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지금 생각해도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그마한 키에 얌전하게 생겼지만 애교가 전혀 없고 곰처럼 둔하다는 평가를 들으면서 살아온 내가 어떻게 "어머니 학교"에서 유일하게 남편의 편지를 받아냈는지?
몇 년 전, 나는 친구의 소개로 "어머니 학교"를 다녔다. 첫날 특강을 듣고 분조토론을 가졌고 마지막에 숙제를 냈다. 이튿날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분조별로 숙제를 점검하고 대표를 뽑아 발표하게 했다. 첫날 숙제는 어머니한테 편지를 쓰는 것이었고 두 번째 날에는 남편한테 편지 쓰는 것이고 세 번째 날에는 남편이 사랑스러운 리유, 자식이 사랑스러운 리유를 써내는 것이었다. 이 모든 숙제는 자기절로(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어서 다른 어머니들도 숙제를 아주 잘해왔다.
그런데 네 번째 날 숙제는 남편한테서 안해에게 쓴 편지를 받아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남편이 해야 하는 숙제였다. 모두들 그 숙제는 어렵다고 의견을 제기했다. 많은 어머니들이 도리질 하면서 완성할 수 없다고 난색을 하였다. (저 어머니들은 왜 저러지? 왜 남편한테 말도 해 보지 않고 포기부터 하시려 하지?)
시어머님 말씀을 빈다면 나의 남편은 "각시 말 잘 듣는" 자상한 남편이다. 또 남편이 문과졸업생이고 련애할 때 나에게 많은 시와 편지를 써준 력사가 있어 글 쓰는 실력이 괜찮다고 여기여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여보, 오늘 ‘어머니학교’에서 숙제를 냈는데 남편이 쓴 편지를 가져 오래요. 당신 써줄 거죠?"라고 했다.
"뭐라우? 무슨 편지?"
남편은 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몇 마디 따지다시피 물었다.
"우리 결혼 한지 20년 넘었지요? 같이 아들, 딸 키웠죠? 안해로서 엄마로서 내가 수고 많았죠? "
"그래, 수고 많은 거 알고 있소."
"고맙지 않아요?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하고 싶은 말을 래일까지 써주세요." 마지막 말은 거의 명령에 가까운 어투였다.
이튿날 오후 세시쯤에 나는 남편한테 전화를 걸었다.
"여보, 편지를 다 썼어요?"
"무슨 편지?"
금시초문인 것처럼 시치미 떼는 남편…
"어제 저녁에 얘기 했었잖아요? 나한테 편지 한 장만 써 달라구요. 그런데 아직도 안 쓰면 어떻게 해요?"
나는 너무도 안타깝고 어처구니없어 전화기를 탕 내려놓았다. 전날 많은 어머니들이 도리질하는 리유를 그제야 알만했다. 갑자기 서러움이 북받쳤다.
사실 우리 세대 녀자들은 남편들보다 몇 곱절 더 일한다.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고 퇴근하면서 시장에 들려 찬거리를 사오고 집안청소를 도맡아 하고 모든 빨래를 하고 자식들 숙제검사까지 해야 한다. 어디 그 뿐이랴. 지금은 사회가 발전하여 집에서 컴퓨터로 혹은 휴대전화로 각종 결제가 가능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기세, 물세, 난방비, 전화비 등을 일일이 발품 팔아가며 물어야 하고 시댁, 본가집의 대소사에도 빠짐없이 나서야 한다.
그렇게 수고하는 안해한테,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모든 시간과 정력과 정성을 이바지하는 안해한테 공로상을 주지 못할망정 고마움의 편지 한 장 쓰지 않는다면, 아니, 내가 그렇게 많은 수고를 하고도 남편한테서 편지 한통 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프고 원통하고 억울한가! 련애할 때에는 내가 아무런 공헌이 없어도 숱한 시와 편지를 써주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성만 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두 시간 안으로 어떻게 해서든 다 쓴 치약을 억지로 짜내듯 남편한테서 편지를 받아내면 나는 만사 오케이다. 치미는 화를 가까스로 누르면서 나는 책장에서 옛날 수첩을 찾아냈다. 거기에는 20여 년 전 남편이 사랑을 고백하면서 나한테 써주었던 시가 적혀 있었다. 나는 전화기를 다시 들었다. "여보, 당신 시간 되면 끝까지 잘 들어 보세요."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시를 읊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수없이 많건만
내 마음은 오로지 매화에게만 쏠리고 싶어라.
너의 그 강직함과 아름다움은
장미꽃을 압도하거늘
끓어 넘치는 사랑의 감정 억제 못하여
꽃가지 끌어안고 속삭이고 싶었더라.
매화여, 내 부디 순정의 마음으로
일생을 끝까지 너만 믿고 사랑하겠노라고.
편지를 쓰지 않아 미안해서인지 남편은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고 있었다. 다 듣고 나더니 "누가 쓴 시인데?" 라고 물었다. "당신이 쓴 시잖아요." 가뜩이나 톤이 높은 내 목소리가 몇 옥타브 더 높아졌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한테 써준 뒤로 다시 보지 않은 남편이 20여 년 전에 자기가 쓴 시를 기억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동안 가끔 기분 나쁠 때나 슬플 때나다 꺼내 보다보니 거의 외울 정도인데.
“"내가 시를 그렇게 잘 썼었소?"
