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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아리랑 로드 10만Km의 생생한 기록

국악속풀이 318 《아리랑로드 답사 자료집》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박정욱이 펼치는 <배뱅이굿 발표회> 이야기를 하였다.

 

박정욱은 누구보다 배뱅이굿을 사랑하고 아끼는 젊은 명창으로 김정연에게 처음 배우기 시작하였고, 후에는 이은관을 사사하였다는 이야기, 배뱅이굿 이외에도 경서도민요, , 민속놀이, 굿, 연기,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해 내공을 쌓아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배뱅이굿>의 내용은 <배뱅이>라는 처녀가 상사병에 걸려 죽게 되자, 그녀의 혼을 달래주기 위해 8도의 무당들을 불러 굿을 하는 과정을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으며 노래, 아니리(대사), 발림(몸짓, 연기)으로 남도의 판소리와 비교된다는 이야기, 배뱅이굿은 100여년이 넘는 소리로 김관준 이후로 김종조, 김주호, 최순경, 이인수, 김칠성 등이 이어받았고, 이은관은 이인수에게 배워 일약 대스타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이번 주에는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서 불리는 아리랑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 4인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들은 어느 누구도 음악을 전공하지는 않았으나 고려인으로 살아가는 동포들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특히 그들이 지켜오고 있는 아리랑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아리랑을 찾아 4년 동안, 꾸준히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국인(그 곳에서는 이들을 고려인으로 부르고 있다) 동포들을 찾아 나선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미국 유타대학 명예교수인 이정면 박사, 사회사업가인 류승호씨, 사진작가인 류승률씨, 그리고 문학작가인 서용순씨 등이다.

 

이들은 유라시아의 고려인들을 찾아서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아리랑의 모습을 찍고, 만나고 녹취한 과정을 한 권의 책으로 펴내어 화제가 되고 있다. 이름하여 아리랑로드 답사 자료집이다.

 

그들은 이 자료집을 세상에 내놓으며 67일 수요일 낮 4시에 인사동 소재 토포하우스에서 출판기념회와 사진전도 가질 예정이다.

 

답사대장으로 일행을 인솔한 이정면교수는 현재 93세로 정열이 넘치는 지리학 전공의 노교수이고, 기획과 진행을 담당한 류승호 부대장은 현재 국제와이즈멘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회사업가이며 기록사진을 담당한 류승률씨는 본업은 약사이면서 현재 광진구 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진작가이다. 그리고 작가인 서용순 사장은 현재 이지출판사를 운영하는 문인이다.

 

4인은 음악을 매개로 만난 사람들도 아니고, 직장이나 학교의 선후배 관계도 아니며 그렇다고 사회단체나 여타의 공동체를 통해 공동의 관심을 함께 키워온 사람들도 아닌데, 무슨 이유로 이들은 아리랑을 찾아 나선 것일까? 왜 그 광활한 땅에 흩어져 사는 53만 유라시아의 고려인들을 여러 차례 만나고 돌아온 것일까? 아리랑을 사랑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강했기 때문이라는 대답 외에는 별 다른 이유를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들이 찾아 나선 아리랑은 어떤 노래인가?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에 흩어져 살고 있는 53만 고려인들의 고달프고 아픈 역사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고려인들에게 역사적인 조국이 되기까지의 성공과 몰락을 거듭하면서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호준의 유라시아 고려인-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150에 따르면, 조선인들의 연해주 진출은 19세기 초부터 산발적으로 이루어졌고, 두만강 건너에 조선인들이 거주했는데, 봄에는 몰래 국경을 넘어가 농사를 짓고, 가을에 추수를 하면 귀향하는 형태의 계절 출가 농업을 한 것이 조선인들의 연해주 진출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 후, 1900년대 전후, 일제의 침탈과 전쟁의 희생자가 되는 등, 근세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자의, 타의로 러시아 땅에 이주를 시작한 것이다.


1937, 러시아의 독재자 스탈린은 연해주의 고려인들 18만여 명을 현대판 디아스포라로 내몰아 버린다. 그것도 단 1주일분의 식량만을 준비시켜서 말이다. 추운 어느 겨울 밤, 브라디보스톡에 모인 18만 명의 고려인들은 가축 운반용 시베리야 철도에 짐승처럼 실려서 러시아의 벌판으로 강제 추방되는데, 노약자들은 이미 열차 안에서 대부분 사망했다. 영하 30도의 강추위 속에 영문도 모른 채, 갈대밭에 버려진 그들은 추운 겨울을 어떻게 넘겼을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춥고 어두운 러시아 벌판이나 카자흐스탄, 또는 우즈베키스탄에 버려진 조선인들은 나라 없는 서러움을 한탄 할 사이도 없이, 추위와 굶주림, 질병과 싸우고 시달려야 했으며 이를 이기지 못한 수많은 동포들은 사망하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가해진 탄압의 역사는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가 고르바초프 이후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유배지 중앙아시아는 우리가 가서 목 놓아 엉엉 울어야 할 곳이다.”라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10)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10)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10)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10)

 

이들에게 아리랑은 어떤 노래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수준의 단순한 전통민요로 인식되기 보다는 민족을 하나로 묶어준 강력한 힘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사를 넘나들면서도 그들은 아리랑을 목이 터져라 부르며 고통을 이겨냈던 것이다. 고려인 동포들에게 아리랑은 희망이었고, 조국이었으며, 부모였고, 생명이었고, 하늘이었고, 애국가 이상의 노래였던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