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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화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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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과 열매 / 김정애

석화 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33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올해 아흔네 살 되는 우리 엄마가 이야기보따리를 풀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나는 내 앞가림을 착실히 했다.”라는 말씀이다. 흐뭇한 어조로 말하는 엄마의 얼굴에는 홍조가 어린다. 수많은 세월 속에서 허리는 꼬불었지만 착한 인생을 살아온 엄마의 자존심은 꼿꼿하다. 지금으로부터 62년 전 엄마는 전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남게 되자 시골에 사는 우리 아버지와 재혼하였다. 당시 아버지에게는 여섯 살 되는 딸, 네 살 되는 아들, 그리고 년로한 부모님까지 있었다. 아버지는 엄마보다 십오 년 년상이지만 유식하고 시비 바른 사람이었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가 존경스럽고 좋았다고 한다. 결혼 뒤 엄마는 일 년 만에 나를 낳았고 몇 년 뒤에는 동생까지 낳았다. 큰집살림인지라 만만치 않았지만 재롱을 떠는 우리가 있어서 행복했단다.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우리들을 보면서 학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엄마와 의논했더니 엄마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첫돌도 안 되는 동생을 업고 서둘러 이사했다. 이사한 뒤 아버지 건강은 그다지 좋지 않아 집주변에 심은 채소밭이나 가꾸고 간혹 돼지죽이나 한두 번 주면 그뿐이었다. 엄마는 유일한 로동력이

말 한마디가 천냥 무게 / 조금화

[석화 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32]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말 한마디가 천냥무게”, 제목을 달고 보니 기쁨 반 슬픔 반, 야릇한 웃음이 입가로 스쳐 지난다. 그래도 내 맘은 ‘행복한 웃음인데’라고 알려준다. 그래 그랬었지. 그때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고 감격스러웠다. 벌써 13년 세월이 흘렀다. 젊은 나이에 유방암진단을 받고 집안사정으로 지방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어느 날 저녁, 주치의사랑 저녁식사를 마친 남편이 휘청거리며 집에 들어서더니 나를 흘깃 보는데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순간 신경이 예민해진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의사선생님이 뭔 말씀했길래 저럴까? 설마…... 나는 다짜고짜 남편을 침실로 잡아끌었다. “당신 왜 울어요? 정작 울어야 할 사람은 나인데. 당신이 이렇게 약한 모습 보이면 난 누구한테 의지해야 돼요?” 그러자 입이 천근무게인 남편이 나를 꼭 안아주며 “동무 죽으면 나도 따라 죽겠소.” 라고 하면서 슬프게 우는 것이었다. 맙소사. 내가 뭔 일을 저질렀지 나 때문에 많은 사람 울리고 가슴 아프게 하고 진짜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면서도 맘 한구석으로 난류가 흐르고 감격의 물결이 이는 것을 어쩌랴. 맨날 무뚝뚝하고 자기중심적이어서 “돼지”라고 나무람만 했는데

"친엄마 아니예요?" / 최선숙

석화 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31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친엄마 아니에요?" 딸애는 종종 의문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때마다 나는 짐짓 정색해서 되묻는다. "응? 어떻게 알았지? 내가 고아원에 가서 나 닮은 애를 데려다 입양한 줄을." 그러면 딸애는 이렇게 대꾸한다. "거짓말, 그럼 사람들이 왜 나를 엄마 꼭 빼 닮았다 해? 난 엄마 친딸이야.“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인데 나이 삼십이 다 되어 딸애를 본 우리는 애가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다. 쥐면 부서질까 놓으면 날아갈까? 금지옥엽으로 키우면서 애 아빠도 나도 다 애한테만 사랑을 쏟고 애가 없었던 나날들은 어떻게 살았던가 싶을 정도로 아기에게 엄청 집착하였다. 뒤늦은 아이의 탄생은 그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완전히 다른 즐거움과 쾌락을 안겨주어 우리는 세상의 행복을 다 가진 것처럼 만족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중시절 한 숙사에서 가깝게 보내던 동창생이 상해에서 연길로 출장 왔던 길에 아기도 볼겸 그 동안 헤어져 살았던 회포도 풀겸 겸사겸사 우리집에 와서 며칠 묵어가게 되었다. 친구는 자기가 먼저 애를 키워보았노라고 애 키우는데 천방지축인 나를 도와 자질구레한 일들을 거들어주면서 이런

