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경기 명창, 노학순의 <재담소리, 장대장 타령> 발표 공연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재담(才談)이란 ‘남을 웃기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 말속에 녹아 있는 재치(才致)와 풍자로 사회의 불의(不義)나 불합리한 면을 익살스럽게 비판할 수 있고, 또는 습관화 되었거나 편협된 생각을 유연하고 경쾌하게 흔들 수 있어야 한다는 점, 1900년대 초, 암울했던 시대에 박춘재(1877~1950)명인은 <장대장 타령> 등의 재담소리로 대중들의 주름진 얼굴을 펴 준 것을 얘기했다.
또 박춘재-이순일, 홍경산-정득만-백영춘으로 이어져 온 서울의 재담소리는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점, 노학순은 이은관과 이은주 명창에게 배워 국가무형문화재의 이수자가 되었고 무학여고에서 민요강사로 활동했다는 점, 그는 춤과 노래, 연기로 다듬어진 소리극에 남다른 끼를 타고난 사람이어서 백영춘의 <장대장타령>에 입문하여 이수자-전수교육조교의 인증서까지 받아낸 노력형의 소리꾼이란 점 등을 이야기 하였다.
지난 달 16일, 재담소리 <장대장타령>공연은 노학순 이외에 그가 지도하고 있는 <경토리 민요단>의 단원들이 대거 대극장 무대에 섰다. 이 민요단은 성동구 문화원 출신 수강자들로 경기민요를 수료한 후, 심화과정에 속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단체이다. 이들은 경기민요 외에 경서도 좌창이나 입창, 또는 창작곡 등을 배워서 발표회, 특별공연, 기획공연 등을 마련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산골마을이나 해안가의 소외지역을 찾아다니면서 경서도 민요의 멋과 흥을 전파하는 소리의 전도사역을 맡고 있는 것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은 재능을 우리사회의 불우한 이웃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순수한 봉사에 칭찬과 격려를 보낸다. 이들은 호주, 러시아, 중국, 베트남, 캐나다, 미국 등 해외공연까지 경험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민요를 알리는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겸하여 민간 외교사절의 역할도 하고 있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전통민요와 가까이 지내다 보니 스스로가 즐겁고, 나의 노래를 듣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이웃을 위해 봉사하려는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그들의 열정이 이번에는 재담소리극, <장대장타령>까지 도전하게 만든 것이다. 대부분의 배역을 그들이 맡아 열연을 했다.
일반적으로 재담극(才談劇)이란 말만 잘하고, 소리만 잘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민요창이라는 소리를 바탕으로 해서 대사처리, 연기력, 춤이나 동작 등이 종합적으로 훈련되어야 하는 어려운 과정이 바로 소리극이다. 이들은 약 3달 동안 매일같이 모여서 연습을 했다고 하니 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 열정은 대단한 일이다. 노학순과 <경토리 민요단>이 오랜 시간 연습해서 무대에 올린 <장대장타령>이란 재담소리극은 어떤 내용의 이야기인가?
서울 장안의 부유한 양반 자제로 태어난 장대장은 부모를 여의고 난 이후, 매우 가난하게 살게 되었고, 친구들의 도움으로 만포첨사라는 무관 벼슬을 얻어 멀리 떠나게 된다. 만포지역은 조선시대 평안도 강계도호부에 있던 압록강 부근의 마을 이름이고, 첨사(僉使)직은 일선 진영을 관장하던 무관직으로 절도사(節度使)의 아래 벼슬이다.
운 좋게 첨사 자리 하나를 얻어 부임지로 가고 있던 장대장은 파주, 장단이란 곳에서 절세미인 무당이 펼치는 굿을 구경하다가 무당과 눈이 맞아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양반이 무당과 연을 맺는다는 사실은 당시의 풍습으로는 용납이 되지 않았기에 장대장과 무당부인은 늘 전전 긍긍했다. 마침 내직으로 발령이 되어 어린 아들과 함께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한양으로 온 직후, 어린 아들이 병이 들어 굿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부인이 신바람이 나서 과거의 무당이었다는 신분을 잊고 춤을 추고, 소리를 하며 무당의 본색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양반과 무당이라는 신분관계가 드러나니 이를 감추려는 부인과 이를 약점 삼아 장대장에게 이르겠다는 허 봉사의 집요한 겁박이 시작된다. 결국에는 신분의 위협을 느낀 부인이 손을 들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소리극이란 창과 연극이란 두 개의 장르가 협업이 잘 되어야 청중들로부터 환영을 받을 수 있는 종목이다. 소리꾼들의 연기력이란 것이 짧은 시간에 완벽해 지기 어려운 조건이고, 기타 무대 배경이나 소도구의 부족, 효과, 조명, 대사의 암기 등등 여러 면에서 능숙한 배우들과는 거리가 느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첫 술에 배부를 수 있는가! 도전해 보려는 용기가 가상한 것이다.
노학순 명창과 <경토리 민요단>, 그 외의 모든 출연자들이 열연해 주어서 많이 웃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더 다양하고 재미있는 발표회가 지속적으로 선을 보여 재담이 국악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아 갔으면 하는 기대를 해 본다.
끝으로 이 소리극이 오른 성동구 문화원 대극장은 성동구의 문화 중심이다. 예부터 이명길이 이끌던 산타령 왕십리패가 활동하던 곳이고, 해방 이후, 경서도 소리를 문헌과 소리로 정립한 벽파(碧波) 이창배(李昌培) 선생을 낳은 지역이다. 벽파의 고향 땅에서 행해지는 국악공연이나 벽파 전국국악경연대회와 같은 행사에 성동구청과 성동문화원이 적극적인 관심으로 앞장서 주기를 바란다.