"그럼요. 편지도 얼마나 잘 썼는데. 그래 내가 홀딱 반해 시집왔잖아요. 그런데 20년이 지나니 편지 한장 써 달라는 것도 이렇게 제발제발 빌어야 하네요."
남편이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 고민하는 것 같았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이번 기 어머니학교 학원생이 60여 명인데요. 만약 숙제를 못하면 그 많은 어머니들 앞에서 톡톡히 망신당할 것이고 당신은 유일하게 안해한테 편지를 쓰지 않은 나쁜 남편으로 딱지가 달릴 것 같네요. 그리고 한국에서 오신 강사님들 앞에서 국제적인 망신이 되려나. 그러면 제가 평생 당신을 좋아하겠어요? 미워하겠어요? 알아서 하세요.“
저녁에 '어머니학교' 갈 시간이 다 되어 차비를 마쳤는데도 남편이 오지 않아 실망하고 있는데 다급한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달려가 얼른 문을 열었더니 남편이다.
"당신 아직 안 갔네."
5층까지 올라와 숨이 차 헐떡이는 남편을 보노라니 기대감이 생겼다. 과연 남편이 가방에서 종이 한 장 꺼내서 내민다. "마음에 들게 썼는지는 모르겠소. 쓰지 않으면 당신이 평생 미워할까봐 급히 써가지고 왔소." "고마워요."긴 말 할 사이도 편지를 읽어볼 사이도 없이 나는 제꺽 편지를 받아들고 집을 나섰다.
다행히 지각은 아니었다. 역시 먼저 숙제를 점검하였다. 그런데 이날은 분조토론이 없고 강사님이 "남편이 쓴 편지를 갖고 온 어머니들 손들어 보세요." 한다. 아마도 숙제를 완성한 사람이 적으리라고 미리 짐작하는 모양이다. 뭐라고 썼는지 몰라 손을 들 엄두를 못 내고 남편이 준 종잇장을 꺼내 보려는데 "웬일이세요? 어제 분명히 숙제 냈는데. 한 사람도 없어요?" 하는 강사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돌아보니 손을 든 사람이 과연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얼결에 손을 들어버렸다.
그랬더니 얼른 나와 읽으란다. 나도 읽어보지 못한 글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읽으라니? 아무리 우리글이 읽기 쉽다고 해도 감정포착은 해야 하지 않을까! 예전에 교학할(가르칠) 때에 아무리 짧은 과문이라도 꼭 몇 번씩 읽고 난 후에 교단에 올라섰었는데 좀 무리하다고 여겨나가지 않으려 하니 주변 사람들이 기어코 나가란다. 억지로 떠밀려 나가 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끝까지 읽었다.
안해에게:
40 고개를 넘어 인생을 돌이켜보니 안해인 당신도 어머니처럼 아끼고 존경하고픈 마음이 생기는구만. 젊어서는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에 와서 한 남자에게 있어서 안해가 얼마나 소중한 자리를 차지하는가를 깨닫게 되였소. 당신은 나의 아들딸의 어머니이자 나에게도 어머니 같은 존재였소.
중국글에서 안해를 왜 “신냥(新娘)”이라고 했는지 지금 와서 알것 같소. 나를 낳아 키워준 늙은 어머니 “로냥(老娘)”이 채 하지 못한 의무를 새로 들어온 각시가 계속하여 달라는 뜻으로 새 어머니, “신냥(新娘)”이라고 한것 같소. 그래서 세세대대 내려오면서 안해들이 남편을 자식 보살피듯이 관심하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겠소.
조선력사에 나오는 바보 온달이 새어머니 “신냥(新娘)” 평강공주의 보살핌과 가르침을 받아 나라의 장수가 되였듯이 나도 당신 덕분으로 오늘과 같이 건장한 체구와 일정한 사회직위를 갖춘 남자로 되였다고 나는 생각하오. 당신의 관심과 바람으로 표현된 잔소리는 어릴 때 들었던 어머니의 잔소리와 꼭 같았는데 나에 대한 요구는 당신이 더 엄격했소.
때로는 그 잔소리가 귀찮아 짜증도 났지만 밖에 나가 일에 부딪칠 때마다 언제나 당신의 진심 어린 충고와 심각한 표정이 떠올라 자신을 자제하고 행동거지를 조심하면서 그 어떤 유혹이나 위험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곧게 살아올 수 있었소. 당신의 잔소리는 명의의 중약과도 같이 삼킬 때는 썼으나 그 약효는 무궁무진했소.
한마디로 말하면 낳아준 어머니는 나를 반성품으로 만들어 주었으나 당신은 나를 완성품에 가깝게 만들었소. 그래서 나는 당신을 날이 갈수록 더욱 사랑하고 존중하게 되는구만.
20여 년간 이 남편과 자식들을 위하여 우리 김 씨 가문을 위하여 모든 정열과 청춘을 바친 당신, 진심으로 고맙소.
당신의 남편으로부터
편지를 다 읽었지만 내용은 머리 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고 그저 “로냥(老娘), “신냥(新娘)”이라는 단어만 간신히 기억되었다. 한 페이지 반밖에 안 되여 빨리 읽을 수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랑독이 끝나자 우렁찬 박수소리가 터졌고 머리를 들고 보니 익숙한 분들이 참 잘했다고 엄지를 내민다. 어정쩡해 하며 자리에 돌아와 자세히 읽으며 음미해 보니 생각 밖으로 잘 쓴 것 같았다.
이 편지 한 장으로 “어머니학교”에서 나는 유일하게 남편 편지를 받아온 안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