우리집 “데릴사위” / 전옥선

석화 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30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나는 전 씨 가문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아들만을 선호하던 그 세월에 둘째는 꼭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엄마는 은근히 바라셨다. 점쟁이도 찾아가고 심지어 첩약까지 잡수셨는데 내가 또 딸로 태어나서 얼마나 락심하고 눈물 흘리셨는지 모른단다. 엄마와 비슷한 시기에 임신한 뒷집 경식이 엄마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떡판 같은 아들을 덜컥 낳았다. 경호를 낳았을 때 그 집은 경사난 집처럼 흥성흥성했고 나를 낳았을 때 우리집은 초상난 집처럼 스산했다니 억울해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가 없다. 엄마는 나를 낳고 3년 만에 또 녀자아이를 낳았다. 셋째까지 딸을 낳고 엄마는 눈물을 휘뿌리며 아들 없는 설움을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경호네는 경호 아래로 또 남자아이를 낳아서 경호엄마는 우리 집에만 오시면 딸타령을 하셨고 그때마다 엄마는 입만 다시며 어색하게 웃으셨다. 아들 못 낳은 우리 엄마를 위안하는 소리 같기도 하지만 어쩐지 어린 나도 엄마를 비웃는 것 같아 경호엄마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어쨌든 말귀를 알아들어서부터 아들타령을 못 박히게 들어온 나인지라 어떻게 하나 아들 있는 집 못지않게 부모를 기쁘게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로냥(老娘)”과 “신냥(新娘, 신랑)” / 최영숙

석화 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29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지금 생각해도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그마한 키에 얌전하게 생겼지만 애교가 전혀 없고 곰처럼 둔하다는 평가를 들으면서 살아온 내가 어떻게 "어머니 학교"에서 유일하게 남편의 편지를 받아냈는지? 몇 년 전, 나는 친구의 소개로 "어머니 학교"를 다녔다. 첫날 특강을 듣고 분조토론을 가졌고 마지막에 숙제를 냈다. 이튿날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분조별로 숙제를 점검하고 대표를 뽑아 발표하게 했다. 첫날 숙제는 어머니한테 편지를 쓰는 것이었고 두 번째 날에는 남편한테 편지 쓰는 것이고 세 번째 날에는 남편이 사랑스러운 리유, 자식이 사랑스러운 리유를 써내는 것이었다. 이 모든 숙제는 자기절로(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어서 다른 어머니들도 숙제를 아주 잘해왔다. 그런데 네 번째 날 숙제는 남편한테서 안해에게 쓴 편지를 받아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남편이 해야 하는 숙제였다. 모두들 그 숙제는 어렵다고 의견을 제기했다. 많은 어머니들이 도리질 하면서 완성할 수 없다고 난색을 하였다. (저 어머니들은 왜 저러지? 왜 남편한테 말도 해 보지 않고 포기부터 하시려 하지?) 시어머님 말씀을 빈다면 나의 남편은 "각시 말 잘 듣

