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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포천에서 열린 박영실의 경기잡가 발표회

[국악속풀이 326]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까지는 유지숙 명창이 불러주는 서도 좌창 <제전(祭奠)>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벽파 이창배의 가창대계에서는 <제전>의 노랫말을 표준어로 기록하고 있으나, 황해도 출신의 박기종 명창은로 표기하며날 다려만 가렴아.’와 같은 부분도날 데려만 가소 구레로 불러서 향토색이 짙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예전에는 인생무상을 강조하는 독백형식의 넋두리로 시작하는 형식이었으나 근래에는 곧바로 노래부터 시작한다는 이야기, 제전의 장단은 불규칙적이면서도 자유스런 리듬이나, 6박의 도드리 장단형태가 중심이 되고, 부분적으로는 4, 5, 7박의 형태도 있어 노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반주가 용이하지 못하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번 주에는 묵계월 명창을 스승으로 모시고, 소리공부를 열심히 해 온 포천의 소리꾼, 박영실이 더위가 극성을 부리는 한 여름(726), 포천 문화원에서 묵계월류 경기잡가의 소리판을 열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모두들 더위를 피해 피서를 떠나는 시기에, 경기북부 지방의 포천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비인기 종목으로 치부되는 잡가 발표회를 갖는다는 자체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 다소 걱정이 앞섰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장을 들어서는 순간, 그것은 쓸데없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포천 문화원 대극장은 대로변에 아담하게 지어진 크지 않은 건물이었으나, 300여석 공간은 이미 공연 전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박영실 명창의 유명세인가? 포천 시민들이 전통의 소리를 좋아하는 것일까? 분위기로 보아서는 양쪽 다 정답같이 보였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나는 경기 12잡가란 무엇이고, 박영실을 가르친 묵계월 명창은 어떤 분이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감상요령이나 감상태도 등을 간단하게 덧붙였다. 요약하면 이러한 이야기이다.

 

묵계월은 주수봉, 최정식 등 대 명창들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매일같이 소리공부를 열심히 해서 자신만의 특유한 목구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 명창의 반열에 오른 후에도 연습이 생활화 되었던 사람이라는 점, 국가에서 인정한 예능보유자의 자리를 나이가 들었다고 스스로 용퇴한 최초의 양심적인 명창이었다는 점, 그가 주력했던 4종의 좌창곡은 <적벽가>, <출인가>, <선유가>, <방물가> 등이고, 그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였다.



 

묵 명창은 경서도창이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크게 일조한 명창이었으며 과거 전통사회에서 소리꾼은 예술인으로 대접을 받지도 못했지만, 묵계월이 가꾸고 키운 제자들은 오늘날 전국 각지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 그래서 오늘 이곳 포천에서 발표회를 열게 된 박영실 역시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은 제자로, 선생의 경기잡가를 충실히 이어가는 동시에 이와 병행하여 <영평 8경소리 보존회>를 결성하여 지역의 소리를 활성화하고 있어서 포천시민은 물론, 전국적으로 음악, 문화계에 주목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이 날, 발표회의 첫 순서는 12좌창 가운데 묵계월이 전수해 준 <적벽가><출인가>였다. <적벽가>는 삼국지에 나오는 한 대목으로 쫓겨가던 조조가 화용도 좁은 길에서 관우를 만나 꼼짝없이 죽게 되자, 과거 관우에게 베푼 은혜를 상기시키며 목숨을 구걸하는데, 관우는 이를 물리치지 않고 길을 열어 살려주었다는 대목이다. 경기소리로는 드물게 씩씩하고 무게가 느껴지는 곡이다. 이에 견주어 <출인가>는 판소리 춘향가 중 떠나게 된 이도령을 위해 술과 안주를 준비해서 오리정으로 나가 기다리는 대목이다.

 

2종의 긴소리를 무난히 소화한 박명창과 12명의 제자들은 후반부에도 다시 나와 <선유가><방물가> 등 쉽지 않은 긴 호흡의 좌창을 열심히 불러 주었다.

 

여럿이 제창을 하게 되면 골격(骨格)선율이나 구성음은 그런대로 맞추어 가지만, 음가(音價)가 짧은 잔가락군이나 떠는 소리, 밀어올리고, 내리는 기교 등은 제대로 표현이 어려운 법인데, 시종일관 진지하면서도 당당하게 불러 주었다. 그래서 이들이 오랜 기간 발표준비를 매우 열심히 했구나 하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운 여름날,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무대에 올라 소리의 호흡을 맞춘 박영실과 그의 제자들에게 노고를 높이 치하하고 싶다.

 

또한 객석을 메운 포천시민들의 조용하고도 성숙된 감상태도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잡가 발표회가 너무도 조용히 진지하게 진행된 것이다. 상식적인 말이지만, 긴잡가의 노랫말은 한번 들어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감상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가사 전체를 화면으로 처리해서 전면에 띄어놓았기에 객석에서는 지금 어느 부분을 노래하는가? 하는 점을 확인할 수 있어서 감상의 효과를 배가시킨 점도 성공의 요인이었다.


   

긴잡가를 부르는 사이사이에 흥겨운 경기민요들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박영실이 부른 정선아리랑은 강한 것괴 부드러움 그리고 명암(明暗)을 교차시켜가며 곡선의 흐름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살려서 객석으로부터 뜨거운 환호와 함께 제청을 받았다. 또한 이날 초대손님으로 무대에 오른 국가문화재 57호 경기민요의 이수자들인 박매자와 신월숙 명창은 창부타령으로 경기소리의 흥겨움을 고조시켜 주었다. 무대 앞으로 나와 흥겹게 춤을 추는 사람들이 많은 점으로 보아 전통을 애호하는 포천시민들의 수준도 짐작이 된다.

 

이 날의 마지막 곡은 회원 전원이 나와 영평(永平)팔경(八景)의 서곡에 해당하는 수월정신(水月精神)을 불렀는데, 자리를 함께 한 포천시민들 중 많은 분들이 함께 부르는 모습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랬다.

 

포천의 <영평 팔경>이라 함은 여덟 개의 아름다운 경치를 말하는 것으로, 다른 지역, <관동 8>이나 <단양 8>처럼 그 지역의 산이나 강이 오랜 동안 자연스럽게 만들어 놓은 경치가 되겠다. 영평팔경은 포천군과 영평군에 있던 경치로 한탄강가의 약 60리 짧은 강줄기에 산재된 경치들이다.

 

이것은 포천이 낳은 조선시대의 이름난 재상을 지낸 박 순(1523~1589)의 시()로 화적연, 금수정, 창옥병, 와룡암, 낙귀정, 백로주, 청학동, 선유담 등을 가리킨다. 또한 이 한시(漢詩)는 포천의 향토사를 연구하는 이석구 씨 등이 현대적 언어로 재창작을 하고, 새롭게 곡을 얹어서 <영평팔경가>로 만들었다.

 

바로 이 노래를 박영실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노래와 춤, 연극으로 입체적 무대를 꾸며 꾸준히 공연해 오고 있어서 포천의 명물이 되고 있는 것이며 인근 지역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경기소리를 전공하는 박영실 명창 한 사람이 포천의 국악을 이렇게 변화시킬 수 있는 배경에는 제자들의 협력과 지역 유지들, 그리고 전통문화의 가치를 누구보다 귀하게 여기는 시민들의 아낌없는 협조가 있어서 가능했으리라는 추측이 어렵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