 때, 많은 사람이 외면했으나, 선생님만은 격려해 주셨던 점을 기억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리고 김은희는 1997년 하와이 주립대 대학원 첫 학기 때, <정농악회(正農樂會)>의 초청공연에서 홍보와 통역을 맡으면서 선생과 인연이 되었다는 점, 당시의 천진난만한 아이와 같은 선생의 미소와 식사 전, 조물주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점이 인상적이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해 주었다. 1997년도 하와이 주립대에서 한국 <정농악회(正農樂會)>의 초청 공연이 이루어졌는데, 이 단체는 어떻게 결성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심소 선생의 역할은 어떠했는가? 하는 이야기로 이어가 본다. 우선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가면 안 쓴 처용(處容)이 바로 심소(心韶)”라는 이야기와 5주기 추모문화제 관련하여 전시회와 세미나, 그리고 처용랑(處容郞)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처용은 본래 용왕의 아들이었으나 인간으로 화신(化身)하여 경주에서 왕정을 돕고 있었는데, 부인의 예쁜 미모를 탐하는 역신(疫神)이 인간으로 화신하여 동침(同寢)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태연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에, 역신이 감동하여 사과하고 물러갔으며 이후에는 나라 사람들이 처용의 화상을 대문 앞에 붙여 놓았는데, 역신들이 얼씬거리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심소 선생을 일러 <가면 안 쓴 처용>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것도, 어찌 보면 항상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는 처용의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이리라. 이번 주에는 생전의 심소 선생과 교분을 나누었던 많은 지인과 제자들이 선생의 삶과 예술을 회고하며 보내온 추억담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일부를 이 난에 소개해 보기로 한다. 먼저 문화예술평론가 구희서의 <소중한 궁중무용의 생명줄>이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전승계보가 뚜렷하면서도 정작 살아있는 춤의 숫자는 귀한 분야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궁중(宮中)음악과 춤의 명인, 99살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한 심소, 김천흥 명인은 천진난만한 미소와 함께 유머와 재담(才談)으로 상대와 주위를 훈훈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이야기, 특히 낮은 자세로 임하는 겸손의 미덕을 실천해 온 분이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나는 지금도 심소(心韶), 김천흥 선생을 떠 올리면 잊히지 않는 말과 함께 그 표정이 떠오르는 것이다. 바로 지그시 눈을 감은 선생이 “국가로부터 월급을 받고 생활해 왔다는 자체가 참으로 망극하다”라는 진심어린 표현이다. 얼핏 듣기엔 누구나 갖는 마음씨처럼 보이지만, 액수의 다과(多寡)를 떠나 선생의 순수하고 진심이 담긴 마음씨를 엿보게 만드는 말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선생이 장수할 수 있었고, 건강한 삶을 영위해 온 배경도 자세히 살펴보면 건강식이나 운동이 아니고. 바로 국가와 이웃에 감사하는 마음과 겸손의 미덕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 왔다는 점이 주된 요인이 아닐까 한다. 벌써 10여 년 전이다. 심소 김천흥 선생의 5주기 추모문화제가 <국립국악원>과 <심소 김천무악예술보존회> 공동주최로 열린 바 있는데, 당시의 기억을 되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