“엄마”와 “어머니” / 김영자

석화 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28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엄마”라는 말과 “어머니”라는 말은 같은 말이면서 다른 말이다. 우리집에서도 그렇고 어릴때 우리가 살던 시골 고향마을에서도 그렇고 “엄마”라는 말과 “어머니”라는 말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는 말이였다. 우리가 이런 느낌을 받게 된것은 순전히 우리 어머니에서 비롯된 것이다. 며칠전, 시조카의 결혼잔치에 갔다가 딸애가 수탉모양의 옛날식 색과자를 얻어왔다. 하지만 돌처럼 땅땅한 색과자를 그대로 먹을수 없어서 봉투채로 나한테 맡겼다. 그래서 어릴때 우리 어머니가 하시던대로 시루를 놓고 쪘는데 솥에서 피여오르는 향긋한 과자향기에서 나는 어른거리는 어머니 모습을 떠올렸다. 우리 어머니는 보통 키에 항상 깡굴깡굴* 짧은 파마머리를 하셨는데 갸름한 얼굴에 눈매며 콧마루며 입매가 부드러웠다. 아무리 힘든 농사일을 하셔도 밖에서 집으로 들어오실 때에는 늘쌍 방그레 웃으셨다. 어머니는 우리 오남매들이 실수하거나 잘못해도 언성을 높여 꾸짖거나 탓하지 않고 몇 마디로 너그럽게 넘어가주셨다. 그러나 우리들의 불손한 언행에 대해서는 항상 조곤조곤 타일러주셨다. “세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집에서 새는

토색목도리에 깃든 사랑 / 리정화

[석화 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27]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동지섯달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겨울이면 어린 학생들이 엄마손을 잡고 학교로 가는 모습을 본다. 털목도리, 털장갑, 따뜻한 신발로 전신무장한 애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나는 넋 없이 이런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어느덧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우리 집은 오빠와 언니 둘 그리고 남동생과 녀동생에 나까지 모두 여섯남매였다. 어머니는 장기환자였고 아버지의 한분의 노동력으로 꾸려가자 보니 매우 가난하였다. 어릴 때 나는 언니들이 물려주는 옷을 기워 입었고 새옷은 언제 입어봤던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70년대의 겨울은 어찌나 추웠던지… 소학교는 마을에서 5 리나 떨어진 곳에 있어 하학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입김에 눈썹이 어느새 할아버지 눈썹으로 되고 살을 에는 추위에 입이 얼어 말도 더듬거리게 된다. 또한 불어치는 눈보라를 피하려고 뒷걸음치며 걷다가 넘어지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귀가 얼어서 벌겋게 부어나니 어머니가 눈밭에서 가지대를 가져다 끓여서 그 물로 씻어줄 때도 있었다. 소학교 3학년 때, 우리반 담임선생님으로 김련숙 선생님이 오셨다. 항상 웃음 띤 얼굴에 인자한 모습인 선생님을우리들은 모두 좋아했다. 선생님께서

행복노트 / 김경희

석화 시인이 전하는 연변이야기 26

[우리문화신문=석화 시인] 나한테는 행복노트가 하나 있다. 바로 우리 딸 란이가 어렸을 때부터 커온 과정을 기록한 성장노트이다. 열 달 만에 홀로 서기를 하던 그 시각의 기쁨, 2살에 아기코끼리 이야기를 한번 듣고 외우던 놀라움, 7살에 아빠 생일선물로 그린 카드, 소학교부터 고중까지 성적표들, 그리고 가족 사이에서 오갔던 편지들… 현재 기업경영고문과 프로강사로 활약하는 우리 딸은 30대이지만 이 엄마가 보기에도 뿌듯한 많은 성과들을 거두었다. 전 미국대통령 부시, 세계경제포럼 주석 클라우스 슈바프 및 중국외교부장 왕의 등 국가리더와 유명인사들의 외교통역을 담당했는가 하면《빅데이터(掘金大数据)》의 번역저자이기도 하다. 영국 런던대학 발전관리학 석사, 청화대학 경영관리학 석사(MBA)를 졸업한 딸은 청화대학 경제학원 력사상 처음으로 조선족녀학생이 졸업대표강연을 하면서 력사의 한 페이지를 남겼고 요즘은 천진위성 유명프로그람 “그대만이 할 수있다〈非你莫属〉”의 인력자원고문으로 위임되면서 매체인지도도 꽤 높다. 프로필이 화려한 딸은 또 일만 잘하는 게 아니라 현재 북경애심녀성네트워크 차세대담당 부회장, 전국애심녀성포럼 차세대 위원장을 맡아 ‘80, 90후’ 차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